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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창의 철학산책] ‘하얀 리본’ - 억압된 사회와 영혼의 부패
영화 ‘하얀 리본’ 스틸컷
영화 ‘하얀 리본’ 스틸컷ⓒ영화 '하얀리본'

1. 엄숙한 정적

최근 서지현 검사의 용기 있는 폭로로 이 나라 최고 권력 집단 내부의 성희롱 사건이 폭로되었다. 권력과 성적 욕망, 그 때문에 언젠가 본 적이 있는 미하일 하네케의 영화 ‘하얀 리본’이 생각났다.

이 영화는 일차 세계 대전 직전 오스트리아 사회를 배경으로 한다. 마을 한가운데 있는 지주의 성관을 교회와 농장 관리인의 집, 아이들의 학교가 둘러싸고 있다. 아직도 중세인가 하는 의문이 들 정도로 이 사회는 지주인 남작과 엄격한 종교가 지배하고 있다. 사람들이 입은 목을 채운 검은 옷처럼 숨 막힐 듯하다. 흑백 화면에 강력한 키 라이트, 19세기 말 지어진 붉은 벽돌 건물 때문에 그런 느낌은 더욱 강화된다.

영화가 배경으로 삼는 오스트리아 사회는 그렇게 숨 막히는 사회였다. 오스트리아는 한때 거대한 독일 제국의 중심이었다. 19세기 초 나폴레옹 침략 이후 프로이센은 근대 개혁에 박차를 가했지만 오스트리아는 1차 세계 대전에 이르기까지 봉건 왕조가 엄격한 종교의 도움을 받아 지배했다.

오스트리아는 고인 물처럼 썩어갔다. 그 반짝이는 표면 위에 제국의 잔재들은 연일 화려한 무도회를 벌이고 있었다. 세상은 이미 변화하고 있었다. 오스트리아에도 20세기 초 저항의 비명이 얼음 같은 표면을 뚫고 메아리를 남겼다.

영화는 그런 오스트리아 사회의 현실을 잘 보여준다. 영화에서도 표면적으로 엄숙한 정적이 흐르는 마을의 이면에서 이상한 사건들이 잇달아 벌어진다.

그 사건은 세 개의 고리를 가지고 있다. 그중 하나는 지주인 남작의 지배에 대항하는 소작인의 저항이다. 소작인의 아들은 자기 어머니가 남작의 잘못으로 죽었다고 생각하며 분노를 폭발하기 시작한다. 다른 하나는 목사인 아버지의 지배하는 아이들의 저항이다. 목사는 아이들의 사소한 잘못도 엄격하게 처벌한다. 잘못을 저지른 딸과 아들의 팔에 하얀 리본을 묶어 순결함을 강조하지만 아이들은 아버지의 처벌을 부당하다고 생각한다.

이런 저항은 서로 얽혀 하나의 고리를 이루며 간헐적으로 억압적 표면을 뚫고 나왔다. 다시 엄숙한 정적이 마을의 동요를 짓누르고 만다. 언제 그런 사건이 있었던가 싶게 마을은 다시 일상을 회복한다. 소작인과 아이들의 저항은 비현실적인 꿈처럼 보인다.

2. 순수한 사랑

영화는 억압된 사회를 보여준다. ‘하얀 리본’처럼 이 사회는 순결을 강요당한다. 그 순결은 억압하는 지배자들의 관점에서 규정된 순결이며, 저항하는 피지배자에게는 억압의 차가운 색깔일 뿐이다.

영화는 단순히 억압적 지배와 저항의 메아리를 보여주려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은 아니다. 감독의 초점은 오히려 억압의 한가운데 살아가는 인간의 삶에 관해 묻는다.

이 영화는 마을 아이들의 선생이었던 화자의 보이스오버를 통해 전개된다. 그는 남작 부인의 갓난아이를 돌보아주는 열일곱의 처녀를 사랑하여 결혼하려 한다. 그녀는 어린아이와 같은 순진성과 풋풋하고 고요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그녀는 남작 부인의 오해로 쫓겨나고, 교사는 집으로 돌아간 그녀에게 청혼한다.

