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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노조기] 우리는 ‘소모품’이었다

병원에서 치료사로 근무 중인 20·30대 청년노동자들이 점점 후퇴하는 노동조건, 소모품처럼 갈아치워지는 현실을 바꾸기 위해 2015년 4월3일 노동조합을 설립했습니다 .

노동조합의 활동은 매우 어렵고 힘든 일이였습니다. 근무환경의 변화를 가져왔던 승리의 기억도 있지만, 동시에 병원의 횡포와 동료들간 이간질을 하는 관리자, 이에 동조하는 동료들을 봐야 했고, 조합원이라는 이유로 받은 각종 징계, 경찰 조사, 소송, 차별적 업무배분, 감시는 일상이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노동조합을 하는 이유는 지금 바꾸지 않으면 치료사들의 삶은 어디서든 반복되기 때문입니다. 노조가 있던 전으로 돌아갈 수도 없습니다. 지금은 적어도 우리의 요구를 말할 수 있고, 아니라고도 할 수 있고, 혼자가 아닌 우리이기에 넘어져도 다시 손잡고 일어설 수 있다는 믿음이 있습니다.

앞으로 민중의소리를 통해 저희의 노조 활동기를 연재하려고 합니다. 저희 조합원들이 번갈아가며 글을 쓸 예정입니다. 경쟁과 개인의 성장을 강조하는 사회에 살고있는 저희가 노조를 통해 “우리”를 배우는 모습을 글을 통해 공유하고 싶습니다. -서울에 있는 K요양병원 노조 조합원들-

물리치료사들이 환자를 치료하고 있다.
물리치료사들이 환자를 치료하고 있다.ⓒ민중의소리 자료사진

평범하게 살아왔다. 단군이래 최대스펙으로 청년들의 취업난에 허덕이기 바로 이전에 취직을 했다. 취업난은 '졸업하면 무조건 취직이다'라고 광고했던 물리치료사학과 학생들에게도 닥쳤지만, 난 운이 좋았다.

추울 때 따시고 더울 때 시원한 병원에서 전문직이라는 명패로 아직 취직준비를 하는 친구들에게 부러운 시선을 받으며 지내왔다. 여느 20대들과 마찬가지로 일년 내내 다이어트로 고군분투했고, 주말엔 친구들과 맛집탐방을 하곤 쇼핑을 즐기곤 했는데 그 순간만큼은 일하는 내내 힘들고 마치 소모품처럼 쓰이는 생활을 잊을 수 있었다.

우연한 기회에 노동법을 알게 되었고, 너무 억울하고 답답해서 나와 비슷하게, 평범하게 살아온 동료들과 함께 2015년 노동조합을 만들었다 지난 2년간 하루에 하나씩 사건사고가 터졌다. 아, 이런일들도 생기는 구나, 놀라 도망갈줄 알았는데, 놀란만큼 흔들리면서도 자리를 지키고, 울면서도 다시 일어나 손잡고 걸어온 3년의 이야기들을 하려고 하는데, 말주변이 없어 전달이 잘 될런지 모르겠다,

퇴사가 잦았던 직장

2014년 그때 당시 8년차 물리치료사로 병원에서 근무중이었다. 병원은 뇌졸중, 척수손상환자, 뇌손상 환자들을 전문으로 치료하는 몇 안 되는 200병상 규모의 재활전문병원이었다 .

재활이 전문이라 1:1로 환자를 치료하는데 환자가 일상으로 돌아가 걷고, 먹고, 옷을 입고 다시 일할 수 있도록 장애를 가진 몸을 치료하는 작업치료사, 물리치료사 80여명이 근무했다. 매우 큰 규모여서 지역뿐 아니라, 지방에서도 치료를 잘한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올 정도였다. 일하는 치료사들 모두 병원의 이름에 자부심을 가지고 일을 했었다.

직원들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병원은 점점 커졌지만 재활치료부의 직원들은 헌신짝 취급을 받았다. 매년 신입직원이 상반기 하반기를 나누어 입사를 해야 할 정도로 많은 인원을 채용했는데, 병원이 커지는 이유도 있었지만, 퇴사가 많았다. 평균 근속년수가 3년이다 라는 말은 공공연히 쓰였다.

적은 임금을 받은 저연차들에게는 연애금지령을, 상대적으로 많은 임금을 받는 고연차들에게는 “결혼안하냐? 다른데서 스카웃 안들어오냐?”, “우리 너무 오래보지않았냐”라며 퇴사를 자연스럽게 거론했다. 10년 이상 근무하는 여자 직원들은 찾아 볼 수 없었는데, 다들 결혼과 출산후 자연스럽게 그만두곤 했다. 여자 직원뿐만이 아니였다. 남자 직원들도 결혼과 동시에 나가거나, '지금의 자리에서 미래를 볼 수 없다'며 퇴사를 했다. 퇴사한 직원들은 공무원시험을 준비한다고 했고, 보험을 팔거나 식당을 열었다. 낮은 임금과 고강도일을 버틸 수 없었던 이유가 가장 컸는데, 병원은 힘 쓰지 않고 환경을 만들어 놓는 것으로 고연차들을 저연차들로 갈아치우는데 성공했다. 우리는 소모품처럼 갈아 끼워졌다.

