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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와 헌신? 혁명은 그렇게 고상하고 달달한 게 아니다!”


➀ “정의와 헌신? 혁명은 그렇게 고상하고 달달한 것이 아니다!”
➁ 중국인보다 먼저 총을 들었던 조선인 혁명가들

시진핑 국가주석, 중공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이 사열을 받고 있다. 이번 열병식은 건국일에 했던 국가적 의례라는 개념을 넘어 실전형 열병식이었다. 네이멍구의 사막기지에서 진행된 열병식에선  시 주석 홀로 최고통수권자로서의 위엄을 나타냈다.
시진핑 국가주석, 중공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이 사열을 받고 있다. 이번 열병식은 건국일에 했던 국가적 의례라는 개념을 넘어 실전형 열병식이었다. 네이멍구의 사막기지에서 진행된 열병식에선 시 주석 홀로 최고통수권자로서의 위엄을 나타냈다.ⓒ차이나뉴스

중국이 건군 90주년을 맞아 최초의 단독 열병식을 했다. 네이멍구(內蒙古)의 주르허 사막기지에서 시진핑 주석이 군복을 입고 사열을 받았다. 네이멍구 주르허엔 중국의 우주센터 발사장과 아시아 최대 군사훈련장이 있다. 중국굴기의 핵심 중 하나인 '강군몽 强軍夢'의 상징 거점이다. 내몽고는 유라시아 진출의 교두보라는 점에서 이 지역의 열병식은 중국의 일대일로 사업과 군 현대화 사업이 결코 다르지 않다는 점을 시사한다.


3개의 깃발이 등장했다. 낫과 마치 문양의 당기(黨旗)가 국기인 오성홍기(五星紅旗)보다 먼저 등장했고, 이어 인민해방군기가 등장했다. 시 주석은 두 개의 강력한 메시지를 던졌다.
“영웅적인 인민군대는 항미원조(抗美援朝) 전쟁에서 승리해 나라의 위상과 군의 위엄을 떨쳤다.”
"우리의 원칙은 당이 총을 지배하게 하는 것이니, 결코 총이 당을 지도하게 할 수 없다"

열병식 기수단 등장 순서가 당기, 국기, 군기였다. 하지만 이후 사열에선 군기가 앞으로 오기도 하는 등 순서는 자주 바뀌었다.
열병식 기수단 등장 순서가 당기, 국기, 군기였다. 하지만 이후 사열에선 군기가 앞으로 오기도 하는 등 순서는 자주 바뀌었다.ⓒ신화통신


한국전에서 미국과 붙어 이겼다는 말을 강조한 이유가 있다. 중국이 UN의 대북제재에 동참할 순 있어도 역내에서 미국의 군사행동만은 좌시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한미상호방위조약처럼 ‘중조우호협력 상호원조조약’은 아직은 살아있다. 조, 중 어느 한 나라가 침략을 받으면 ‘전 국력’을 동원해 참전할 것을 의무화하고 있다. 오히려 한미동맹보다 한 단계 높은 수준의 혈맹조약이다. 얼마 전 당 기관지 런민르바오(인민일보)의 자매지인 환구시보가 "북의 선제공격으로 한국전이 발발하면 중립을 지킬 것이고, 미국이 먼저 군사행동을 한다면 가만있지 않겠다!"고 밝힌 것이 중국의 정확한 속내 아닐까?


‘당이 총을 지배한다’는 말은 사회주의 국가에선 당연한 말일 수 있지만, 중국 ‘선당노선 先黨路線’의 역사는 좀 복잡하다. 참고로 북한의 경우 조선인민군(1932)이 조선노동당(1945)보다 먼저 창설되었지만, 중국은 그 반대다. 장정이나 내전 때에도 군에 대한 당의 통제를 유지했다. 심지어 마오는 편애하던 동북왕 가오강 (高崗, 고강)이 ‘선군론 先君論’을 제기하자 한칼에 날려버렸다. 명실상부한 당 서열 2위에서 반당분자로 전락한 가오강은 결국 자살했다.

“혁명은 글을 짓는 것도, 그림을 그리는 것도 아니다”

중국 인민해방군의 시원은 1927년 8월 1일의 난창무장봉기다. 올해가 딱 90주년이다. 군벌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장제스의 4‧12 쿠데타로 8개월 동안 공산당원 30만 명 이상이 살해당했다. 중공 당원의 무려 4/5에 달했다.


‘이대로 죽을 순 없다’며 공산당의 건재를 알리기 위해 일으킨 무장봉기가 바로 장시성 난창 南昌기의다. 국민당 좌파 군인들과 당원 2만여 명이 일시에 봉기했다. 원래 계획은 남쪽 항구도시를 장악해 소련의 지원으로 북벌하겠다는 것이었지만 봉기군 대부분이 궤멸해 겨우 1천 명만 남았다. 나중 이야기지만, 봉기에 참여한 이들은 대부분 신중국 건국 10대 원수의 반열에 올랐다. 인민해방군의 창설 원훈 주더 朱德, 허룽 賀龍, 류보청 劉伯承, 린뱌오 林彪 등, 총을 잡은 난세의 영웅들이었다.