두 사람의 연애는 순수하다. 나는 언젠가 독일인의 전통 의상을 본 적이 있다. 하얀 블라우스에는 색실로 작은 꽃들이 새겨져 있다. 그건 독일의 5월에 들판에 핀 이름 모를 꽃들의 모습과 닮았다. 나는 그런 모습을 보고, 어릴 때 벽에 걸린 옷들을 덮은 하얀 옥양목의 천에 어머니가 색실로 새긴 꽃들을 연상했다. 두 사람의 연애는 꼭 그런 느낌이었다. 두 사람의 순수한 연애는 이 마을에서 일어났던 끔찍한 사건을 비추어주는 거울이 된다.

영화 ‘하얀 리본’ 스틸컷
영화 ‘하얀 리본’ 스틸컷ⓒ영화 '하얀리본'

3. 피비린내 나는 복수

영화가 소작인과 아이들의 저항을 배경으로 전해 주는 사건은 선정적이고도 피비린내 나는 사건이다. 영화의 카메라는 화자인 선생의 시선을 따르기에 그 사건의 진실을 노골적으로 밝히지 못한다. 하지만 카메라의 초점에 힐끗힐끗 드러난 사건의 진실은 관객이 재구성해야 한다. 감독은 일부로 노골적인 시선을 피했지만 그 때문에 이 영화는 관객에게 무척이나 난해하게 느껴진다.

이 끔찍한 사건은 마을 의사를 둘러싸고 벌어진다. 그는 세속적 자유주의자이면서, 인간을 냉소적으로 파악하는 과학자이다. 그는 그를 돕던 마을의 산파와 정을 통한다. 그녀는 의사에게 굴종적이지만, 애착이 강한 여자이다.

영화가 시작되면서 의사가 말을 타고 숲을 가로질러 돌아온다. 누군가 나무 사이에 매어둔 끈에 걸려 그의 말이 넘어진다. 그는 팔을 다쳐 30킬로 떨어진 병원에 입원한다. 그러자 마을의 산파는 의사의 아이들-큰딸 ‘안나’와 작은 아이-를 돌본다는 이유로 의사의 집으로 들어온다. 자기 아이 칼을 데리고 의사의 집으로 걸어 들어오는 그녀의 걸음걸이는 그녀가 바로 줄을 매어둔 범인이라는 사실을 관객에게 암시한다.

얼마 지나서 상처를 치료한 의사가 돌아온다. 의사는 그사이에 훌쩍 큰 열네 살짜리 딸의 모습에 놀란다. 영화는 의사가 큰딸을 어떤 관계를 가졌는지 다만 암시할 뿐이다. 안나는 아버지와의 이런 관계를 오히려 즐거워한다.

딸과 관계하면서 의사는 그동안 욕망 충족의 수단이었던 산파에게 떠나기를 명령한다. 그는 이때 지금까지 그가 산파에게 냉혹하게 말한다. 그녀의 추한 모습 때문에 토할 정도라고, 차라리 죽어 버리라고 말한다.

모욕을 받은 산파는 복수를 시작한다. 우선 산파는 자기 아이 그러나 의사의 감추어진 아들로 암시되는 칼의 눈을 칼로 찌른다. 그것이 그녀 자신의 짓이었다는 사실은 칼의 눈을 치료하는 의사를 지켜보는 산파의 냉정한 모습에서 충분히 암시된다. 더구나 칼의 상처와 더불어 남겨진 편지에는 신의 이름으로 경고하고 있다. 거기에는 칼이 대신 처벌 받는다고 적혀 있다.

이 사건 후에도 의사는 여전히 산파에게 냉혹하다. 산파의 애착은 마침내 피비린내 나는 사건을 발생시킨다. 그것은 바로 일차 세계 대전의 서곡을 알리는 황태자의 저격 사건과 같은 날 벌어진다. 일차 세계대전은 오스트리아의 봉건체제가 무너지는 결정적 사건이었다. 결국 이 피비린내 나는 사건은 마을을 지배하는 억압적 체제가 무너지는 최후의 비명이었다.

