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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진호전투와 한국전쟁, 중국은 어떻게 볼까?

문재인 대통령의 ‘장진호 전투 기념비 연설’이 화제였다. 참전 미군과 유가족이 위안을 받았다며 흥분하는 이유가 있다. 왜냐면 장진호 전투는 꽤 오랫동안 미군도, 할리우드도, 참전 당사자조차 말하고 싶지 않은 전투였기 때문이다. 미국 정예해병 1사단 7천여 명이 전사한 장진호 전투를 두고 타임지는 “미군이 이전에 경험해 보지 못한 패배”라고 썼고 뉴스위크도 “진주만 공습 이래 가장 참혹한 패배”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패전과 승전에 대한 오만가지 전술평가보다 때론 살아있는 스토리, 휴머니즘의 실재實在가 더 위력적인 법이다.

“흥남부두 매러디스 빅토리호에 올랐던 젊은 부부가 남쪽으로 내려가 새 삶을 찾고, 그 아이가 대한민국 대통령이 돼 이곳에 왔다.”

대한민국 대통령이 장진호 전투와 ‘크리스마스의 기적’, 흥남철수로 자신이 존재할 수 있었다고 말함으로써 장진호 전투를 한국전쟁의 가장 위대한 장면으로 각인시켰다.

장진호의 미군
장진호의 미군ⓒ바이두

후방이 없는데 무슨 후퇴요? 우린 전진 또 전진하고 있소

전략가들은 대체로 미군의 장진호 진격전투는 패배했지만 15일간의 철수 행군은 기적적인 승리라고 본다. 중공과 싸웠던 서부전선 운산 전투와 동부전선 장진호 전투는 양상이 달랐다. 1950년 11월 1일, 파죽지세로 올라가던 서부전선 미8군이 처음으로 중공군과 교전했다. 운산에서 미 기병 1사단 1만 5천여 명이 하루 동안 전멸했고 미8군은 순차적으로 포위되었다. 크리스마스 땐 샴페인을 터트릴 것이라며 쾌속진군을 재촉했던 맥아더는 중공군 참전 보고를 받고도 ‘진격 앞으로’를 명했다. 10일 전 이미 중공 26만 정예 병력이 압록강을 넘어 북한 동부로 기동하고 있었다. 맥아더는 압록강이 얼기 전 이북 전역을 점령하라는 ‘크리스마스 공세’ 방침을 유지했다. 장진호의 참상은 맥아더의 명령에 의한 것이었다.

동해 전선을 따라 개마고원까지 진출했던 미 10군 해병 1사단은 중공군의 2차 공세로 지옥을 맛보아야만 했다. 영하 40도를 넘나드는 혹한의 바람에 살점이 소총에 눌어붙었고 야포는 발사되지 않았다. 졸던 동료를 깨우면 딱딱한 주검으로 변해 있곤 했다. 얼어붙은 땅은 진지공사는커녕 전사자를 위한 삽질 한 뼘을 허용하지 않았다. 적이 어디에 있는지도 가늠하지 못했다. 사방팔방은 물론 남쪽 도주로까지 중공군이 없는 곳은 없었다. 하얀 설산으로만 보였던 골짜기에서 나팔 소리가 울리면 수만의 중공군이 땅에서 일어났다. 해병 1사단의 1만 2천 중 7천여 명이 사망했는데 이 중 절반은 ‘비전투 손실’, 즉 얼어 죽었다. 미 해병 1사단은 보름 동안의 악전고투 끝에 포위망을 돌파하고 함흥에 도착했다. 초인적인 정신력으로 중공군을 끌고 다녀 10군단의 궤멸을 막을 수 있었다.

