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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민보] 순간 속에 영원함, 허윤희 작가의 흔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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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12년 허윤희 작가는 독일 베를린 쿨투어팔라스트베딩 갤러리에서 ‘stove’라는 작업을 진행했다.
지난 2012년 허윤희 작가는 독일 베를린 쿨투어팔라스트베딩 갤러리에서 ‘stove’라는 작업을 진행했다.ⓒ작업 기록 영상 갈무리

커튼을 걷어 올리자, 키 높이의 커다란 창문에서 빛이 쏟아졌다. 빛과 함께 마스크를 낀 한 여성이 길다란 막대기를 들고 벽면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막대 끝에 달린 ‘목탄’에 의해 흰 벽면에 짙은 선이 그어졌다. 그녀는 커다란 벽면 2개와 천장을 온통 난로와 연통, 연기 그림으로 가득 채워갔다. 그녀는 그림을 지웠다가 그 위에 다시 그리기를 수차례 반복했다. 먼저 그린 그림은 새롭게 그려지는 그림 위에 또 다른 배경이 되어갔다. 그렇게 그녀는 12일간 정성을 쏟아 그림을 완성시켰다.

바닥에는 그림을 그리는 과정에서 떨어진 목탄가루가 수북했다. 완성된 그림뿐만 아니라 바닥에 떨어진 목탄 먼지까지 하나의 작품이 되어 1개월 간 전시가 진행됐다. 관객들의 수많은 발자국이 도장처럼 찍혔다. 그조차 한편의 그림이 됐다. 그녀의 그림은 전시가 끝나면서 지워졌지만 관객의 기억과 사진 속에 남겨졌다. 허윤희 작가의 ‘stove’(난로)라는 작품은 그렇게 관객들과 만나고 헤어졌다. (2012년 독일 베를린 쿨투어팔라스트베딩 갤러리)

20여년의 목탄 드로잉·벽화
“삶의 순환과 가장 닮은 그것”

지난 2012년 허윤희 작가는 독일 베를린 쿨투어팔라스트베딩 갤러리에서 ‘stove’라는 작업을 진행했다.
지난 2012년 허윤희 작가는 독일 베를린 쿨투어팔라스트베딩 갤러리에서 ‘stove’라는 작업을 진행했다.ⓒ허윤희 작가 제공

지난달 31일 서울 청담동 디스위켄드룸이 주최하는 ‘작가와의 대화:순간과 영원에 대하여’ 프로그램에서 허윤희(48·여) 작가를 만났다. 허윤희 작가는 ‘목탄’을 이용해 드로잉과 벽화를 20여년 간 그려온 작가다. 그녀는 최근 2012년 작품 ‘stove’로 뉴욕 드로잉 센터(New York Drawing Center)의 작가로 등록됐다.

2012년 추운 겨울, 독일 베를린 쿨투어팔라스트베딩 갤러리로부터 초대돼 전시를 열었던 허윤희 작가는 갤러리 벽면에 설치된 난로를 통해 자신의 이야기를 담아냈다. 난로가 그림을 그리는데 방해가 될 수 있었지만, 작가는 오히려 난로를 그림의 소재로 삼았다. 난로에서 시작된 연통은 그림이 되어 벽면과 천장을 가득 수놓았다.

“난로는 그 지역의 특성을 나타내는 좋은 소재였어요. 동베를린이 굉장히 추운지역이기 때문에 어딜 가나 난로가 있었죠. 그래서 저 난로를 주인공으로 그림을 그려보자고 생각했어요. 그렇게 그려진 그림 속에 연통은 마치 우리들 관계처럼 복잡하게 얽히며 서로 만나기도, 어긋나기도 합니다. 연통에서 나오는 연기는 꽃으로 피어나기도 하죠.”

허윤희 작가는 난로에서 시작된 연통과 연기를 벽면에 그릴 때도 ‘목탄’이란 재료를 사용했다. 목탄은 버드나무와 포도나무 등을 구워서 만든 흑색의 연한 소묘용 화구다. 흰 도화지에 연필처럼 그림을 그릴 수 있지만 연필보다 쉽게 지워진다. 하지만 처음 그렸던 흔적은 완전히 지워지지 않고 연하게 남겨진다. 작가는 “나무를 태워 만든 목탄은 삶의 순환과 가장 닮아있는 자연적인 재료다”라며 “손으로 문지르면 지워지지만,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흔적을 남긴다. 그 흔적을 통해 그림에 이야기와 시간이 켜켜이 겹쳐진다”고 말했다.

