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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무장투쟁의 흑역사, 민생단과 김산 사건


이번 기사에선 ‘항일무장투쟁의 그늘’을 소재로 다룹니다. 기사 중 지명의 일부는 우리말로 표기했습니다. 동포들의 거주지였던 젠다오 間島는 간도로, 만저우 滿洲는 만주로, 라오터우거우 老頭溝는 노두구로 표기했습니다. 동북항일연군 연재를 마감합니다.


축복받은 『중국의 붉은 별』, 저주받은 『아리랑의 노래』

마오쩌둥은 선전의 달인이었다. 장정을 마치고 옌안에 도착할 무렵 ‘장정’을 소개해 중공의 건재함과 노선을 알리고자 했다. 그러나 장정에 대한 글을 공산당에서 편찬할 경우 삐라취급 받을 것이 분명했다. 저명한 중국전문 외신기자였던 에드거 스노에게 다리를 놓았다. 마오가 구상하고 저우언라이가 기획했다. 적색 수도 옌안의 토굴에서 마오를 인터뷰한 에드거 스노의 글과 강연은 중국인은 물론 세계를 흥분시켰다. 중공 또한 에드거 스노의『중국의 붉은 별』을 극찬했다.

장정을 최초로 알린 이는 에드거 스노가 아니다. 일 년 전인 1936년 영국인 선교사 보샤트 (Rudolf Bosshardt)가 홍군의 포로로 겪은 장정 이야기를 엮어『The Restranining Hand』(묶인 손)을 출간했다. 또 같은 해 장정 대오에서 비밀임무를 받고 소련으로 향한 천윈 陳雲은『수군서행견문록 隨軍西行見聞錄』을 영국과 소련에서 출간했다. 하지만 사람들은『중국의 붉은 별』을 기억한다. 마오의 생각이 맞았다.


그의 아내 헬렌 포스터 스노 (Helen Foster Snow) 역시 걸작을 내놓았다.
『Song of Ariran:The Life Story of a Korean Rebel』(이하 『아리랑의 노래』)로 조선인 혁명가 김산(본명은 장지락)을 알렸다. 그러나『중국의 붉은 별』과는 달리『아리랑의 노래』는 중국에서 출판되지 못했다. 이 책은 중공에겐 조선인 간첩의 회고록일 뿐이었다. 헬렌 포스터 스노에게 장지락은 문학적 축복이었지만, 간첩 심사를 받던 장지락 張志樂에게 외국인 기자와의 잦은 인터뷰는 죽음만을 재촉했다.

책의 운명 또한 불우했다. 1941년 출판된 ‘아리랑의 노래’는 미국 지식인들의 폭넓은 사랑을 받았지만, 1945년 매카시 광풍으로 헬렌은 두 차례나 청문회에 끌려 나와야 했다. 서점에서 책은 사라졌다. 한국에선 46년 『신천지』에 연재되다 사라졌고 1983년에야 서적으로 소개되었다.


장지락은 헬렌이 만난 동양인 중 가장 매력적인 남성이었다

옌안에 머물던 헬렌이 루쉰예술학교 도서관에서 영어책을 빌릴 때마다 대출카드엔 ‘장명 (장지락의 중국 이름)’ 라는 단 한 명의 이름만 있었다. 헬렌의 정중한 인터뷰 제의를 고심하던 장지락은 조건을 달아 승낙한다.

중국당국에 체포되어 일제 관헌에 넘겨지기 전 톈진 주재 일본 영사관에서 찍은 사진. 김산의 호적에 따른 취조기록에는 이름이 장지학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각종 자료를 비교하면 김산은 장지락으로 사용했다. 재중 조선인 공산주의자에 대한 중국 국민당의 적대적 방침은 한결같았다.
중국당국에 체포되어 일제 관헌에 넘겨지기 전 톈진 주재 일본 영사관에서 찍은 사진. 김산의 호적에 따른 취조기록에는 이름이 장지학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각종 자료를 비교하면 김산은 장지락으로 사용했다. 재중 조선인 공산주의자에 대한 중국 국민당의 적대적 방침은 한결같았다.ⓒ구글캡쳐

장지락은 조선 독립을 위해 조선인 혁명가들이 어떻게 싸우고 있는지 세계에 알려달라고 했고, 헬렌은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책을 내겠다고 약속했다. 헬렌은 보안을 위해 가명을 제의했다. 이날 헬렌 포스터 스노는 ‘님 웨일즈’를, 장지락은 ‘김산’이라는 가명을 선택했다.

