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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민보] 상상력을 자극하는 단순함 - 레고 사진작가 이제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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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가다 문득 벽에 무심코 뚫려 있는 구멍 두 개와 그 아래 절묘하게 생긴 금을 보고 ‘웃긴 얼굴이네’라고 생각해 본 적 있는가.

우리의 뇌는 얼굴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인간이 아닌 다른 사물을 볼 때도 뇌의 안면인식 모듈(방추상얼굴영역‧Fusiform face area‧FFA)이 반응하면서 본능적으로 눈, 코, 입을 찾게 되고 이를 조합해 얼굴로 지각한다. 실제 얼굴이 아님에도 뇌가 상상력을 발휘해 ‘얼굴 착시’를 보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뇌 덕분에 우리는 단순한 점과 선만으로 상상력을 자극받는다. 그 누구도 ‘원 안에 있는 타원 두 개와 반원 하나’를 얼굴로 보라고 하지 않았는데도 우리는 ‘웃는 얼굴’로 인식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처럼 단순함이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물건이 있다. 바로 ‘레고’다.

레고에 있는 조그마한 피규어들의 표정은 단순하다. 그야말로 점 두개와 선으로만 표현돼 있다. 그나마 팔다리도 앞뒤로만 움직일 수밖에 없어 포즈도 제한적이다. 그러나 사각 블럭으로 지어진 세상에 피규어를 놓는 순간, 우리는 이 피규어의 표정과 이야기를 상상하기 시작한다. 단순하므로 나머지 디테일을 상상력으로 채우는 것이다.

이 레고에 이야기를 담아 상상력을 자극하는 사진작가 이제형을 만났다.

레고 사진작가 이제형
레고 사진작가 이제형ⓒ민중의소리

어디서 많이 본듯한 애환의 ‘스톰트루퍼’

이제형 작가의 사진은 주로 스타워즈가 소재로 쓰인다. 그중에서도 스타워즈에 빼놓을 수 없는 ‘스톰트루퍼’가 주인공이다. 그만큼 이제형 작가의 스톰트루퍼 사랑을 각별하다. 오죽하면 그의 블로그 이름도 ‘스톰트루퍼스 라이프(Stormtrooper's life)’일까.

이제형 작가는 스토미(팬들이 부르는 스톰트루퍼의 별명)들을 찍으면서 이야기를 담는다. 특유의 헬멧으로 인상깊은 스토미들은 이제형 작가 사진 속에서 어떻게 보면 억울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또 다르게 보면 ‘흐흐’하고 웃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스토미 성애자죠,(웃음) 스타워즈를 좋아하기 시작했던 시절부터 좋아했던 캐릭터라서 블로그 이름도 ‘스톰트루퍼스 라이프’에요. 스토미들의 일상을 담아서 샐러리맨들의 고충을 표현하려고 했죠.”

'Monday trooper', 사진 속 스톰트루퍼의 모습은 현대 직장인과 닮았다.
'Monday trooper', 사진 속 스톰트루퍼의 모습은 현대 직장인과 닮았다.ⓒ이제형 작가 제공

이제형 작가의 사진을 보면 설명이 없어도 스토미들이 어떤 상황에 처해있는지 이해할 수 있다. 상사(다스베이더)의 눈을 피해 ‘농땡이’를 부리는 스토미나, 상사 앞에서는 쩔쩔매는 스토미 등 우리가 겪은 군대, 회사 등 조직 생활의 애로를 그대로 담고 있다.

스토미들의 이야기가 더욱 공감이 가는 이유는 이제형 작가 자신과 주위의 이야기가 소재가 되기 때문이다. 블로그 닉네임이 ‘장군운전병’인 만큼 ‘빡셌던’ 자신의 군 생활 경험이 담겼다. 그래서 사진을 보면 ‘우리의 주적은 간부’라는 군대 내 우스갯소리가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최근 배가 볼록 튀어나온 ‘아재’ 모습의 스토미도 40대 중반에 접어든 그의 이야기다.