8월31일 서울 청담동 디스위켄드룸이 주최하는 ‘작가와의 대화:순간과 영원에 대하여’ 프로그램에서 허윤희(48·여) 작가가 관객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8월31일 서울 청담동 디스위켄드룸이 주최하는 ‘작가와의 대화:순간과 영원에 대하여’ 프로그램에서 허윤희(48·여) 작가가 관객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민중의소리
허윤희 작가가 20년 동안 간직해온 동명의 드로잉북
허윤희 작가가 20년 동안 간직해온 동명의 드로잉북ⓒ민중의소리

고갱의 책 제목은 ‘윤희그림’이란 제목으로

허윤희 작가의 전시 <윤희그림>이 8월8일부터 한 달간 서울 청담동 디스위켄드룸에서 진행됐다. 목탄 드로잉 작업을 하는 작가로 알려진 그녀가 조금은 다른 그림으로 관객들과 만났다. 디스위켄드룸 김나형, 최솔구 디렉터의 회유로 20여년 동안 쌓아 두었던 수천장의 드로잉의 일부를 공개한 것이다. 허 작가는 목탄 드로잉 및 벽화 작업 외에도 매일매일 ‘순간의 소중함’을 간직하기 위해 일기형식의 그림을 그려왔던 것이다. 자유와 예술을 꿈꾸며 떠난 땅 독일에서부터 시작된 드로잉 작업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허윤희 작가는 1995년 4월, 미대를 졸업하고 젊은 작가로 살기에는 너무도 척박했던 한국 땅을 떠나 독일 유학을 택했다. 독일에 정착한 그녀는 하이델베르크 막스베버하우스에서 1년간 독일어를 배웠다. 오전 9시부터 12시까지 독어 수업을 듣고, 오후에는 숙소에서 독일 미술 대학교 입학시험을 준비했다.

그녀에게 독일은 언어와 문화, 심지어 대학시험까지 모든 게 낯설게 다가왔다. 시간이 갈수록 한국에 대한 그리움은 커져만 갔다. 그래서 한국에서 온 편지의 우표만 따로 떼어내 노트 한편에 붙여 놓기도 했다. 반대편에는 토끼 모양의 한국 지도와 그녀가 살던 집을 그려 놓았다. 그리운 집 생각에 빠져들고 싶을 때면 이 노트를 펼쳤다.

독일어 수업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발견한 헌 책방은 그녀의 유일한 안식처였다. 그녀는 “바닥에서 천장까지 사방이 온통 책으로 둘러싸여 있었다”며 “오래된 책 속에서 나는 은은한 시간의 냄새를 맡으며 미지의 나래를 펼치곤 했다”고 회고했다. 그러던 어느 날, 헌 책방에서 수많은 예술서적 속에서 책 한권이 눈에 들어왔다. 프랑스 후기 인상파 화가인 폴 고갱이 생을 마감하기 전에 썼다는 ‘NOA NOA’(노아노아) 책이었다. 책 노아노아는 고갱이 창작에 필요한 고독과 자유를 찾아 떠난 섬, 남태평양 타히티에서의 삶을 다룬 책이다. 고갱이 기록한 낯선 타지에서의 삶에 동질감을 느꼈던 그녀는, 손때가 가득한 고갱의 책을 사서 기숙사로 돌아왔다. (타히티 말 ‘노아노아’는 ‘향기’라는 뜻이다.)

허윤희 작가는 “고갱은 자유와 예술을 찾아 타히티로 떠났다”며 “나도 자유와 예술을 꿈꾸며 독일로 떠나왔다는 점에서 고갱과 나의 처지가 비슷하다고 생각됐다”고 회고했다.

그녀는 붓을 들고 노아노아 책 위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낯선 독일어는 그림의 배경이 되었고, 그 위에 허윤희 작가의 이야기가 그려졌다. 그녀는 “독일에 과연 내가 설 자리가 있을까? 질문을 던지며 그립고 사랑하는 것들을 그려 넣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책 한권이 그림으로 모두 채워졌을 때, 그녀는 ‘NOA NOA’라는 책의 제목을 지우고 ‘윤희그림’이란 제목을 붙였다. 이 책을 계기로 허윤희 작가의 기록 작업은 시작됐고, 독일 대학에 입학했다.

허윤희 작가는 미국의 시인이자 철학가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수필 ‘가을의 빛깔들’에서 영감을 얻어 ‘나뭇잎 일기’라는 작업을 2008년부터 진행해 왔다. 이같은 작업은 1200여장이 넘는다.
허윤희 작가는 미국의 시인이자 철학가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수필 ‘가을의 빛깔들’에서 영감을 얻어 ‘나뭇잎 일기’라는 작업을 2008년부터 진행해 왔다. 이같은 작업은 1200여장이 넘는다.ⓒ디스위켄드룸 제공
허윤희 작가는 미국의 시인이자 철학가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수필 ‘가을의 빛깔들’에서 영감을 얻어 ‘나뭇잎 일기’라는 작업을 2008년부터 진행해 왔다. 이같은 작업은 1200여장이 넘는다.
허윤희 작가는 미국의 시인이자 철학가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수필 ‘가을의 빛깔들’에서 영감을 얻어 ‘나뭇잎 일기’라는 작업을 2008년부터 진행해 왔다. 이같은 작업은 1200여장이 넘는다.ⓒ디스위켄드룸 제공

