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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민갑의 수요뮤직] 늘 그 곳에 있는 삶의 이정표, 자라섬국제재즈페스티벌
자라섬국제재즈페스티벌
자라섬국제재즈페스티벌ⓒ자라섬국제재즈페스티벌 제공

세상은 너무 빨리 변한다. 시간부터 빠르기 그지없다. 사실 시간이 빨리 흘러간다고 세상조차 빨리 변하라는 법은 없다. 하지만 한국, 특히 수도권에서는 하루가 다르다. 일 년 사이에 대통령이 바뀐 건 그렇다 치자. 있던 건물, 자주 가던 가게들도 순식간에 사라진다. 내가 살고 있는 집 앞의 단독 주택도 올해 벌써 네 채가 사라졌다. 예고도 없고, 흔적도 없다.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는 기회조차 주지 않는다. 그저 받아들이는 수밖에 방법이 없다. 처음에는 놀라기도 하고 황당해하기도 하지만 같은 일들이 반복되면 무심해지고 결국 냉담해진다. 그러려니 하고 만다.

그래서인지 이제는 한결같이 남아 있는 것들이 더 소중해진다. 잠깐 유행하고 지나가버리는 것들 말고, 계속 버티고 있는 것들. 계속 버티기 위해 애쓰고 있는 것들. 애쓰면서 깊어지는 것들. 새로 등장했지만 어느새 세월의 더께를 쌓으며 익숙한 풍경이 되고, 추억이 되는 것들.

그 중 하나가 매년 가을 자라섬에서 열리는 자라섬국제재즈페스티벌(이하 자라섬)이다. 2004년부터 경기도 가평군 자라섬과 가평읍내 일대에서 열리는 자라섬은 올해로 14년째 변함이 없다. 2004년 이후 가을이면 항상 페스티벌이 열린다. 그 곳에 가면 자라섬이 있고, 재즈가 있고, 사람들이 있고, 평화가 있고, 행복이 있다. 가평역의 위치가 바뀌고 공연장의 위치가 조금씩 달라지기도 했지만 가평역에 내려 자라섬까지 걸어가는 길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이제는 눈에 익은 풍경을 따라 걷다보면 때로 한 해의 시간은 자라섬을 중심으로 돈다는 생각이 든다. 자라섬의 라인업이 발표되고, 티켓 판매를 시작하고, 홍보 자료가 하나씩 전해질 때의 기다림과 설렘. 그리고 좀 더 시간이 흐른 뒤 자라섬으로 떠나기 위해 차편을 구하고, 짐을 꾸리는 익숙한 행동들을 매년 반복하면서 비로소 한 해가 지나갔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짐을 꾸리고 열차에 타고 내리고 걷고 자리를 잡고 공연을 보고 돌아오는 과정을 거의 매년 반복하는데, 이제는 각각의 자라섬이 엄밀하게 기억나지는 않는다.

아비샤이 코헨 트리오
아비샤이 코헨 트리오ⓒ자라섬국제재즈페스티벌

나를 채우고 비춰볼 수 있게 하는 자라섬

그 때 자라섬에서 누구를 만났고, 어떤 이야기를 나누었는지도 잘 생각나지 않는다. 단지 나이를 먹고 기억력이 떨어져서만이 아니다. 매년 자라섬에서 유독 기대하는 뮤지션, 유독 감동받은 뮤지션이 다르지만 자라섬은 단지 음악을 즐기기 위해서 찾아가지는 않기 때문이다. 자라섬은 바로 자라섬 그 자체 혹은 자라섬의 모든 것들을 다시 만나고 느끼기 위해서 가는 페스티벌이다. 이제는 자라섬에서 열리는 대중음악 페스티벌도 많아졌지만 그 모든 페스티벌의 시작으로서 자라섬은 바로 그 한결같음, 변하지 않음을 호흡하기 위해 가는 페스티벌이다. 한낮의 더위, 해질녘의 쓸쓸한 공기, 저문 가을밤의 어두움, 곳곳에서 들려오는 재즈와 음악, 마음 편히 먹고 마시는 여유로운 분위기, 어쩌다 만나는 반가운 사람들의 기쁨을 매년 다시 확인하기 위해 가는 곳이 자라섬이다. 그 일년 사이에 세상이 달라지고 나도 달라졌겠지만 한결같이 그 곳에서 똑같은 분위기로 열림으로 인해 나를 채우고 비춰볼 수 있게 하는 곳이 자라섬이다.

사실은 자라섬도 계속 달라졌다. 무대가 늘어났고, 공연장소가 바뀌었으며, 프로그램도 늘었다. 재즈 아일랜드, 파티 스테이지, 페스티벌 라운지, 재즈 팔레트, 재즈 큐브, 제이제이 프렌즈 스테이지, 웰컴 포스트, 어쿠스틱 스테이지, 빌리지 가평, 팝업 스테이지, 미드나잇 재즈 카페까지 공연 수만 해도 엄청나다. 공연뿐인가. 자라섬 뮤직클래스가 있고, 올나잇 시네마가 있고, 자라섬 재즈 프렌즈도 있다. 빌리지 가평에는 가평 관내 전시체험부스와 먹거리 부스가 있고, 연극 공연과 예술캠프 ‘수상한 마을’도 열린다. 음악과 영화, 연극, 퍼레이드, 체험 프로그램까지 진행하는 자라섬은 이제 거의 종합예술축제가 되어가고 있다. 모르긴 해도 이 모든 프로그램을 다 체험해본 이들은 거의 없을 것이다.