전사戰史 연구자들은 해병 1사단이 생환할 수 있었던 원인을 ‘명령 불복’에서 찾는다. 당시 맥아더는 진군속도를 높이기 위해 서부전선을 8군단에, 동부전선을 10군단에 맡겨 경쟁을 유도했다. 8군단장 워커와 경쟁하고 있던 10군단장 알몬드는 예하 부대에 끊임없이 진격속도를 더 내라고 다그쳤으나, 해병 1사단장 스미스는 노골적으로 엉뚱한 작업만 했다. 진군 길목마다 병참기지와 통신소, 비행장까지 건설하며 올라갔다. 알몬드 입장에선 환장할 노릇이었다. 미 해병이 한국 육군 보다 뒤처지다니, 결국 해병 1사단은 개마고원에 가장 늦게 도착했다. 그리고 중공군의 공세가 시작되었을 때 서부전선 8군단이 포위 궤멸당한 것에 반해 그나마 퇴각전투라도 할 수 있었다. 올라가며 구축한 병참라인과 활주로 덕택에 공중지원과 보급품을 받을 수 있었다. 이런 사례는 많았다. 영하 40도의 칼바람 부는 새벽에 병사들을 깨워 1m의 참호를 파라고 명령한 지휘관은 병사들로부터 ‘또라이 고문관’이라고 욕먹었지만, 다음 날 중공군의 공세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장진호의 동사
장진호의 동사ⓒ위키피디아

장진호 패전 후 처참한 후퇴에 대해 기자들이 집요하게 묻자 알몬드가 이렇게 말해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후퇴는 후방이 있을 때 쓰는 말입니다. 우린 전진 또 전진하고 있습니다.”
어느 나라 군대든 사무실에서 명령하는 자가 기세도 좋고 열정도 드높은 법이다.

참전 앞두고 긴장한 중공지휘부, “미군에게 쫓기면 다시 산골짜기로 들어가 싸우면 된다.”

신중국 건국이 1948년 10월 1일이다. 1년 후 건국 1주년 행사를 마친 마오쩌둥(이하 마오)에게 북한의 부수상 겸 외무상이었던 박헌영이 김일성의 친서를 들고 왔다. ‘낙동강 전선까지 진출했던 전방 병력은 고립되었고, 미군의 진격을 막일 힘이 없으니 참전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중공 정치국 회의에선 대부분이 출병 불가를 주장했다. 내전 복구가 한창이고 토지개혁은 시작도 못 했다는 내부적인 이유도 있지만 초강대국 미국을 상대해야 하는 부담이 더 컸다.

장비 수준은 비교할 것도 못되고 제공, 제해권이 모두 미국에 있는 상황에서 승리한다는 보장이 없었다. 군벌들을 묶었던 장제스 군대와 미군은 비교할 수 없었다. 마오와 함께 참전을 주장했던 펑더화이(彭德懷, 팽덕회)마저 “강철생산량이 우린 65만 톤인데, 미국은 9천 8백만 톤으로 우리의 150배고 미 1군마다 야포가 1천 500문인데 반해 우린 겨우 36문”이라며 역량의 열세를 인정할 정도였다. 상황이 얼마나 심각했냐면 스탈린은 마오에게 “비행기도 지원할 수 없으니 참전 말고 중국 동북지역에 김일성 망명정부를 수립하라.”고 권할 정도였다.

압록강 넘는 중공군
압록강 넘는 중공군ⓒ바이두

그러나 마오의 관점은 달랐다. 중국 접경까지 미군이 들어오면 인민해방군 주력을 서북으로 배치해야 했고, 미국은 대만의 장제스를 도와 대륙탈환 내전을 부축일 것이라고 보았다. 만주에 전력을 공급하고 있던 수풍 발전소가 넘어가는 것도 문제였다. 마오가 설득했다. “미국과는 어차피 한 번 붙어야 한다. 이왕 붙을 거 지금 미리 붙는 게 좋다.” 마오는 사회주의 형제국에 대한 ‘공산당의 국제주의 의무’을 강조했다. 1946년에 동북 인민해방군이 국민당 군에 쫓겨 다 죽게 생겼을 때였다. 밥은 물론 방한복도 의약품도 없이 고전하던 인민해방군은 총알까지 떨어진 채로 고립되었다. 부상자 천지였던 동북 인민해방군을 살린 나라가 북한이었다. 북한은 이때 해상을 통해 부상자를 후송해 1만 8천 명을 치료했고 2만여 톤의 식량과 무기, 연료를 공급했다. 대동강과 진남포, 신의주, 황포, 나진에선 북한의 화교와 인민이 동원되어 연일 밤낮없이 횃불이 켜고 물자를 날랐다. 워낙 은밀했던 후방지원이라 중국인은 잘 몰라도 공산당 중앙에서 모르는 간부는 없었다. 중공의 참전을 당연한 것처럼 요구하는 김일성의 배짱엔 이런 배경도 있었다.

