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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민희의 미술이야기] 제주 4·3 미술제에 대하여

미술의 진정성 회복, 삶과 밀착된 미술, 민주적 화단 분위기의 창출과 비평적 미술풍토의 확립, 자기정체성을 갖는 지역미술의 위상과 역할 창출. 이상 다섯 개의 요약된 문장은 1994년에 작성된 탐라미술인협회(이하 탐미협)의 창립취지 내용이다. 탐미협 창립과 더불어 1회 4·3미술제가 개최되었는데, 당시 작품들을 통해 그들이 실현하고자 했던 가치가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다.

1987년 제주출생의 미술작가들로 구성된 ‘그림패 보롬코지’는 4·3미술제의 전신인 <사월 미술제>(1989)와 <4·3넋살림전>(1989)을 개최했다. 1984년, 1985년에는 <상황과 표현전>이 두 차례 개최되었는데, 김종길 미술평론가는 이들 역사를 제주도 민중미술의 태동으로 본다. 그리고 1990년 그림마당 민에서 개최된 <박경훈 목판화>와 1992년 강요배 작가의 전국투어 <제주민중항쟁사> 전시는 제주 외 지역에 미술로써 4·3 알리고, 환기하는 결정적 역할을 했다. 1987년 6월. 국민들은 거리로 쏟아져 나와 독재 권력에 항거했고 대통령 직선제라는 사회체제 변화를 만들어 냈다. 당시 민주화 사회를 만드는데 동참했던 예술인들은 87년 이후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이하 민예총)을 결성하고 전국조직의 기틀을 잡기 시작한다. 1994년 1회 4·3미술제가 개최되기까지 ‘그림패 보롬코지’의 활동, 강요배 작가의 귀향 그리고 민예총의 지역지부 활성화 등의 요소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4·3미술제는 1994년부터 지금까지 제주민예총이 주최하는 4·3문화예술축전과 함께 개최되고 있다.

리플릿 표지 스캔본.
리플릿 표지 스캔본.ⓒ자료제공 박경훈. 스캔 박민희.

당시부터 한결같이 4·3과 연계된 문화 예술 활동의 중심에 있는 박경훈 작가는 4·3미술은 “4·3을 주제, 소재로 하여 제작된 미술 작품”이고, 작품 창작과 전시회 개최로 4·3을 환기해 왔던 일련의 과정을 “4·3미술 운동”이라고 정의한다. 침묵을 강요받았던 역사적 진실을 폭로하고 4·3 진상규명과 희생자 명예회복운동에 복무하는 맥락에서 4·3미술제의 가치를 조명한 것이다. 1회부터 16회까지 4·3미술제의 연구와 평론을 도맡았던 故김현돈 미술평론가는 4·3미술을 “1948년부터 7년여에 걸쳐 이 땅 제주지역에서 벌어졌던 하나의 역사적 사건을 다양한 양식과 표현매체를 빌어 예술적으로 형상화한 미술”이라고 정의했다. 2008년 개최되었던 제15회 4·3미술제 기념 심포지움에서 발표된 내용이다.

2008년은 제주4·3평화기념관과 제주4·3평화재단이 설립된 해다. 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공포된 2000년(김대중 정권), 동법 시행령에 따라 정부는 위령공원을 건립할 부지를 매입했다. 정부(노무현 정권)의 공식 사과가 있었던 2003년 이후 4·3사건법 개정 등 건립 추진에 박차를 가한 결과 평화기념관과 평화재단이 설립된 것이다. 4·3이 발발한지 60년 만의 일이다. 4·3 진상규명과 희생자 명예회복운동의 구체적 결실을 맺은 시기라고 할 수 있다.

당시 정세 변화를 고려하며 15회 4·3미술제 기념 심포지움의 내용을 살펴보면 4·3미술제의 발전방향에 대한 고민을 엿볼 수 있다. 6회부터 15회까지 4·3미술제가 탐미협의 행사로 진행되는 것에 대한 문제의식이 공론화되고 이에 대한 토론이 있었다. 1994년 1회부터 1998년 5회까지 전시별 참여 작가 수는 평균 40명에 달하는데 1회 42명, 2회 36명, 3회 23명, 4회 32명, 5회 64명으로 매 회 규모 있는 단체전이었음을 알 수 있다. 당시에는 탐미협 외 제주작가들도 대거 참여했다. 이후 1999년 6회부터 2013년 20회까지 탐미협이 주최, 주관하는 형태로 전환된다. 이 시기의 참여작가는 탐미협 회원만으로 구성되며 20명 내의 규모로 축소된다. 6회 <4·3과 미국-보이지 않는 손 보는 눈>, 7회 <역사가 서린 땅>, 8회 <한라와 무등-역사의 맥脈>, 9회 , 10회 <진실의 횃불 밝혀 평화의 바다로>의 전시 제목에서 볼 수 있듯이 주제의식을 강화하기 위한 방도였다. 특히 6회 <4·3과 미국-보이지 않는 손 보는 눈>은 탐미협 작가 11명이 공동으로 연구하고 창작한 하나의 작품으로 봐도 무방한 전시다. 전시도록 또한 창작보고서로 제작되었다. 이 같은 시도는 시각예술 창작에서 보기 드문 사례다. 2011년 18회 4·3미술제 <산전제-초심으로 돌아가기>는 전시 없이 제(祭)만으로 치러졌다. 탐미협의 4·3유적지 순례 이력을 살펴보면 제주시 조천읍에 위치한 이덕구 산전 방문횟수가 상대적으로 많은 것을 알 수 있는데, 18회 당시 1회, 13회 등에 방문했던 이덕구 산전에서 굿을 하고 ‘초심으로 돌아가기’라는 제목을 붙인 이유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다.