한 달 후 마오쩌둥이 주도한 후난성 湖南省 9.9 추수폭동이 이어졌다. 군중의 지지는 넓었지만 노농혁명군은 국민당군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마오의 계획을 들은 아내이자 혁명 동지였던 양카이후이 楊開慧가 ‘글쟁이’가 무슨 총이냐며 말렸다.

“당신은 군대를 모르잖아요?”
마오가 답했다.
“그래도 내가 군대를 좀 압니다. 심지어 총도 노획한 적 있소.”
6개월간의 창사 혁명군에서 지낸 사병 시절을 말하며 아내의 타박에 밀리지 않았다.


이것이 마지막이었다.
마오는 산으로 가고, 양카이후이는 3년 후 창사 육군 감옥에서 총살당했다. 세 명의 아이들과 함께 수감되었다. 사형을 집행하던 날 첫째 아들 마오안잉이 형장에 끌려가는 엄마를 따라가려 울부짖었고, 양카이후이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마오와의 부부관계만 청산하면 아이들과 함께 석방하겠다고 회유했지만, 양카이후이는 간단히 거절했다.

“부부 이전에 혁명 전우다. 내 목은 잘라도 믿음은 자를 수 없다.”

당시 창사 육군감옥은 여성 혁명가들의 영혼을 고문했다. 품 안의 아이를 놓고 전향을 요구했고, 여성 혁명가들은 기꺼이 죽음을 택했다.

1927. 8. 1. 공산당원과 국민당 좌파군인들이 일거에 난창에서 봉기했다. 중국에선 난창기의라고 부른다. 중국인민해방군의 시원이다.
1927. 8. 1. 공산당원과 국민당 좌파군인들이 일거에 난창에서 봉기했다. 중국에선 난창기의라고 부른다. 중국인민해방군의 시원이다.ⓒ바이두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

흔히 마오가 홍군의 장정을 통해 유명해졌다고 생각하는데, 그 전에 이미 마오는 탁월한 조직가이자 이론가였다. 마오가 농민운동을 지도하던 1926년 당시 후난성에만 농민협회 회원이 136만 명, 영향받는 군중이 600만 명이었다. 후난성 추수폭동 이전에 농민들은 이미 악질 지주를 처단하고 국민당 통치기구를 습격하곤 했다.


마오를 농민운동의 스타로 올려놓은 보고서『후난성 농민운동 고찰보고』가 이때 탄생했다. 점차 봉기 양상으로 치닫는 농민투쟁을 놓고 말이 많았을 때, 마오는 농민운동을 지지했다. 근거가 명확했고 주장도 뚜렷했다. 발로 쓴 보고서였기에 위력이 컸다. ‘조사 없이 발언 없다’는 유명한 마오의 경구는 이 시절 이미 기틀이 잡혔다. 현학적이지만 내용이 없고, 남의 권세를 빌어 말하고, 무슨 주의, 분자 하며 동지를 겁박, 고발하는 문장 (마오는 이를 ‘팔고문八股文’에 빗대었다)을 극도로 혐오했다.


장제스의 쿠데타로 당원이 대량학살 당하자 마오가 울분을 토했다.
“혁명은 밥을 사는 것도, 글을 짓는 것도, 그림을 그리는 것도 아니다. 그처럼 우아하고 고상한 일이 아니다. 하나의 계급이 다른 하나의 계급을 엎어버리는 격렬한 행동이다” “정권은 총구로 얻는다는 것을 똑똑히 알아야 한다!”


“정권이 무슨 총구멍에서 나오냐? 맑스도, 레닌도 그런 말을 한 적 없다!”는 당 간부가 많았지만, 마오는 중공을 설득했고, 이날 그 유명한 말이 탄생했다.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 (1926. 8‧7 중공 중앙회의)


추수폭동 후 마오는 천여 명의 패잔병을 이끌고 후난 변계의 징강산 (井岡山, 정강산)에 들어갔다. “우리가 무슨 수호지 水滸誌 ‘양산박’도 아니고 산적이 되자는 거냐?”며 격한 반대를 하는 사람이 많았다. 다음 해 1만 명의 농민군을 이끌고 주더가 징강산에 합류하자 면모를 갖추었고, 이듬해 펑더화이가 8천의 봉기군을 이끌고 합류하자 비로소 군대 같았다. ‘주마오(朱毛:주더와 마오)’의 홍군 紅軍시대는 이렇게 열렸다.


상관의 갑질, 홍군에선 상상도 못했다

징강산에 입산할 때 중공의 노농혁명군은 말이 군대지 농민, 광부, 지식인에게 보총도 부족해 죽창과 낫을 쥐여준 게 전부였다. 군기가 얼마나 개판이었냐면, 패전하자 짐 싸고 귀향하는 자가 부지기수였고, 하루아침에 중대 전체가 사라지기도 했다. “폼 나게 혁명하러 왔는데 산에 들어가 산적이나 되자니 정신 나간 것 아니냐!”며 노골적으로 대열을 선동하는 자도 많았다. 오죽하면 마오가 노잣돈을 쥐여주며 “제발 집에 갈 사람은 가시오!”라고 했을까.