모두 실력있는 치료사들이었고, 누구보다 치료사의 일에 자부심이 있었는데 5년을 넘기지 못하고 나갔다. 왜 실력있는 치료사들이 아무 상관없는 다른 일을 해야 하지? 치료사 일을 하고 싶었지만 전공과 상관없는 일을 하겠다며, 맨땅에 헤딩을 해야 했던 이유, 사실 궁금하지 않았다, 너무 자연스러웠기 때문에.

나조차도 5년정도만 더 일하고 고향에 갈 생각이였다. 5년 이상 이 힘든 일을 지속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단시간에 노동강도는 너무 강했다. 아프지 않고 일하기위해서는 퇴사를 해야 했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라라는 말처럼, 언제든 절을 떠날 수 있다고 생각하던 나는, 내가 만들어온 내 직장을 스스로 바꾸어서 평생 직장으로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가질 때까지 오랜시간이 걸려야 했다 .

말 잘듣고, 시키는 일은 다 하는 것이 사회생활이라 생각했다. 밤늦게 걸려온 상사의 전화에 나간 술자리에서 여성의 성기 이야기가 나오고 나서야 지금까지 나에게 일어난 일이 성희롱이라는 것을 알았는데, 그 전까진 밤늦은 술자리제안을 사회생활이라고 생각했다. 이정도가 나의 수준이였는데 오죽하랴.

헌데 이런 나에게 기회가 왔다.

환자를 돌보고 있는 작업치료사
환자를 돌보고 있는 작업치료사ⓒ민중의소리 자료사진


우리의 고통, 우리 잘못이 아니었다

말 잘 듣고 시키는 일을 다 했던 나의 사회 생활 결과로 팀장이라는 직함이 주어졌고, 80명 중 15~20명 정도의 팀을 운영했다. 병원이 점점 확장하는 게 눈에 보이는데, 우리 치료사들은 더 허리를 졸라 매야했고 불합리하고 한참 후퇴하는 노동조건에 동의 되지 않아도 팀원들을 설득해야 했다 .

병원은 어렵다고 하는데 얼만큼 어려운지, 눈으로 확인한 적은 한번도 없었다. 재활치료부 관리부장은 팀장들에게 병원이 어렵다는 이유로 각팀마다 한명씩 권고사직자 명단까지 제출해야 했다.
명단을 제출하지 않는 다는 이유로 팀장의 자격이 없다는 식으로 몰아세웠지만, 끝까지 제출하지않았다.

권고사직자 명단 제출말고 다른 방법이 있다, 회사 사정을 직원들에게 알리고, 직원들을 설득하여 임금동결 등 다른 방안을 제시하고 내년에 성과대로 돈을 지급한다라는 대안까지 제출했다. 그러자 재활치료부 관리부장과 실장은 병원의 수익부분을 공개할 생각이 없고, 다른 방법이 있는 것은 알고있으나 권고사직자 명단을 제출하는 것이 빠르다고 했다. 먹고 사는 문제가 이리 쉬이 오르락 내리락 하는 사실이 비참했다.

그러던 중 퇴근길에 플랜카드를 봤다. ‘일하는 직장인들이 꼭 알아야 할 노동법강좌’. 왠지는 몰랐지만, 끌려서 갔다

“연차자율성이 법적으로 보장되는거면 15개모두 연결해서 써도 되는 거예요? 퇴근 이후 업무시에는 수당을 줘야하나는 거죠? 이 계산대로라면 우리 1년차는 최저임금법 위반인데 이거 진짠가요?”라고 되물었다.너무 당연한 것인데도, 살다살다 처음 듣는 내 권리이야기에 믿기지 않아 연거푸 질문을 던졌다. 사실을 확인하고 싶었다.

한참을 흥분 상태로 질문을 하다가 흥분이 가라앉고나서는, 너무 억울해서 눈물이 나는 걸 참아야 했다. “조금만더 일찍 알았더라면 이렇게 당하지 않았을텐데. ”

빨리 이 내용을 병원에 동료들에게 알리고 싶었다.

이때 노동법강좌를 듣지 않았다면, 내가 만들어온 내 직장을 스스로 바꾸어서 평생직장으로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조차 못했을 것이다. 나에게는 인생이 뒤집히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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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희선 물리치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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