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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책]일제 희생자지만 부일협력자 취급당해온 ‘조선인 전범’을 아시나요?
조선인 전범 이학래 회고록 ‘전범이 된 조선청년’
조선인 전범 이학래 회고록 ‘전범이 된 조선청년’ⓒ기타

1925년 전라남도 보성군에서 태어난 조선청년 이학래는 열일곱 살이던 지난 1942년 일본군 포로 감시원 모집에 응모했다. 그리고 1942년 9월부터 1945년 8월까지 일본군 군무원으로 타이·미얀마 철도 건설에 동원된 연합국 포로 감시 업무를 수행했다. 해방이 됐지만 일본군 군무원 신분이었던 그는 체포됐고, 오스트레일리아 관할 재판에서 사형 판결을 받았다. 같은 해 11월7일 20년으로 감형됐고, 수년이 지난 뒤 감옥에서 풀려났지만 그는 한국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지난 1955년 처지가 같은 한국·조선인 전 BC급 전범자와 함께 ‘동진회’를 결성하고 일본 정부의 사죄와 보상을 요구하며 아흔을 훌쩍 넘은 현재까지 일본에서 투쟁하고 있다.

포로감시원이 되면
월급도 주고 가족도 보호해준다고 했다.
집안 살림에 보탬도 되고,
전쟁터에 나가 총알받이가 되는 것도
피할 수 있다면 포로감시원이
되는 게 낫지 않을까.
그들은 그렇게 포로감시원이 됐다

‘전범’이라는 무시무시한 낙인은 그를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와 비슷한 처지의 BC급 조선인 전범들은 그동안 사람들의 관심에서 벗어나 있었다. 일본 정부는 물론이고, 우리 정부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들도 일본정부를 향해선 줄기차게 싸워왔지만 고향인 우리 정부와 국민을 향해선 미안한 마음에 자신들의 사연을 알리는 것조차 꺼려 왔다. 민족문제연구소가 출간한 이학래 회고록 ‘전범이 된 조선청년’은 일본에서 출판된 ‘한국인 전 BC급 전범의 호소’를 번역한 책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일본군의 최말단에 속했던 한국인 포로감시원들이 일상적으로 포로를 대면했다는 이유로 부당하게 일제의 포로 정책의 책임을 떠안고 BC급 전범으로 처벌되었던 아픈 과거를 회고한다.

1942년 5월23일 매일신보 1면에 포로감시원을 모집한다는 기사가 머리기사로 실렸다. 민간인 군무원으로 수천 명을 채용한다고 했고, ‘반도청년의 더할 나위없는 영광’이라고 했다. 20~35세의 초등학교 졸업 이상의 청년들이 모집 대상이 됐다. 형식상으로는 모집이었으나 실제는 달랐다. 지역별로 인원을 배정한 후 각 지역의 관리와 경찰이 할당된 인원을 동원했다. ‘지원’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된 강제동원이었다.

지난 2013년 민족문제연구소 주최로 서울역사박물관 로비에서 열린 '전범이 된 조선청년들-한국인 BC급 전범의 기록' 전에서 전시됐던 기록사진
지난 2013년 민족문제연구소 주최로 서울역사박물관 로비에서 열린 '전범이 된 조선청년들-한국인 BC급 전범의 기록' 전에서 전시됐던 기록사진ⓒ민족문제연구소

징병제 시행이 발표된 시점에서 조선의 청년들은 언젠가 징병되어 전쟁터로 끌려가야 한다는 냉혹한 현실과 마주했다. 이때 포로감시원을 모집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포로감시원이 되면 월급도 주고 가족도 보호해준다고 했다. 집안 살림에 보탬도 되고, 전쟁터에 나가 총알받이가 되는 것도 피할 수 있다면 포로감시원이 되는 게 낫지 않을까. 그들은 그렇게 포로감시원이 됐다. 이렇게 이 책의 저자인 이학래도 열일곱의 나이로 최연소 포로감시원이 되었다. 전국 각지에서 동원된 3,000여 명의 조선인 청년들과 함께 부산에 있는 일명 노구치부대의 훈련소로 끌려가 훈련을 받았다. 포로는 감시와 감독의 대상일 뿐, 포로를 인도적으로 처우해야 한다는 것은 전혀 배우지 못했다. 포로에 맞서려면 폭력밖에 없다고 배웠다. 포로보다 우월하게 보이려면 협박과 구타밖에 없다고, 그렇지 않으면 포로들이 너희들의 머리 위에 올라서게 될 거라고 배웠다.