“김씨는 조선인에게 가장 흔한 성이고 산山은 제가 요즘 흔들리지 않아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해서 넣었습니다.”

인터뷰는 헬렌의 거처였던 아치형 토굴에서 22차례나 이어졌다. 첫 만남, 헬렌은 식민지 조선에서의 여행경험을 꺼내며 ‘조선인은 유순하고 체념적이며 순종적인 민족’이라고 했다. 장지락은 헬렌의 눈을 똑바로 보고 굵은 목소리로 말했다.

“잘못 아시는군요. 우리 조선인은 단 하루도 싸우지 않는 날이 없었습니다. 의병들의 무장투쟁, 독립군의 전투, 의열단의 공격, 지금은 만주의 파르티잔들이 싸우고 있습니다. 수천 명이 투옥되고 처형당했지만 우린 굴복하지 않습니다.”

장지락은 시간을 지켰고 당당하고 품위 있었다. 인터뷰 시간에 늦으면 반드시 사람을 통해 쪽지를 보냈다. 180cm의 키에 굳게 닫힌 입술. 어두운 동굴에 호롱불이 흔들리면 그의 얼굴선은 더욱 굵게 보였다. 인터뷰할수록 식민지 조선과 혁명가 장지락에 대한 헬렌의 연민은 깊어만 갔다. 인터뷰를 끝낸 날 와인에 달뜬 헬렌은 장지락에게 마음을 고백했다. 헬렌에게 혁명가 장지락은 지금껏 만난 모든 동양인 중 가장 매력적인 남성이었다.

“죽음만이 나를 좌절시킬 수 있다”던 혁명가의 죽음

장지락은 자신을 “민족주의자였으며, 아나키스트를 거쳐 공산주의자가 되었다.”고 했다. 그리고 톨스토이를 사랑한 다수의 조선인 혁명가가 이런 과정을 거쳤다고 부연했다. 헬렌은 당시 일제기관에 폭탄을 던지고 요인암살을 위해 나섰던 조선인 청년들에 대해 이렇게 썼다.

“혈관 속에 뜨거운 피가 흐르지 않는 사람은 테러리스트가 될 수 없었다. 그렇지 않다면 희생의 순간에 자기를 잊어버릴 수가 없기 때문이다.”

평북 용천이 고향인 장지락은 합니하 哈尼河(광화촌)까지 걸어가 신흥무관학교 입학을 청원했다. 그러나 그의 나이 15세, 입학기준은 18세로 입학을 거절당했다. 무관학교 복도에서 대성통곡하는 소년의 목청에 놀라 달려온 사람이 대한제국 육군 참의 출신이자 교장인 이세영 李世永이었다. 결국 장지락을 특례 입학시켰다.

장지락은 독립신문, 의열단, 국립 광둥대 의학부를 거쳐 중공의 광저우 봉기로 조선인과 함께 전투했고 ‘하이루펑 海陆丰 소비에트’ (하이펑 海丰 · 루펑 陆丰 . 해륙풍)에서 공산주의를 ‘인류의 양심’으로 받아들였다. 북경시당 조직부장(책)까지 지낸 그는 코민테른의 ‘일국일당’ 방침 결정 후 ‘만주지역 조선인 공산주의자의 입당’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중공 중앙의 밀사로 파견되기도 했던 거물이었다. (1928. ‘12월 테제’)

1930년 체포되었을 때 6차례의 물고문으로 폐가 망가졌지만 조직의 비밀을 지켜 결국 무죄로 석방되었고, 1933년 동지의 변절로 ‘남의사’에 체포되었지만 1년의 복역 끝에 석방되었다. 그러나 고문을 견뎌 생환한 전력은 오히려 일제 특무로 의심받았다.