홍군을 강한 군대로 만들기 위해 마오는 절치부심했다. 저우언라이는 황푸군관학교가 인정한 숙달된 정치주임이었고, 펑더화이와 주더는 전쟁을 통해 단련된 장교 출신이었다. 게다가 린뱌오와 허룽은 군사전략의 귀재였다. 사병의 능력은 부족했어도 지휘관은 정치 군사적으로 탁월한 재원이었다.


마오는 사병위원회를 만들어 간부는 사병의 조직적 감시를 받도록 했고, 군의 말단조직까지 당 조직을 둬 군에 대한 당의 절대적인 통제를 실현했다. 군에 대한 당의 지배 노선은 이때 탄생했다.(선당노선) 장교는 병사와 똑같이 먹고 자야 했으며 심지어 군복도 같았다. 장교랍시고 속된 말로 아랫사람의 ‘쪼인트(정강이)’를 까거나 ‘원산폭격(열중쉬어 자세로 머리 박기)’이나 우리나라 육군 박 대장처럼 공관병에게 잡일을 시키면 계급장은커녕 당적도 유지하기 힘들었다. 아편에 취해 부하에게 총질하거나, 사병을 ‘삥 뜯기’로 내몰았던 군벌과는 차원이 달랐다. 하급 군부대에 파견된 당원은 정치 사상교육을 했고, 작전계획을 놓고 지휘관과 사병은 열띤 토론을 했다. 강한 홍군은 여기서 나왔다.


‘극단적 평균주의’지만 나중에 장교의 갑질에 질려버린 국민당 군이 홍군에 귀순하게 된 이유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후 ‘나를 따라 앞으로!’를 외치며 지휘관이 먼저 죽고 병사들도 떼죽음을 당하는 일이 자주 생기자 바뀌었다.

중국인민해방군에 입대하는 걸 중국 젊은이들은 사회주도층으로의 진입으로 생각한다. 입대는 하늘의 별 따기다. 북경대 등 중국 최고의 엘리트들의 복무비율은 계속 늘고 있다.
중국인민해방군에 입대하는 걸 중국 젊은이들은 사회주도층으로의 진입으로 생각한다. 입대는 하늘의 별 따기다. 북경대 등 중국 최고의 엘리트들의 복무비율은 계속 늘고 있다.ⓒ신화통신


지금 중국군은 형식상 징병제지만, 청년 인구가 너무 많아 실제로는 엄격한 선발제로 운영된다. 안경 쓴 병사가 별로 없고 신체등급이 낮으면 입대를 포기해야 한다. 지금은 덜하지만 마오쩌둥 시절엔 제대 날 펑펑 우는 인민해방군이 많다. 영예로운 감격의 눈물이다. 우리나라 사법연수원 졸업한 거와 비슷했다. 군인과 노동계급이 먼저 당원이 될 수 있고, 제대 후에도 당의 지원이 보장되던 시절부터의 이야기다. 하지만 최근 통계자료를 봐도 중국의 엘리트 집단이라는 북경시 대학생과 대학원생의 입대지원 비율은 계속 늘고 있다. 병력은 200만으로 줄였지만, 국방비는 1조 444억 위안으로 7년 만에 2배가 늘었다. 우리나라 돈으로 175조 원 정도다.


중국인의 애간장을 움켜쥐었던 조선인 천재 작곡가

홍군이 팔로군이 되고, 팔로군이 인민해방군이 되는데, 좌우지간 나중에 중공군이 가장 뜨겁게 불렀던 노래가 ‘팔로군 행진곡 八路軍進行曲’이다. 팔로군 행진곡이 지금의 ‘중국 인민해방군 군가’다. 또 신중국 1세대, 그러니까 지금의 중국 노인들이 가장 즐겨 부르는 노래 중 하나가 옌안쑹 (延安頌, 연안송)이다. 완전한 국민가요다. 이 노래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깊은지 지금도 중국 곳곳에서 행사가 있으면 우리나라 교회 성가대가 노래를 부르듯 이 노래를 부른다. 중공의 위훈을 기리는 드라마의 단골 주제곡이다. 두 곡 다 한 명의 조선인 청년이 작곡했다.


작곡가는 조선인 혁명가 정율성이다. 중국에 가서 “당신들 군가를 조선인이 만들었다는 것은 아냐”고 물어보면 미친놈 취급당한다. 팔로군 행진곡은 심지어 중국 국가로 거론될 만큼 대단했다. 이후 정율성은 북한의 군가 <조선인민군 행진곡>을 작곡해 세계적으론 두 나라의 군가를 작곡한, 유래없는 천재 작곡가의 반열에 올랐다.


다음 주 ➁편 '중국인보다 먼저 총을 들었던 조선인 혁명가들'이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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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영재 이산아카데미 기획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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