조선인 포로감시원은 각지로 파견되어 13만 5천여 명의 연합군 포로를 감시하고 감독했다. 이학래도 타이에서 1만 1천명의 포로들을 만났다. 후일 ‘콰이강의 다리’라는 영화로 유명해지는 ‘죽음의 철로’, 타이·미얀마철도 건설현장에 투입된 포로들이었다. 포로감시원은 일본군에 소속되었으나 이등병보다 못한 일본군의 최말단에 자리했다. 이학래는 상급자가 시키는 대로 맡은 바 임무를 성실히 수행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후 그는 전범으로 체포되었다.

전쟁이 끝나자 연합국은 태평양전쟁 과정에서 자행된 일본의 전쟁범죄 책임을 묻기 위해 재판을 시작했다. 동남아시아 49곳에서 BC급 전범재판이 벌어졌다. 재판 결과 5,700명이 BC급 전범으로 판결되었는데, 그중 148명이 조선인이었다. 그들 가운데 23명은 교수형에 처해졌고, 125명은 무기 또는 유기징역에 처해졌다. 조선인 148명 중 129명이 이학래와 같은 포로감시원이었다.

일본군의 포로 정책 책임자들이
대부분 빠져나간 가운데,
그 책임은 일상적으로 포로를
직접 대면해야했던 최말단의
조선인 포로감시원들에게 지워졌다

포로감시원의 죄목은 포로 학대였다. 무리하게 노역을 강요하고 식량과 의약품을 제대로 공급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는 일본군의 명령과 포로 감시 체계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었다. 하지만 일본군의 포로 정책 책임자들이 대부분 빠져나간 가운데, 그 책임은 일상적으로 포로를 직접 대면해야했던 최말단의 조선인 포로감시원들에게 지워졌다.

이학래는 1947년 3월 싱가포르에서 열린 호주 군사법정에서 포로학대 혐의로 기소되어 재판을 받았다. 재판에서 이학래는 환자에게 무리하게 노역을 시켜 사망에 이르게 한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변호사는 그가 말단의 군무원일 뿐, 포로와 관련하여 어느 것도 결정할 지위에 있지 않았다고 변호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학래는 7개월간 사형수로 살았다. 이후 감형되어 수년간의 감옥 생활 끝에 석방되었다. 하지만 전범으로 낙인찍힌 그는 끝내 조국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조선인 포로감시원들은 왜 일본의 전쟁 책임을 떠맡아야 했을까? 그들은 무엇을 위해, 누구를 위해 전범이 되어야 했을까? 이학래는 일본 정부를 상대로 평생을 싸워왔다. ‘조선인 BC급 전범’이라는 불명예를 안고 죽은 동료와 평생 동안 그 멍에를 짊어지고 살아야 했던 자신들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한 싸움이었다.

물론 그는 자신의 무고함만을 호소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평생 동안 일제의 침략전쟁에 자신의 한 손을 빌려주었다는 죄책감에 시달리며 반성과 각성의 시간을 보냈다. 그는 한국에서 이 책을 출판하는 것을 끝까지 망설였다. 한국의 독자들이 ‘전범’이 되어야했던 자신의 삶을 이해해줄까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는“한국의 여러분도 이해해 주신다면 좋겠다”고 조심스레 말한다.

친일세력 문제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한 민족이
짊어져야 하는 현실은 어디까지인가.
일제 지배로 인한 고통을
온몸으로 겪을 수밖에 없었던
이들이 부일반역자라니,
화살의 방향이 잘못 되어도
너무나 잘못 되었다

이 책에서 이상의 인천대학교 초빙교수는 “이학래는 1956년 10월 가석방되었다. 그러나 ‘일제에 협력한 사람’이라는 낙인 때문에 그는 한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일본에 눌러앉게 되었다. 한국현대사에서 친일문제가 제대로 처리되지 않은 채 엉뚱한 곳으로 화살을 돌려 일제에 의한 희생자를 부일협력자로 취급하며 손가락질했기 때문”이라며 “친일세력 문제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한 민족이 짊어져야 하는 현실은 어디까지인가. 일제 지배로 인한 고통을 온몸으로 겪을 수밖에 없었던 이들이 부일반역자라니, 화살의 방향이 잘못 되어도 너무나 잘못 되었다. 배신과 기만으로 자신의 안일만 꾀해온 진짜 친일세력에 의해 의도적으로 그렇게 사회가 오도되었다. 지켜주지 못한 이들에게 또 한 번 올가미를 씌워 귀국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우리 사회의 미숙함이 이들을 힘들게 했다면 이제라도 성숙함을 보여주어야 할 것”이라고 강조한다.

권종술 기자

문화와 종교 분야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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