조선인 당원 한위건이 그의 당적 박탈을 주도했고 결국 그는 ‘특무는 아니지만, 당원도 될 수 없는’ 일종의 ‘보류대상’으로 살아야 했다. 장지락이 단검을 놓고 “둘 중 하나는 죽어야 한다.”고 선언할 만큼의 모진 악연이었다. 김산이 괴사한 폐를 안고 옌안으로 간 목적은 조선민족해방동맹의 승인보다 ‘당적 회복’이라는 이유가 더 컸다.

장지락은 유물론자였다. “죽음 따윈 두렵지 않다”고 말하지 않았다. “죽음만이 나를 좌절시킬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 투쟁에 뛰어든 이후 “단 한 번도 행복했던 적이 없었다.”고 고백한다. 일제와 싸우는 시간보다 소탕전으로 동료들이 학살당하고 조선 청년들끼리 편을 갈라 죽이고 밀고하는 시간이 더 많았다. ‘불신 지옥’을 거쳐 얻은 건 만신창이 영혼과 육신이었다.

“아리랑 고개 너머 죽음 위에 피는 꽃이 조선 독립이오”

인터뷰는 장지락이 살벌한 심사를 받던 기간에 이루어졌다. 당적을 복구하고 전선으로 나가길 원했지만 심사는 길었고 중공은 군정대학 강의 외엔 임무를 주지 않았다. 한가했기에 비참한 시절이었다. 그래서 장지락의 ‘마지막 인터뷰’는 성사될 수 있었다.

당적복구를 포기한 그는 전선으로 나가길 청원했고 당은 그를 호출했다. 전선으로 가는 줄 알았던 그는 외딴 길, 홍군에 둘러싸여 처형당했다. 혐의는 ‘일제와 결탁한 특무이자 반당 행위’였다. 1938년 11월 19일. 겨우 33살이었다.

국공합작 이후 옌안은 혁명적 낭만이 넘치는 황토 근거지로 보였지만, 내부에선 살벌한 숙청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한 달 전 이미 중앙 서기처 사회부 부장 캉성 康生은 장지락에 대한 ‘비밀처형 명령문’에 서명했다. 그해 1월 캉성은『일제 침략자의 함정이며 민족의 적인 트로츠키 비적을 제거하자』는 글을 통해 공산당 내 대규모 숙청을 주도했다.

4월 마오쩌둥과 끈질기게 대립했던 실력자 장궈타오가 국민당에 투항하자 분위기는 더욱 험악해졌다. 9월 중공 전체회의에서 ‘반당분자 숙청’을 결의했다. 문화대혁명의 저승사자 캉성은 이미 옌안시절 발군의 실력을 보였다. 트로츠키파도 일제특무도 아니었지만 중공은 장지락을 그 교집합 어디쯤으로 보았다. 은밀한 내사, 조용한 처형이 이미 진행되고 있었다.

헬렌은 김산과의 공저로 책을 내겠다고 한 약속을 지켰다. 메카시 선풍이 강해지자 헬렌은 스위스로 떠난다. 중공에 대해선 친화적 입장이었으며 중미 수교에 이바지하기도 했다. 노벨평화상 후보로까지 올랐다.
헬렌은 김산과의 공저로 책을 내겠다고 한 약속을 지켰다. 메카시 선풍이 강해지자 헬렌은 스위스로 떠난다. 중공에 대해선 친화적 입장이었으며 중미 수교에 이바지하기도 했다. 노벨평화상 후보로까지 올랐다.ⓒ구글


장지락 사망 후 신중국이 입수한 국민당의 자료엔 “아무것도 자백하지 않는 미련한 놈”이라는 심문기록과 ‘체포명령서’가 있었고 일제의 문건엔 “절대로 전향하지 않을 자” 라는 기록만이 있었다.
1983년이 되어서야 중공 중앙위 조직부는 장지락의 당적과 명예를 복권했다. 그가 죽은 지 45년 만이었다.

