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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민갑의 수요뮤직] 여기서부터 다시 살아가야 하는 세상

12월에 발표하는 음악은 왠지 손해 보는 느낌이다. 연말 분위기에 휩싸이고, 크리스마스 캐롤에 밀려 덜 주목받는 것 같달까. 좀 더 일찍 발표되었다면 그 해의 음반으로 호명될 수도 있을텐데 연말 결산에 끼기에도 엉거주춤한 느낌. 그럼에도 12월에 내놓은 음반 중에는 늘 함박눈 같은 축복이 있다. 2017년이 끝나지 않았음을, 우리에게는 12월이 있음을 기억하게 하는 음반이 있다.

올해 12월에는 밴드 빌리카터(Billy Carter)의 음반이 그 역할을 자임했다. 빌리카터는 12월 14일 EP [The Green]을 발표한 후, 일주일 후에는 또 한 장의 EP [The Orange]를 연달아 내놓았다. 3인조 밴드로 2015년부터 EP 1장과 2장의 정규음반을 발표하고 1년 만에 다시 정규음반 규모의 음반을 내놓은 셈이니 무척이나 부지런한 편이다.

3인조 밴드 빌리카터
3인조 밴드 빌리카터ⓒ일렉트릭 뮤즈

두 장의 새 음반에 수록된 곡은 각각 4곡씩 총 8곡. 밴드 자신의 소개를 빌리자면 “세상을 향한 강하고 직설적인 외침을 무겁고 과감하고 직접적인 사운드에 담은” 곡은 [The Orange]에 담겼고, “우리 내면으로 깊은 울림을 만드는 아름답고 신비로운 사운드”에 담은 곡은 [The Green]에 담겼다. 2장의 음반을 들으면서 가장 먼저 느낄 수 있는 것은 밴드의 변화이다. 그동안 블루스에서 출발한 고전적인 사운드를 뚝심 있게 밀어붙이던 밴드는 이번 음반에서 사이키델릭, 아트록, 애시드 포크 같은 이전과 다른 장르의 방법론을 활용하고 있다. 두 장의 음반은 유기적 관계를 맺고 있는 연작의 형태를 띄고 있는데, 뒤에 발표한 [The Orange]가 좀 더 강렬한 인상을 준다. 그 강렬함은 [The Orange]가 세상을 향해 외치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이 음반에서 빌리카터는 빌리카터의 사이키델릭을 매우 화려하고 장엄하게 분출하면서 가사를 통해 표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사운드와 일치시켜 구현해냈다. 음악은 기본적으로 하나의 메시지이며 발언인 동시에 태도이다. 자신에 대한 태도이건 타자에 대한 태도이건 세상에 태도이건 하나의 태도를 선택한 음악은 자신이 선택한 태도를 정서적으로 공감하게 만들기 위해 음악의 사운드를 방법론적으로 활용한다.

[The Orange]에서 빌리카터가 취한 태도는 분노와 고발, 연민과 미안함이다. 세상에서 여전히 벌어지는 개인적, 조직적 폭력을 고발하고 폭력으로 인한 상처와 좌절을 드러내며 분노를 토하는 빌리카터의 음악적 태도는 대체로 직설적이다. 응축시킨 분노를 장엄하게 혹은 거침없이 토해내는 빌리카터는 그러나 분노의 표출이라는 자신들의 태도를 음악으로 구현하는 과정에서 아트록에 가까운 방법론을 활용해 미학화한다. 마구 내달리거나 읊조리는 대신 사용한 악기들의 사운드를 드라마틱하게 연출해 분노와 상처를 탐미적으로 재현하는 빌리카터는 감정의 미학화라는 예술의 본질에 거뜬히 도달한다.