영화는 다만 사건 직후 산파가 당황하면서 영화의 화자인 선생이 타고 가던 자전거를 빼앗아 타고 떠나는 모습만을 보여준다. 산파의 집도 굳게 잠겨 있고, 의사의 집도 진료 중단이라는 팻말이 걸린 채 잠겨 있다. 이틀 후 남작의 지시로 마을 사람들이 문을 열고 집안에 들어간다. 영화는 그 이후 집안에 가득한 정적만을 소개한다. 아마 의사와 딸은 살해되었을 것이다.

영화 ‘하얀 리본’ 스틸컷
영화 ‘하얀 리본’ 스틸컷ⓒ영화 '하얀리본'

4. 억압적 사회의 진실

이 사건에는 근친상간이나 도착적 살해라는 선정적 테마가 깔려 있다. 영화가 만일 노골적인 시선을 택했다면 관객은 이런 테마에 관음증적인 관심을 가질 것이다. 감독은 그걸 피하고 싶었기에 부로 왜곡된 선생의 시선을 택해 사건을 덮어버리고 만다. 감독이 관심을 갖는 것은 그런 테마가 아니라 이 사건이 지닌 사회정치적 맥락이고 그런 사건이 지니는 사회적인 의미이다.

영화 속에서 의사가 산파에게 던지는 독설은 세속적 자유주의자의 극단을 보여준다. 의사의 모습은 인간으로서 오만의 극치이다. 세속적 자유주의자로서 그에게 인간이란 욕망일 뿐이다. 타인은 이런 욕망의 수단이며, 그 욕망에는 어떤 제한도 없다. 그는 자유이다. 그의 영혼의 부패는 관객의 코를 찌른다.

세속적 자유주의자의 이런 모습은 헤겔이 헤겔이 ‘정신현상학’의 「정신」 장에서 다루었던 근대 자유주의자의 모습과 닮았다. 헤겔은 근대 자유주의자의 근본 입장을 ‘유용성’이라는 모럴로 파악한다. 자신만이 유일한 목적이며, 다른 모든 것이 자신의 수단이다. 모든 다른 것은 어떤 고유한 가치도 지니지 않는 허무한 것이다.

영화는 봉건제와 기독교의 억압과 세속적 자유주의의 부패를 서로 연결한다. 왜 억압된 사회는 부패한 영혼을 낳는가? 억압은 인간을 자신의 수단으로 삼는 태도를 기르지 않을까? 그것은 억압된 사회의 공식이다. 사회적 억압은 부패한 영혼을 낳는다.

우리는 이런 사건에 익숙하다. 2009년 장자연 사건, 2013년 김학의 법무차관 사건을 생각해 보라. 그리고 최근 폭로로 이 나라 최고 권력 집단 내부에 감추어진 사건을 보라. 억압적인 사회의 모습은 대체로 이와 같다.

5. 희망

희망은 없는 것인가? 감독은 마지막 희망을 찾는다. 그것은 마지막 장면에서 알 수 있다. 전쟁이 나자 마을 사람들이 모두 교회에 모여든다. 농부들, 남작의 가족, 최후로 목사가 등장한다. 관객들로서는 당연히 목사가 교회의 앞으로 걸어와서 미사를 올릴 것으로 예상한다. 그러나 목사는 앞으로 걸어오다가 멈추고 신도들 옆에 앉고 만다.

목사가 있어야 할 지점에는 아무도 없다. 그 지점에는 그 대신 우리 관객이 앉아 있다. 아니면 신이 앉아 있다고 보아도 좋겠다. 목사는 관객과 신의 심판을 기다리는 듯 그 앞에 선다. 그것은 곧 자신의 죄의 고백이다. 작가는 그 고백으로부터 억압으로 부패한 오스트리아 사회의 구원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이병창 동아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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