“장명 동지(장지락의 중국 이름)의 피살은 특정한 역사조건에서 발생한 억울한 사건으로 마땅히 정정되어야 한다.”


장지락이 ‘아리랑’을 조용히 부르자 헬렌은 너무나 아름답고 슬픈 곡이라고 했다.

“서울 근처에 아리랑고개가 있습니다. 이 고개 아래 소나무는 수백 년 동안이나 사형대로 사용되었죠. 대다수는 압제에 대항해 봉기한 빈농이거나 학정과 부정에 대항해 싸운 청년 반역자들입니다. 이런 젊은이 중의 한 명이 옥중에서 노래를 한 곡 만들어서는 무거운 발걸음을 끌고 천천히 아리랑고개를 올라가면서 이 노래를 불렀습니다. (중략) 그리고 아리랑은 일본군 3천 명을 전멸시킨 독립군들이 모여 부른 노래입니다.”

장지락은 아리랑이 죽음으로 가는 노래라고 표현했지만, 청산리 전투 후 대원들이 승리의 감격으로 부른 노래 또한 아리랑이라고 했다.
장지락은 아리랑이 죽음으로 가는 노래라고 표현했지만, 청산리 전투 후 대원들이 승리의 감격으로 부른 노래 또한 아리랑이라고 했다.ⓒ구글


장지락은 아리랑 너머가 끝이 아니라, 그 죽음 위에 새롭게 피는 꽃이 조선독립이고, 조선인은 이 고개를 오늘도 내일도 넘을 것이라 했다. 김산은 그렇게 아리랑 고개를 넘었다.

김산을 체포한 남의사, 김구와 여운형을 암살한 백의사

2002년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에서 ‘비밀결사 백의사’를 다뤘다. 백범 암살범 안두희가 백의사 白衣社 단원이자, 미국 CIC(미 육군 방첩부대)요원이었으며 여운형 암살 또한 백의사와 연루되어 있었다는 내용이다. 프로그램을 본 사람들은 저게 뭔 소린가 했지만, 사학자들은 나올게 나왔다는 반응이었다. 미군 방첩대(CIC) 소속 실리 (Cilley)소령이 1949년 김구(金九) 암살 직후 작성한 보고서가 공개되었다.

1933년 장지락이 두 번째로 체포되었을 때 그를 끌고 간 조직이 남의사 藍衣社였다. 남의사는 황푸군관학교 극우파 군인들이 모여 만든 장제스 직할 첩보부대로 요인 암살, 테러, 고문, 방첩 활동을 전문으로 했다. 국민당 상징복인 ‘남의’를 따 남의사로 작명했다. 남의사에 체포된 혁명가들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공개전향 아니면 죽음이었다. 살인면허를 받았기에 누구도 남의사의 고문을 견딜 수 없었고, 시신을 새벽 시궁창에 버리는 건 일도 아니었다. 다만 조선인에 대해선 일본 영사관으로 이첩시키곤 했을 뿐이다.

이 남의사에서 공산당원 색출하던 염동진(본명은 염응택 廉應澤)이 만든 조직이 바로 백의사 白衣社다. 이름은 가당찮게도 백의민족 白衣民族에서 따왔다. 염동진은 관동군에 체포된 이후 일제 밀정 짓을 하다 광복 직후 월남해 백색테러 조직 백의사를 만들었다. 미군정을 이리저리 기웃거리다 48년 단독정부 수립 이후 세력이 약해졌다. 표면은 반공이었지만, 내용은 반정부 및 좌익계열 지도자와 독립군 출신 인사를 암살하는 것이었다. 김구와 여운형 암살은 성공했지만, 김책, 김일성 등에 대한 암살은 미수에 그쳤다.