“주로 제 이야기를 하죠. 공감을 얻으려면 그 주재를 잘 알고 있어야 하잖아요. 제 이야기만큼 제가 잘 알 수 있는 게 없죠. 특히 최근에 나오는 ‘아재’ 스토미도 다 제 이야기이에요.(웃음) 지금 키덜트 문화의 주류인 40대 중반 세대가 제가 느끼고 있는 것을 공감하는 것 같아요. 희한하게 젊은 친구들도 공감해줘서 다행이죠.”

'중년 트루퍼:섹시한 올챙이 배', 사진 속 이야기는 이제형 작가 자신의 이야기다.
'중년 트루퍼:섹시한 올챙이 배', 사진 속 이야기는 이제형 작가 자신의 이야기다.ⓒ이제형 작가 제공

‘스타워즈 + 레고 + 카메라’, 3가지 취미가 만들어 낸 ‘성덕’

그의 작품을 보면 세 가지가 보인다. 주요 주제인 스타워즈와 이를 형상화한 레고, 그리고 이들에게 생동감을 불어넣는 그의 촬영 기술이다.

당연히 이제형 작가는 이 세 가지 취미를 섭렵한 취미가로서 레고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초등학교 때부터 레고를 좋아했죠. 그러다 제 아들이 초등학교 저학년일 때 아들과 공감을 좀 해볼까하고 레고를 시작어요. 제가 워낙 스타워즈 광팬이다보니 당연히 레고 스타워즈부터 시작했어요. 그러다가 조립만 하던 레고를 사진으로 찍어 보자는 생각이 들었죠. 사실 사진도 중학교 때부터 사진반도 하면서 한 30년을 찍었거든요. 그래서 조그만 레고 피규어로 이야기를 만들어 사진을 찍어 올리기 시작했죠”

그의 사진은 세 가지 취미를 합쳐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세 가지 취미를 잘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나올 수 있었다. 단순한 레고에 대한 미학과 스타워즈에 대한 이해, 긴 시간 동안 쌓인 촬영 경험들이 이야기가 담긴 그만의 레고 사진을 만든 것이다.

그래도 세 가지 취미 중 그가 가장 빠져 있는 것은 스타워즈다.

“셋 중에서 제일 큰 게 뭐냐고 물으면 스타워즈죠. 초등학교 때부터 좋아했는데 어느 정도였나 하면, 그때 얇은 스타워즈 화보집을 얻으려고 30권짜리 SF소설집을 어머니를 졸라 샀죠. 결국 책은 안 읽고 화보만 보다가 많이 혼나기도 했어요.(웃음)”

그의 사진은 외국에서 먼저 알려졌다. 사진 중심의 SNS인 ‘플리커’에 작품을 올렸더니 외국의 스타워즈 팬과 레고 팬들이 호응했고 이것이 다시 국내로 알려지면서 국내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도 유명해지기 시작했다.

'사막에서의 캠핑', 영국 DK출판사의 ‘레고 스타워즈 비주얼 딕셔너리(LEGO Star Wars:The Visual Dictionary)’에 수록됐다.
'사막에서의 캠핑', 영국 DK출판사의 ‘레고 스타워즈 비주얼 딕셔너리(LEGO Star Wars:The Visual Dictionary)’에 수록됐다.ⓒ이제형 작가 제공

영국의 권위 있는 출판사인 DK의 책에 그의 사진이 실리기도 했다. DK는 어린이들을 위한 화보집을 출간하는 것으로 유명한데 DK에서 만든 ‘레고 스타워즈 비주얼 딕셔너리(LEGO Star Wars:The Visual Dictionary)’에 그가 찍은 ‘사막에서의 캠핑’ 사진이 실린 것이다.