주초 발데스&곤잘로 루발카바
주초 발데스&곤잘로 루발카바ⓒ자라섬국제재즈페스티벌

재즈 페스티벌을 열면서 재즈 뮤지션을 발굴하고 육성하는 방식으로 자라섬은 진화했다. 자라섬 밖에서 자라섬을 찾은 이들만 주목하지 않고 가평에 사는 이들이 재즈와 음악을 더 가깝게 즐기도록 도왔고, 가평의 삶을 자라섬에서 내보이면서 스스로 페스티벌의 일원이 되도록 했다. 다른 곳에도 있지만 가평에 있어 값진 자연과 전통과 예술이 더 많은 이들에게 알려졌고, 비로소 새롭게 태어나 이름을 얻으며 자라섬의 역사가 되기도 했다. 매년 자라섬을 찾는 이들은 자라섬에 흐르는 시간을 호흡하고 자라섬의 역사를 목격하며 자신의 삶을 겹쳐 놓는다. 자라섬의 바람과 햇살이 수많은 이들의 삶에 스미고, 음악이 녹아들고, 기분이 달라지고, 마음이 변하고, 삶이 삶답게 자리 잡는다. 자라섬은 그 일을 14년째 하고 있고, 14년째 하면서 비로소 자라섬이 이렇게 되었고, 이렇게 만들었다는 사실을 알게 했다.

누구나 재즈를 즐길 수 있는 곳

특히 자라섬은 때로는 고급스럽기도 하고 때로는 난해하기도 하며 때로는 친근한 재즈를 폼 잡지 않고 누구나 즐길 수 있게 했다. 재즈의 문턱을 낮춘 것이다. 자라섬에 가보면 안다. 수많은 관객들이 돗자리를 깔고 앉아 먹고 마시며 여유롭게 자라섬을 즐기는데 관객들의 목소리가 음악을 방해하는 일은 많지 않다. 뮤지션들이 연주하면서 즉흥연주가 끝날 때마다 정확하게 박수가 터져 나온다. 그 소리를 들으면 음악에 집중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다른 유명 재즈페스티벌에 가보면 관객들이 떠드는 소리 때문에 음악을 제대로 들을 수 없는 경우가 많은데 자라섬은 음악이라는 페스티벌의 본질을 놓치지 않는다.

하지만 이 중 어떤 것도 저절로 이루어진 것은 없다. 편안한 공간의 아름다움, 좋은 뮤지션이 최선을 다해 펼치는 공연, 여유로우면서도 상대를 배려하는 관객들의 분위기, 안정된 진행, 지역과 결합해 만들어내는 지역 축제의 정체성까지 자라섬의 모든 매력은 자라섬의 스태프들과 가평군 행정역량, 지역민들의 애정과 관심이 함께 만든 결과물이다.

조슈아 레드맨 트리오
조슈아 레드맨 트리오ⓒ자라섬국제재즈페스티벌

올해에도 메인 스테이지인 재즈 아일랜드 등에서 펼쳐진 공연들은 재즈의 국적과 세대, 장르를 망라하면서 제각각 아름다웠다. 현재 벌어지는 사건과 사고를 재치있고 지적으로 담아낸 이선재 트리오, 다정하고 서정적이었던 마리오 라지냐 트리오, 역동적이고 화려한 플레이를 폭발시킨 아비샤이 코헨 트리오, 피아노 두 대로 압도적인 연주를 선보인 주초 발데스와 곤잘로 루발카바만 좋은 공연을 선보이지는 않았다. 파브리치오 보소 퀄텟, 엘리 데지브리 퀄텟, 야콥 영 밴드는 모두 대중적이거나 서정적이거나 단단한 음악 세계로 관객들을 매혹시켰다. 유럽 재즈 뮤지션들이 많은 탓에 연주의 서정성이 돋보였고. 올해 재즈 포커스 지정 국가인 이스라엘 뮤지션들의 공연은 우열을 가리기 어려웠다.

사실 연주 자체만으로는 어떤 공연도 주초 발데스와 곤잘로 루발카바의 협연을 능가하지 못했다. 하지만 셋째날 무대에 오른 말로와 박성연의 공연만큼 뜻깊은 공연은 없었다. 박성연은 휠체어를 타고 무대에 올랐음에도 자연스럽고 편안하게 자신의 주 레퍼토리들을 불렀다. 비록 최근에 발표한 곡의 가사를 놓치기도 했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한국을 대표하는 재즈 페스티벌에 박성연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했다. 특히 이명건과 말로 등의 공들인 협연은 한국 재즈를 지켜온 산 증인이자 디바인 박성연를 진심으로 예우한 뜻깊은 순간이었다. 유리 호닝 어쿠스틱 퀄텟의 공연 역시 집중력이 높고 섬세한 공연이었다. 이에 비하면 조슈아 레드맨 트리오의 공연은 제 기량을 다 발휘하지 않아 아쉬웠다.

올해의 자라섬 역시 주말과 함께 끝났다. 이제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 시계를 다시 1년 뒤 자라섬으로 맞춘다. 어떤 음악 페스티벌은 삶의 이정표가 된다.

자라섬국제재즈페스티벌
자라섬국제재즈페스티벌ⓒ자라섬국제재즈페스티벌 제공

서정민갑(대중음악의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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