지원군 총사령관 펑더화이가 결심을 밝혔다.
“만일 (미군과 싸워 져서) 미군이 중국으로 온다면 다시 산골짜기로 들어가 전투하면 몇 년 지나면 다시 승리할 수 있다. 이것도 대단한 거다.” 중공 지휘부가 참전을 앞두고 얼마나 긴장했는지를 알 수 있다. 마오 역시 출병을 앞둔 펑더화이에게 “내가 보기에 첫 전투는 우선 미국을 두려워하는 ‘콩메이빙(공미병 恐美病:미국을 두려워하는 병)을 날려버리는 것이다.”라며 정신력을 강조했다.

10월 19일 밤, 동북 최정예 인민해방군 13병단이 이슬비 속에 압록강을 넘었다. 이틀 후 김일성을 만난 펑더화이는 중국의 전략방침을 설명했다.
“세 종류의 가능성이 있다. 첫째, 근거지를 확보해 적을 섬멸하면서 조선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는 것(북한 영토 회복) 둘째, 근거지를 확보해 쌍방이 대치상태를 유지하는 것 (평양, 원산 이북 어느 지점), 셋째, 근거지를 확보하지 못해 본국으로 돌아가는 것, 우린 첫째 목표를 쟁취하려 한다.”

이 자리에서 펑더화이는 조선인민군 잔여 병력이 3개 사단에 불과하다는 김일성의 한숨소리를 들었다. 이처럼 중공의 1차 목표는 교두보 확보와 평양탈환이었다. 장진호 전투로 미 해병 1사단 병력의 절반이 생환할 수 있었다는 평가는 미국의 관점이고, 중공은 그들을 평양 이남으로 후퇴시킬 수 있느냐가 초미의 관심이었다.

운산전투에서 포로가 된 미군
운산전투에서 포로가 된 미군ⓒ바이두

“싸우다 밤이 깊어 비로소 상대가 미군인 것을 알았다.”

1차 공세를 시작한 중공군은 약체라는 한국군 1사단을 첫 제물로 노렸다. 11월 1일 중공군 116사단은 운산을 포위, 오후 5시에 일제 공격했다. 밤이 깊어 전투가 한창일 때 픽픽 쓰러지고 있는 병사들이 미군인 것을 처음 알았다. 중공군의 포위가 얼마나 조밀했던지 미 폭격기와 탱크가 압도적인 화력으로 공격했으나 돌파하지 못했다. 탱크 28대, 화포 119문을 파괴하거나 노획했다. 포로 2천 명을 사로잡았는데 이중 미군이 1천 8백 명이었다. 비행기 4대를 때려잡고 3대는 노획했다. 총으로 비행기 잡는 전술은 이후 베트남전에서도 사용되었다. 첫 조우에서 승리한 펑더화이가 사자후를 토했다.

“이 전투는 인민해방군의 자랑스러운 전통, 근접전과 야간전투의 승리다. 조지 워싱턴이 만들었다는 불패의 군대 기병 제1사단을 섬멸했다. 처음에 걱정이 많았지만 미국 군대는 뭐, 대단한 게 아니다.”

<2편으로 이어집니다.>
➁ 인해전술 人海戰術의 비밀, 홍군의 운동전 運動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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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영재 이산아카데미 기획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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