18회 4·3미술제  현장, 제주시 조천읍(2011)
18회 4·3미술제 현장, 제주시 조천읍(2011)ⓒ사진제공 탐미협

물음표를 쫓아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니 4·3미술제의 확장성과 관련한 담론은 2008년 이전부터 존재했다. 故김현돈 미술평론가는 12회 4·3미술제 <동행> 평론 말미에 “이제 4·3미술은 평화·인권이라는 보다 확장된 주제 의식을 가져야 할 것이다. 보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지역의 미술 역량을 결집하고, 우리와 전후 역사적 체험을 공유하고 있는 동아시아 여러 나라의 미술인들과 연대하여 ‘동아시아 평화미술제(가칭)’을 기획해보는 것도 미래의 한 의미 있는 대안이 될 것이다.”라고 썼다. 2005년 제주도가 세계평화의 섬으로 지정된 것 또한 염두 했으리라. 이는 김종길 미술평론가가 예술감독으로 활약한 21회 4·3미술제 <오키나와 타이완 제주 사이-제주의 바다는 갑오년이다!>에 이르러 구현된다. 21회 4·3미술제는 예술감독제 도입과 함께 탐미협 외에도 제주미술협회, 한라미술인협회 등 제주 출신뿐만 아니라 국내외로 참여작가의 폭을 과감하게 확장시킨 첫 연대 기획 전시로서 4·3미술제의 새로운 전기를 열었다. 21회 4·3미술제가 개최된 2014년, ‘4월 3일’이 국가추념일로 지정되면서 4·3미술제에 대한 제주도 차원의 재정지원이 생겨난 것도 새로운 도약을 가능하게 한 중요한 이유 중 하나다.

22회 4·3미술제  개막식 후 전시된 작품을 설명하고 있는 김종길 미술평론가, 제주도립미술관
22회 4·3미술제 개막식 후 전시된 작품을 설명하고 있는 김종길 미술평론가, 제주도립미술관ⓒ사진제공 탐미협

1회부터 5회까지 4·3미술제에 평론으로 적극 참여하고 최근 23회 예술감독을 맡았던 김유정 미술평론가는 4회 4·3미술제 <자연·사람·역사> 평론에서 “지금까지의 4·3미술제는 하나의 제의(祭儀)였다. 원혼을 달래기 위한 엄숙한 위령제였다. 그것은 비장, 숭고, 장엄의 미적 정서를 유족과 시민들에게 생생하게 전달해주었다. 4·3미술제를 굿으로 보면 원혼을 위해 저승길을 닦는 4·3내력굿이었다.”고 말한다. 故김현돈, 김종길 미술평론가 또한 4·3미술제를 제사(祭)로, 참여작가를 샤먼으로 비유한다. 죽은 사람의 넋을 달래는 예술적 행위를 통해 산 사람을 위로했던 우리의 민중문화를 전시장으로 불러온 것이다.

김종길 미술평론가는 15회 4·3미술제 기념 심포지움에서 “기억투쟁의 4·3미술”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가 주목하는 기억투쟁의 특징 첫 번째는 ‘살림의 복권’이다. 이는 앞서 이야기한 억울한 영혼을 미술 언어로 씻김굿 하는 것과 상통한다. 두 번째는 ‘산 역사의 생명운동’인데 그 주요 내용은 미술제에 참여하는 주체들이 미술제를 통해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역사와 만남으로서 진정한 자기회복, 스스로의 해방에 다가가게 된다는 것이다. ‘역사’를 알아간다는 것은 ‘나’를 찾아가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특히 4·3미술제와 함께 진행되어 온 4·3유적지 순례 워크숍은 현장의 기운으로 오감을 깨우고 미학적 실천의 동력을 만드는 중요한 매개다.

2013년, 20회 4·3미술제 <굉轟, 여러 개의 시선들> 서문에는 “20회를 맞는 4·3미술제는 이번 전시를 끝으로 ‘굉轟의 시대’를 마감하려 한다.”고 쓰였다. 올 해에도 어김없이 4월 제주에서 4·3미술제가 개최된다. 21회 이후 연대 기획 전시로 개최되고 있는 4·3미술제가 맞이한 새로운 시대, 4·3미술제의 새로운 역사는 온전히 지금 참여하는 이들의 몫이다.

우리는 서양미술사에 익숙하지만 한국미술사는 생소하다. “해방만 있고 분단이 없었다면 4·3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김종길)”과 마찬가지로 해방 이후 역사 청산이 제대로 되었다면 한국미술사는 매우 달라졌을 것이다. 표현의 자유가 없었던 독재정권 암흑기에 이 땅의 미술은 ‘민중미술’로 다시 피어났다. 한국미술, 한국적인 것은 다름 아닌 우리, 나 자신에 대한 표현이 아니겠는가. 자신이 속한 사회와 무관하게 존재하는 “난 나야”는 관념이고 허구다. 지금 이 순간에도 시대를 통찰하며 미술의 진정성 회복을 탐구하는 현장의 작가들과 그 가치를 기록함으로서 한국미술사를 만들어가고 있는 연구자, 미술평론가들에게 감사와 존경을 보낸다.

박민희 | 관객 art_thinker@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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