“출판사에서 보기에는 (악당인 스토미들의) 선한 이미지의 사진이고 반전(反戰)의 의미도 있다고 느낀 것 같더라구요. DK 출판사는 익히 알고 있는 곳이라 흔쾌히 사진을 보내줬고 그 사진이 실린 책이 많이 팔린 것 같더라구요. 기뻤죠. SNS에서는 ‘이 사진이 네 것이냐’고 묻는 외국인도 있어요.”

레고 사진작가로 유명하지만 그의 본업은 16년차 교량설계사다. 평일에는 교량설계사로, 주말에는 레고 사진작가로 일상과 취미를 병행하고 있다.

최근에는 본업에서도 레고와 인연을 맺어 ‘덕업일치(취미와 본업이 일치하는 것)’를 이루기도 했다. 바로 강원도에 세워질 예정인 ‘레고렌드’의 진입교량을 설계한 것이다.

“원래 레고랜드 진입교량을 설계하려고 했던 다른 사람이 다른 다리를 맡게 되면서 제가 갑자기 맡게 된거죠. 특이한 인연이라고 생각했어요. 더 신기한 것은 교량을 디자인 하는 분 중에서도 레고 매니아가 있더라구요.”

레고로 풍자한 ‘박근혜’와 ‘최순실’

이제형 작가는 최근 작가로서 새로운 도전을 하기도 했다. 바로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를 레고로 풍자한 것이다.

'Witch and chicken', 누가봐도 박근혜 대통령과 최순실이다.
'Witch and chicken', 누가봐도 박근혜 대통령과 최순실이다.ⓒ이제형 작가 제공

사실 키덜트 동호회에서는 정치, 종교 등 민감한 주제를 꺼내지 않는 것이 불문율처럼 돼 있다. 같은 취미로 모인 이들이 다른 문제로 흩어지는 것을 꺼리는 것이다. 그런 키덜트계에서 가장 민감한 사건을 주제로 한 작품을 공개했으니 그도 나름 불문율을 깰 각오를 했던 것이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를 보면서) 너무 답답했고 제가 잘 할 수 있는 걸로 뭔가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 사진을 촬영했을 때가 국회에 탄핵소추안이 올라가느냐 마느냐 할 때였거든요. 이거라도 안 하면 (탄핵소추안이) 안 넘어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조금이라도 도움이 돼야겠다는 심정으로 촬영했죠. 앞으로도 꼭 해야 할 이야기는 하긴 해야죠.”

이제형 작가는 현재 레고를 이용한 공연과 다양한 협업을 하는 모아이(MOAICO) 소속으로 호텔과 컬래버레이션 전시와 개인전을 진행하는 등 점차 활동의 폭을 넓혀가고 있다. 스타워즈 뿐 아니라 영화포스터를 패러디한 그의 작품도 볼 수 있다. 또 유명 작가나 유명 브렌드와 협업하는 것으로도 유명한 폴 스미스와도 협업해 ‘폴 스미스&레고 스타워즈’ 콜라보 전시를 하기도 했다.

지금 그의 목표는 유럽 진출이다. 세계 최대 레고 스토어인 런던 레고스토어에 자신의 사진을 걸겠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그는 행복한 레고 사진을 찍을 수 있도록 사회가 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행복한 레고 사진을 찍을 수 있는 그런 세상이 됐으면 좋겠어요. 지금은 너무 답답하고, 너무 비참하잖아요. 얼른 행복한 주제로 사진을 찍을 수 있는 날이 왔으면 좋겠네요.”

'저항군의 휴일', 영화 '로마의 휴일'의 포스터를 패러디했다.
'저항군의 휴일', 영화 '로마의 휴일'의 포스터를 패러디했다.ⓒ이제형 작가 제공

그의 레고 사진은 블로그(www.stormtrooper.kr), 페이스북(www.facebook.com/jehyung.lee.311), 인스타그램(www.instagram.com/lee_je_hyung)에서 더 많이 볼 수 있다.

김백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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