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보기
댓글보기
[만민보] 도화지 대신 ‘일회용 종이컵’에 그림을 그리는 이유는?
없음

"할 일 참 없으신가 봐요..."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오를 정도로 엉뚱한 일에 몰두한 사람을 좋아한다. 대개 별 이유는 없다. '왜 이런 일을 붙잡고 있느냐'고 물으면 "재밌어서요"라는 말만 돌아오기 마련이다.

수백 개의 '테이크아웃 커피컵'을 붙들고 있는 김수민(37) 씨에게도 같은 질문을 던지고 싶었다. 김수민 씨는 종이컵에 그림을 그리고, 그 그림을 사진이나 영상으로 남기는 작업을 하는 아티스트다. 일명 '종이컵 아티스트'라고 불린다.

종이컵 아티스트는 원래 존재하지 않았던 직업이다. 김수민 씨 말을 그대로 옮기자면 "갖다 붙이면 되는 거 아니냐"고 한다. 전문적으로 이 일을 '업'으로 삼고 있는 사람이 없어서 '종이컵 아티스트'란 용어를 본인이 만들어서 사용한다고 설명했다.

김수민 작가
김수민 작가ⓒ민중의소리

직장인과 커피는 뗄레야 뗄 수 없는 사이다. 아마 월급 중 절반쯤은 커피값으로 나가지 않을까. 이른 출근시간에 커피를 마시지 않고선 잠이 깨지 않는다는 아우성도 숱하게 들린다. 퇴근 시간 휴지통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도 대개는 테이크아웃 커피잔이다. 이쯤 되면 내가 일을 하는 건지, 커피가 일을 하는 건지 모를 정도다.

보통 많은 사람들은 커피를 사서, 마시고, 버린다. 김수민 씨는 그 테이크아웃 커피잔을 버리지 않고 책상 위에 차곡차곡 쌓아두고 그림을 그린다.

처음엔 특별히 수집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건 아니라고 한다. 단지 코앞에 있는 휴지통에 버리기 귀찮을 정도로 게을렀다고 고백한다. 이중섭 화가는 종이 살 돈이 없을 정도로 형편이 어려워 담뱃갑 은박지에 그림을 그렸다는데, 김수민 씨는 특유의 '귀차니즘'이 발동해 '종이컵 아트'가 탄생한 것이다.

"무슨 그림을 그리느냐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디에 그리냐는 것도 중요해요. 평평한 도화지가 아닌 다양한 사물에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했는데 그중 하나가 종이컵이었어요. 종이컵에 그림 그리는 게 특별히 더 재밌더라고요. 또 종이컵은 구겨지기도 쉽고, 버려지는 것도 쉽고, 많은 사람들이 하찮게 생각하잖아요. 종이컵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이 직장인 시절 제 모습과도 비슷하다고 생각해서 지금까지 열심히 종이컵에 그림을 그리는 것 같아요."

종이컵에 구겨 넣은 이 그림들은 SNS를 통해 알만한 사람은 아는 작품으로 자리매김했다. 이후 김수민 씨는 종로의 한 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열기도 하고, 종이컵 작품을 모은 책도 한 권 출간했다. 국내를 넘어 해외에서도 전시 요청이 끊이질 않는다고 한다. 종이컵에 그림을 그린지도 벌써 6년째. 문득 저 수많은 종이컵들은 대체 어디서 공수해 오는 것일지 의문이 들었다.

"보통 커피를 하루에 2~3잔씩 마시는데 그 컵을 챙겨와서 그리는 거에요. 저는 그림을 그리는 행위만 작업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커피를 마실 때부터가 작업의 시작이라고 주장해요. 커피를 마시면서 안 좋았던 생각들, 살면서 힘들었던 순간들에 대해 생각하면서 그림의 소재를 생각하거든요. 그림을 그릴 때부터 작업이 시작되는 게 아니라 커피를 마실 때부터 작업이 시작되는 셈이죠."

"너는 요새 한 게 있기는 하냐?(What the fuck have you done lately?)"
영화 대사 한마디에 덜컥 내던진 사표

김수민 작가의 종이컵 아트
김수민 작가의 종이컵 아트ⓒ김수민 저 '공감 한 컵 하실래요?' 중에서

김수민 씨의 그림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인물은 '넥타이를 맨' 직장인. 그런데 그림 속 넥타이 부대의 표정이 주로 어둡다. '통장'이 '텅장'이 되어버리는 월급날의 허망한 표정이라든지, 울상을 지으며 출근하는 표정, 떡이 되도록 술을 마신 회식 이후의 표정 등등이다. 이 때문에 '밝은 내용 좀 그리라'는 이야기도 듣는다. 그러나 김수민 씨는 "어쩌겠어요. 제가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이런 것들뿐인데"라고 응수한다. 김수민 씨는 넥타이 매는 걸 끔찍하게 싫어하면서도 넥타이를 맨 직장인을 그릴 때가 가장 재밌다고 한다.