헨리 데이비드 소로와 ‘나뭇잎 일기’

전시장 한 모퉁이, 5~6명의 관객들이 동네 도서관에서 시집 한편을 꺼내 읽듯 방석을 깔고 앉아 허윤희 작가의 ‘나뭇잎 일기’를 펼쳐보고 있었다. 나뭇잎 일기는 매일매일 기록한 나뭇잎 하나의 그림과 짧은 수필 한편의 기록물이다. 이날 전시된 1200여장의 이 기록은 9개의 파일에 담겨 전시장 한편 낮은 단상 위에 전시돼 있었다. 관객은 벽면에 기대앉아 전시된 기록물을 즐겼다.

나뭇잎 일기는 허윤희 작가가 어느 날 미국의 시인이자 철학가인 헨리 데이비드 소로(Henry David Thoreau)의 책에서 영감을 얻고 2008년부터 진행해온 작업이다.

‘모든 나무와 모든 관목, 모든 풀 하나하나마다 그것이 푸른색에서 갈색으로 변하는 과정에서 그 식물 특유의 가장 선명한 색을 띠었을 때 잎 하나를 표본으로 채집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 그 잎의 윤관을 그린 다음, 물감으로 그 색을 정확하게 표현해 한 권의 책으로 만들어 보는 것이다. 그 책은 얼마나 멋진 기념품이 되겠는가? 아무 때나 책장을 들추기만 해도 가을 숲을 산책하는 기분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그 책을 만드는데 아직은 진전을 보지 못하고 있다.’ (헨리 데이빗 소로우의 수필 ‘가을의 빛깔들’에서)

허윤희 작가는 “소로우의 수필 ‘가을의 빛깔들’을 읽다가 그가 이루지 못한 그림책에 대한 구상을 내가 실현시키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녀는 “매일 집 뒤의 북악산을 산책하며 그 날의 빛깔을 대표하는 나뭇잎 하나를 주워 와서 크기와 모양, 색깔을 똑같이 따라 그렸다”며 “그리고 그 날 만났던 사람, 혹은 스쳐가는 단상, 일상의 순간을 기록했다”고 설명했다.

‘나뭇잎 일기’는 전시 이후에도 관객들과 다시 한 번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생길 예정이다. 디스위켄드룸에서 책으로 출판할 준비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디스위켄드룸은 나뭇잎 일기 외에도 허윤희 작가 독일 브레멘 유학시절의 소소한 기록과 라트비아와 일본 등지에서 레지던시 활동을 했던 이야기 등을 엮어 그림책으로 출판할 계획이다. 디스위켄드룸은 “본 쇼룸은 이러한 준비과정을 시각적으로 프리젠테이션함으로써 허윤희 드로잉의 연속성과 확장 가능성을 모색한다”고 강조했다.

지난달 31일 전시장 풍경
지난달 31일 전시장 풍경ⓒ민중의소리

“지금 이 순간 진심이 담겼다면”

“나는 영원에 대한 갈망을 놓을 수 없었다. 지금 이 순간이 진실하다면 그것은 어쩌면 영원에 맞닿아 있는 것 아닐까.”

작가와의 대화 프로그램 말미, 그녀는 관객들에게 “이 그림들을 모두 모아보니 결국 제 관심은 순간과 영원에 대한 것 같다”고 설명했다. 허윤희 작가는 “순간에 최선을 다하고 싶다”며 “그런 순간들이 모였을 때 영원에 이르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본다”고 말했다.

예술은 우리의 삶에서 떼려야 뗄 수 없다. 미술사를 살펴보면 미술작품 그 자체로 그 어떤 것과도 결부시켜 해석되기를 거부하는 시도도 있긴 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예술작품의 공통점은 우리 삶 속에 깊숙이 들어와 있다는 느낌을 준다. 삶의 매 순간의 소중함을 간직하기 위한 허윤희 작가의 작업은 그래서 더욱 애틋하다.

허윤희 작가는 말한다. “소유하고 남기는 것보다 존재의 소중함을 인식하고 이 순간에 집중해 더 생생히 살아있고 싶다”라고...

한편, 그녀는 독일과 서울, 제주, 일본 등을 오가며 작품 활동 중이다. LIG아트스페이스(2016), 소마미술관(2009년), 사루비아다방(2008년), 인사미술공간(2005년) 등 국내 주요 미술공간에서 초대 개인전을 열었으며, 최근에는 디스위켄드룸(This Weekend Room)에서 전시를 진행했다.

지난 8월8일부터 한달간 청담동 디스위켄드룸에서 허윤희 작가의  전시가 열렸다.
지난 8월8일부터 한달간 청담동 디스위켄드룸에서 허윤희 작가의 전시가 열렸다.ⓒ민중의소리

이승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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