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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당신의 기억은 안녕하십니까, 연극 ‘양배추의 유례’
연극 ‘양배추의 유례’
연극 ‘양배추의 유례’ⓒ극단 신기루만화경

모든 인간은 기억을 가지고 있다. 사적인 기억부터 역사적인 기억까지 다양하다. 하지만 모든 기억들이 인간의 뇌에 저장되는 것은 아니다. 심지어 기억은 최초의 기억대로 저장되지 않는다. 세월에 따라서 일그러지고 변형되기도 하고 수정되기도 한다. 기억은 어떤 사건이나 사실을 확인시켜주는 완벽한 장치이지만 다른 한편으론 믿을 수 없는 허상에 불과한 것이다. 연극 ‘양배추의 유례’는 이러한 기억의 성질을 상상력 넘치는 무대 언어로 그려내고 있다.

작품은 시작부터 독특한 캐릭터들을 등장시킨다. 양배추를 양손에 들고 있는 중년의 남성은 기억이 없다. 언제 태어났는지 자신이 누구인지 전혀 모른다. 그의 기억은 모두 그가 들고 있는 양배추 속에 들어 있다. 그때 남자에게 한 여자가 다가온다. 이 여자는 남자에게 자신이 아내임을 알려준다. 그리고 이 여자는 머릿속에 벌레가 있어서 기억이 자꾸 없어지고 있다고 하소연을 한다. 이 밖에도 남자와 여자의 딸과 아들로 추정되는 천덕꾸러기들이 등장하고, 그 천덕꾸러기를 가르치는 선생님, 그리고 신적인 존재가 등장한다.

캐릭터들은 상연시간 내내 무대를 종횡무진 한다. 여기서 특별한 것이 있다면 우리가 꿈을 꿀 때 꿈속에서 특정 장면을 보듯이, 주인공들의 말과 행동은 단절됐고 툭툭 끊어져 보이며 불친절하고 때론 이해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이처럼 모든 대화와 상황은 유기적이지 않다. 이 연극은 서사적인 흐름에 따라서 줄거리를 설명해 주는 친절한 안내자가 되길 거부하고 있다.

친절함을 포기한 이 연극은 대신 그 어떤 연극들보다 매우 영리하게 ‘기억’이라는 개념을 표현해 내고 있다. 추상적인 개념인 기억을 아주 구체적인 무대 언어로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무의식인 듯 의식인 듯한 말들, 꿈속 같은 환영, 파편화 된 기억들을 통해서다. ‘추상적인 개념을 추상의 산물로 그려 낸다’고 노파심을 가질 필요가 없다. 이 연극은 그러한 아이러니를 통쾌하게 뒤집고 거대한 기억의 실체를 무대 위에 그려낸다.

기억의 정체와 본질을 알게 된다는 것은 마냥 기쁜 일 만은 아니다. 그래도 이 연극은 보여주기를 자처한다. 아주 입체적으로 보여준다. 우리가 순도 100%라고 자처했던 최초의 기억은 지금 이 순간이 지나가 버리면 최초의 기억이 아니며 변질된 기억에 불과하다. 결국 어제의 기억과 오늘의 기억은 같을 수 없으며 달라진 기억을 품은 우리 역시 어제와 같은 우리가 아니다. 결국 주인공의 말처럼 “진짜를 기억하고 싶다”는 바람은 당초 불가능한 소원에 불과하다. 진짜 기억은 ‘지금, 바로 여기’에서 우리가 보고 느낀 것뿐이다. 주인공 남자가 자신의 기억이 담긴 양배추를 씹어 먹으면 당신에 대한 기억이 날지도 모른다고 말하자 여자가 이렇게 말한다. “알아서 뭐해. 난 이제 옛날의 나랑 달라졌어.”

연극 ‘양배추의 유례’
연극 ‘양배추의 유례’ⓒ극단 신기루만화경

이 연극은 기억이 가지고 있는 본질과 허무에 대해서 끊임없이 말해주면서 동시에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현명하게 기억해야 하는지도 각성하게 만든다. 우리는 중요한 기억을 어떻게 저장하고 있는지, 그 기억은 잘 보존되고 있는지, 최초의 기억이 불가능하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고민하게 만든다.

사실 이 지점은 동시대 현대인들에게 매우 중요한 문제다. 한국 사회에서는 절대 잊어서는 안 될 문제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했기 때문이다. 세월호 참사가 있었고 국정농단이 있었으며 정권교체가 있었다. 불과 몇 년 전에 발생한 기억들을 우리는 어떻게 보유하고 있을까. 기억은 어떻게 바뀌었을까. 바뀌게 내버려도 되는 것일까. 이 기억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여 생명력을 불어 넣을 것인가. 건강한 기억은 건강한 미래의 단초가 되기 때문이다.

겨우 두 글자인 ‘기억’이라는 소재만으로 ‘기억’에 대한 온갖 생각을 하게 만드는 작품이다. 묵직한 주제 같지만 시종일관 웃음도 끊이지 않는 연극이다. 일본 작가 마에다 시로와 한국 연출가 윤혜진의 아주 유쾌한 콜라보다. 작품은 오는 6월 25일까지 선돌극장에서 볼 수 있다. 정재성, 최재섭, 오민정, 이선희, 박경구, 손재익, 김윤지 등이 출연한다.

연극 ‘양배추의 유례’
연극 ‘양배추의 유례’ⓒ극단 신기루만화경

김세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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