염동진을  시인 고은은 '만인보'에 이렇게 표현했다. (중략) 냉혈 인간  그의 말은 칼끝  그의 생각은 칼끝 찰나  그의 하루 하루 누구를 죽이는 일  누구를 없애버리는 일이었다.
염동진을 시인 고은은 '만인보'에 이렇게 표현했다. (중략) 냉혈 인간 그의 말은 칼끝 그의 생각은 칼끝 찰나 그의 하루 하루 누구를 죽이는 일 누구를 없애버리는 일이었다.ⓒ구글


장지락도 속한 바 있던 의열단이 군대창설을 목표로 갈라질 때 한 부류는 남의사의 강력한 후원을 받아 광복군으로 수렴되었고, 또 한 부류는 중공에 합류해 조선의용군으로 활약하며 관동군과 싸웠다. 남의사 출신이 백의사를 만들어 일제 앞잡이들을 모아 민족 지도자를 암살했다. 독립운동사를 추적해 중국으로 가다 보면 이런 아이러니가 너무나 많다.


항일무장투쟁의 흑역사, 민생단 사건

‘아리랑’의 장지락만 불우했던 건 아니다.
1932년에서 1936년 초까지 최대 2,000여 명의 조선인 혁명가와 유격구민이 살해당했다. 일제의 학살로 가족을 잃은 조선청년들이 설산을 헤쳐 유격대에 합류했지만 그들을 기다린 건 처형이었다. 민생단 사건이다.

1932년 동만 옌지(延吉 연길) 노두구 유격대가 일제 헌병 2명을 사살하고 통역을 생포했다. 유격근거지에 일제 헌병이 나타났다는 것은 이미 노출되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통역을 심문하자 놀라운 이야기가 쏟아졌다. 만주성위 동만특위 노도구 구위원회 비서 송영감이 이미 작년에 투항해 ‘민생단’이란 간첩조직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송영감을 잡아 심문하니 더 충격적인 자백이 나왔다.
“노도구 유격대장 박동근을 비롯해 옌지현 주요 간부 20명이 민생단원이며 목표는 일제와 결탁해 유격대의 소멸하는 것”이라는 자백이었다. 동만이 발칵 뒤집혔다. 동만특위 서기 퉁창잉 童長英은 전 조직에 비상을 걸고 특무 색출에 들어갔다. 지난 날의 시련이 모두 해명되었다. ‘불패의 영도’로 무장한 동북유격대가 일제 토벌대에 의해 심각한 손실을 본 것은 모두 민생단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심문도 간단했다. 의심가면 우선 고문했고, 고문 끝에 얻은 자백은 강력한 증거가 되었다. 처형방식도 잔인했다. 총알이 아깝다며 도끼로 찍어 죽이거나 구타로 죽였다. 물론 이런 처형방식은 동만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홍군이 점령한 소비에트 구역에서 지주에게 가한 죽창처형은 더욱 끔찍했다.

집회 중 기침을 하면 ‘암호’로 의심받았고, 고향 노래를 부르면 ‘혁명 열기에 찬물을 끼얹는 심리공작’, 밥을 흘리거나 일을 게을리 해도, 오발 誤發해도 처형되었다. 심지어 옷을 깔끔히 입고 일을 열심히 해도 체포되었다. ‘특무 정체를 위장’한다는 혐의였다. 희생된 유격대원은 하나같이 전투경험이 풍부한 일당백의 전사들이었다.

반민생단 투쟁이 광기어린 마녀사냥으로 치닫자 중공은 반경유를 순시원으로 내려 보냈다. 좌경방침을 바로잡기 위해 온 반경유 潘慶由는 유격대 현 책임자들을 ‘좌경분자’로 몰아세웠고, 이 과정에서 당적을 박탈당한 훈춘현 정치위원 박두남이 반경유를 살해하고 도주한다. 더 큰 문제는 도주한 박두남이 일제의 토벌대 대장으로 다시 나타났다는 점이었다.

완화 기미를 보이던 반민생단 투쟁은 더 잔혹한 광풍이 되어 동만 지역을 휩쓸었다. 중공 중앙은 동만 지역 유격구민 80% 이상, 조선인 유격대원 95%가 민생단원이라는 보고를 끊임없이 받았다. ‘조선인 공산주의자 = 일제 특무’라는 공식이 성립했다.