"회사원 시절 쌓였던 다양한 감정이 종이컵에 그림을 그린 원동력이었어요. 카페인을 마시면서 해소하지 못했던 그 감정들이 종이컵에 그림을 새기면서 비로소 해결할 수 있게 되더라고요. 그림은 잘 그리는 기술도 중요하겠지만 결국은 내가 느꼈던 것을 잘 옮겨내는 것도 중요해요. 좋은 감정이든 안 좋은 감정이든 저에게 가장 강한 감정으로 남아있던 시절이 넥타이를 맨 시절이라 그림으로 그리는 것 같아요."

그토록 답답하다고 느꼈던 넥타이를 벗어 던지게 된 계기는 한 편의 영화였다. 일요일 저녁, 김수민 씨는 '원티드'란 액션 영화를 봤다. 스토리는 엉망이었다. 업무가 서투른 회사원이 남자주인공이었는데, 알고 보니 유능한 킬러의 아들이었다는 황당무계한 내용. 그런데 그 남자주인공이 마지막 장면에 관객을 바라보면서 하는 마지막 대사가 압권이었다.

"너는 요새 한 게 있기는 하냐?(What the fuck have you done lately?)"

당시 2년 차 직장인이었던 김수민 씨는 이 대사를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요즘 내가 한 게 뭐야'라는 생각에 다다르자 그 다음날인 월요일 아침, 김수민 씨는 바로 사표를 냈다.

"'내가 요즘 한 게 뭐가 있을까'라는 질문에 대답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할 것 같았어요. 그래서 바로 그 다음 날 아침에 사표를 내게 됐죠. 회사에 다닐 때는 '이걸 왜 해야 하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납득이 안가는 일이 많았는데 지금은 다 납득이 돼요. 아침 8시에 일어나서 작업실로 '출근'하고, 심야버스 타고 퇴근하고 집에 들어가면 새벽 3시 정도인데 딱히 힘들지는 않아요. 심지어 주말에도 자발적으로 '출근'해요. 내가 왜 이 일을 하고 있는지 스스로 납득이 되니까요."

김수민 씨의 끝나지 않는 도전

김수민 작가의 종이컵 아트
김수민 작가의 종이컵 아트ⓒ김수민 저 '공감 한 컵 하실래요?' 중에서

영화 한 편으로 넥타이가 주는 부담감을 떨쳐 낸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한 편의 도전기를 듣고 있는 듯했다. 그런데 이뿐만이 아니었다. 김수민 씨는 그림과는 전혀 관련 없는 내용으로 팟캐스트를 진행하고 있다. 그것도 무려 3편이나. 더욱이 전공은 신문방송학인데 장편영화 시나리오를 써서 공모전에 나간 경력도 있다.

김수민 작가의 남다른 기질은 초등학생 때부터 싹을 보였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자발적으로 친구들 2~3명과 모여 극단을 결성했다. 콧수염을 붙이고 분장을 하고 반 친구들에게 꽁트를 짜서 보여주기도 했다.

"원래 '이상한 짓'을 좀 많이 했어요. 회사를 그만두고 백수일 때는 동화책을 만드는 작가가 되고 싶어서 일본에 있는 출판사에 무작정 찾아간 적도 있었어요. 가진 돈 탈탈 털어서 일본으로 갔죠. 제가 고민을 별로 안 하고 일단 질러보자는 성격이라서 그런 것 같아요. 해보지 않고는 모르니까 일단은 뭐든 해보는 거죠."

인터뷰 말미, 앞으로의 목표를 묻자 돌아온 답변도 평범하지만은 않았다. 종이컵이 아닌 '제2의 도화지'를 찾아 나설 것이란 예상은 역시 보기 좋게 빗나갔다. 김수민 씨는 "요 몇 달 간 너무 바빴기 때문에 내 멋대로 하고 싶은 걸 해야겠다"는 대답을 내놨다.

"하고 싶은 게 많아요. 항상 뭐가 재밌을까 생각하거든요. 그런데 다른 사람이 재밌는 거 말고 제가 재미있게 할 수 있는 걸 찾아요. 지금 하고 있는 종이컵 아트도 열심히 해야겠지만 이제는 일로서 접근하게 될 때도 있거든요. 앞으로는 짬을 내서 '일'이 아닌 제멋대로 할 수 있는 작업을 하고 싶습니다."


남소연 기자

기자를 응원해주세요

기사 잘 보셨나요? 독자님의 작은 응원이 기자에게 큰 힘이 됩니다. 독자님의 후원금은 모두 기자에게 전달됩니다.

이시각 주요기사

카카오톡 카카오스토리 카카오스토리2
닫기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