인간 관계에서 벌어지는 가스라이팅을 표현한 ‘화장’은 곡의 시작에서부터 장례식의 분위기를 풍기는 벨 연주와 묵직한 드러밍에 사이키델릭한 일렉트릭 기타 연주를 교차하면서 곡의 장엄한 스케일을 예고한다. 묵시록의 분위기를 풍기는 보컬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행하는 가혹행위”라는 노랫말로 가스라이팅을 직설적으로 비판한다. 은유적으로 표현한 관계의 종말과 피해자의 무너진 내면은 적확한 멜로디를 통해 생동감 있는 노래가 된다. 초반부터 장엄함과 사이키델릭함을 교차시킨 연주는 곡의 제목처럼 하나의 제의를 거행하는 듯한 긴장감을 만들어내면서 곡에 몰입하게 만든다. 그리고 이 긴장감은 결국 일렉트릭 기타가 주도하는 노이지하고 강렬한 사운드를 통해 폭발한다. 보컬이 빠진 채 연주만으로 재현하는 관계의 화장은 소리를 분출하고 충돌시킴으로써 가스라이팅 피해자의 내면이 처참하게 무너지고 관계가 파탄났으며 그로 인해 스스로 관계의 종말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음을 다면적으로 웅변한다. 여기에 얹히는 건반 연주와 곡의 후반부 보컬의 허밍은 관계를 화장시킴으로써 스스로를 지키고 다시 살아가는 이의 치유까지 표현해냄으로써 드라마를 완성한다. 한 편의 장엄한 서사를 음악으로 구현해낸 곡은 치열한 주제의식과 공들인 구성, 적확한 사운드 연출로 곡의 의미를 충분히 발현해냈다.

밴드 빌리카터의 앨범 ‘The Orange’ 이미지
밴드 빌리카터의 앨범 ‘The Orange’ 이미지ⓒ일렉트릭 뮤즈

또한 “찰나의 기쁨을 하나 던져주고는 개처럼 부리”는 세상에서 “떨어지는 꿀 한 모금 혀 끝에 달콤함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냉소적으로 표현한 곡 ‘연옥’은 왕왕거리는 일렉트릭 기타 톤과 왈츠풍의 리듬으로 냉소와 희화화한 태도를 노랫말에 앞서 재현한다. 2분 35초의 짧은 곡임에도 노래에 담겨진 메시지는 결코 가볍지 않다. 세상이 불공평하고 불합리하다는 사실을 이미 잘 알고 있음에도 익숙해진 “두려움과 불안함”을 과감하게 떨치지 못하고, “행복하다는 자기암시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신자유주의 시대의 인간형을 고발한 곡은 싸구려 느낌을 강조한 건반 연주와 더불어 ‘연옥’같은 세상을 만드는 이는 바로 우리 자신임을 자조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체제는 권력의 강압적 통치만으로 완성되지 못한다. 체제는 인민의 자발적 복종이 없이는 유지될 수 없다. ‘연옥’은 우리 자신이 피해자이며 동조자라는 사실, 그렇게 체제가 유지되고 완성된다는 사실을 짐짓 유쾌한 냉소의 태도로 드러낸다. 그에 비하면 ‘너의 꽃’은 부당한 세상과 비겁한 태도로 인해 세상을 떠날 수 밖에 없는 영혼들을 위로하는 곡이다. 세월호 참사의 희생자들을 비롯한 국가 폭력과 사회적 타살의 희생자들을 떠올릴 수밖에 없게 만드는 곡은 강렬한 일렉트릭 기타 연주와 묵직한 드러밍에 미디엄 템포의 서술을 통해 살아남은 이들의 죄책감을 표현하고 있다. 지난 10년, 혹은 그 이전과 그 후까지 이어지고 있는 죽음들에 대한 공명과 인식을 드러낸 곡은 이 시대를 살아 견디는 이들의 양심을 대변한다.

그리고 음반의 마지막 곡 ‘사창가에 핀 꽃’은 창녀라는 성매매여성을 통해 구조적 폭력과 구조적 폭력으로 굴절되면서 구조적 폭력을 강화하는 편견과 일상의 폭력을 동시에 드러낸다. 농염하고 자조적인 보컬은 지치고 상처받은 이의 내면을 힘 있게 대변하고, 여기에 클라리넷 연주처럼 들리는 건반 연주를 가미한 연주는 사이키델릭한 분위기를 창출하면서 곡의 개성을 만들어낸다. 일렉트릭 기타 연주와 건반 연주에 보컬 코러스까지 가미함으로써 곡의 사운드 스케이프가 확장되고, 노래 속 발언은 더욱 묵직해진다. 또한 곡의 후반부에서 변화를 준 일렉트릭 기타 연주는 곡의 서사를 다층적으로 완성하려는 빌리카터의 의지를 충분히 보여준다.

이렇게 함으로써 빌리카터는 의미있는 메시지를 음악으로 구현하면서 듣는 즐거움을 완성했다. 순간순간 듣는 즐거움을 만끽하는 동안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 대해, 그리고 그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 자신에 대해 더 명징하게 인식하게 된다. 아주 몰랐던 이야기는 아닐지라도 충분히 곱씹어야 하는 생각들이 날아왔다. 여기서부터 우리는 다시 살아가야 한다. 누구도 피할 수 없다.

서정민갑 대중음악의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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