사실 민생단은 1932년 2월 지린성 룽징에서 친일파 조병상, 박석윤, 김동한이 간도 조선인 자치를 주장하며 만든 단체지만, 일제가 정책을 바꿔 5개월 만에 해체된 조직이었다. 민생단은 유령이었다. 유령이었기에 실체가 없었고, 실체가 없었기에 더 많은 사람이 죽어야 했다.


“민생단이 아닌 조선인 유격대원을 만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1935년 웨이증민(魏拯民 위증민)은 동만특위 서기로 부임하자마자 ‘숙반 위원회’라는 전담기구를 설치해 더 강한 투쟁을 주문했다. 그러나 숙반 위원회의 최고책임자였던 송일이 민생단으로 몰려 처형된다. 일제 특무가 일부러 ‘간도협조회’ 명의의 편지 한 장을 유격구에 떨어뜨리고 갔다. 수신인은 송일로 되어 있었다. 일제는 그토록 잡고 싶어 하던 유겨대 지휘관을 쪽지 한 장, 헛소문 한 번으로 쉽게 죽일 수 있게 되었다. 혼돈의 투쟁에 지친 웨이증민이 거의 울먹일 듯한 투로 중앙에 보고 헸다.

“민생단이 아닌 조선인 유격대원을 만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김일성 역시 민생단이라는 보고를 받고 있다.”


반민생단 광풍은 1936년에 가서야 진정되었다. 길동위원회 우핑과 김일성이 ‘다홍홰 회의’에서 반민생단 좌경노선의 청산을 주장하고 나섰다. 김일성은 이어 마안산 馬鞍山에서 민생단 혐의로 투옥되어 있던 100명의 대원을 석방하며 조사서류를 모두 불살랐다. 중공 고위 간부였던 저우바우중 周保中과 김일성의 신뢰는 더욱 강해졌다. 죽다 살아난 100명의 대원을 충원한 김일성 부대의 전투력은 더욱 강해졌고, 김일성의 발언권도 높아졌다.

왕밍 王明과 리리싼 李立三의 좌경모험주의에 진저리를 치던 마오나 홍군의 무분별한 체포와 잔인한 ‘지주 처형’을 금지시켰던 덩샤오핑 역시 김일성을 주목했다. 한국전 이후 연안파 숙청(1956년 8월 종파사건)과 문화대혁명으로 북 ‧ 중관계가 험악하긴 했지만 대체로 양국의 지도자는 배짱도 맞고 합이 좋았다.

김일성은 회고록『세기와 더불어』의 많은 지면을 통해 민생단 이야기를 했다. 당시 동만 지역 항일유격대원은 일제와 싸우기 전 내부의 적과 싸워야 했다. 항일무장투쟁사가 영웅들의 무용담 대신 각종 노선투쟁과 구국군과의 갈등, 조중단결과 같은 내부소재로 점철된 이유이기도 하다.

민생단 주구로 몰려 처형되기 전 이들은 한결같이 “혁명 만세!”를 외쳤다. 더러는 호송대원 두 명을 제압해 탈출하고도 며칠 뒤 다시 돌아와 총을 반납하고 순순히 처형당한 지휘관도 있었다. 그는 자신의 탈출로 부하들이 학살될까 염려했다. “나를 대신해 끝까지 싸워다오!”라는 말은 민생단으로 몰린 조선인 혁명가들의 ‘임종당부’가 되어버렸다.

영웅들의 대서사로 보이는 항일무장투쟁의 그늘엔 억울한 죽음이 많다. 장지락과 민생단 혐의자는 일제 특무, 트로츠키주의자, 반당분자로 몰리거나 심지어 민족주의자였기에 죽어야 했다. 지울 수 없는 만주 항일무장투쟁의 그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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➀ 중국인보다 먼저 총을 든 조선인들

➁ "중국의 오성기엔 조선인의 피가 스며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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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영재 이산아카데미 기획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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