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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대한민국 정체성 논쟁, 자유민주주의냐? 민주주의냐?

김만권 박사는 연세대에서 정치학 석사, 뉴스쿨대학교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고 현재 연세대에서 정치철학을 강의하고 있습니다.
저서로는 『그림으로 이해하는 정치사상』,『호모저스티스』,『김만권의 정치에 반하다』『정치가 떠난 자리』 『세상을 보는 열일곱 개의 시선』 등이 있으며 참여연대에서 운영하는 정치철학 팟캐스트 [철학사이다]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본지 평생교육원 이산아카데미의 프로그램, ‘일주일에 끝내는 정치사상(31강)’의 강사이기도 합니다.

2017년 5월, 새로이 설립된 정부는 헌법 개정을 약속했다. 헌정사 전체로서는 11번째 헌법이자 10번째 개헌을 선언한 것이다. 그런데 헌법 전문에 들어갈 용어 하나를 두고 보수와 진보진영이 갈등을 겪고 있다. 논란이 되는 용어가 우리가 살고 있는 정치체제의 정체성을 규정한다는 점에서 이 갈등은 필연적이라는 생각도 든다.

그 갈등의 핵심은 이렇다. 대한민국의 기본질서는 “자유민주주의”인가 아니면 “민주주의”인가? 언뜻 보기엔 말장난 같지만 정치 진영에선 심각하다. 보수진영은 민주주의 앞에 자유라는 말이 빠지면 독재라도 찾아오는 양 우려를 표명하고 있고, 진보진영은 우리 제헌헌법에서 ‘민주주의’라는 용어에 주목하며 그 당시 맥락을 고려해 볼 때 이 용어를 되찾아 올 가치가 있다고 주장한다. 이런 논쟁이 있다는 건 좋은 일이다. 하지만 제대로 된 논쟁을 하려면 우리가 쓰고 있는 용어가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지 분명히 해야 한다.

이 논쟁을 지켜보면서 놀라게 되는 점은, ‘자유민주주의’ ‘민주주의’ 등의 용어들이 논자들에 따라 너무 자의적으로 쓰이고 있다는 점이다. 너무 익숙한 이 용어들이라 다 아는 것 같지만, 우리는 이 용어들이 담고 있는 뜻을 얼마나 알고 있을까?

'자유' 빠진 민주주의가 북한식 인민민주주의라는 주장은 보수, 우익진영을 중심으로 현 정권이 사회주의로의 진입을 꾀하고 있다는 루머를 양상하고 있다.
'자유' 빠진 민주주의가 북한식 인민민주주의라는 주장은 보수, 우익진영을 중심으로 현 정권이 사회주의로의 진입을 꾀하고 있다는 루머를 양상하고 있다.ⓒ조선일보

‘자유민주주의’란 무엇인가?

올해 2월 6일, ‘조선일보’에는 “‘자유’ 빠진 민주주의?”라는 흥미로운 칼럼이 실렸다. 이 칼럼의 필자는 ‘자유민주주의’를 ‘인민민주주의’라는 괴물의 반대 용어로 제시하는데, 이 체제를 두고 “인민에게서 자유를 박탈하고 억압·학대하는 무자비한 반민주주의, 독재의 가면”이라고 쓰고 있다.

솔직해 말해 처음 이 칼럼에서 ‘인민민주주의’를 접했을 때 혼란스러웠다. 칼럼의 저자는 학자인데, 정치학을 공부하면서 개념적으로는 처음 들어본 규정이었기 때문이다. ‘인민민주주의’라는 용어에 상응할만한 학문적 용어를 찾아본다면, popular democracy와 populist democracy가 있다.

전자는 국민들에 의해 운영되는 민주정이라는 의미로 우리가 다 알고 있는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정신을 모태로 삼는 민주정체다. 이게 문제가 될 리는 없다. 후자는 대중영합적 민주주의로 이 개념에 해당하는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토니 블레어’가 이끈 신노동당 정부다.

토니 블레어는 이 대중영합적 민주주의로 아이러니하게 영국에서 시장의 자유화, 민영화를 끌어내고 노동자 세력을 약화하는데 앞장섰다. 그런데 칼럼의 맥락상 이런 대중영합적 민주주의를 비판한 것도 아니었다. 이런 정치학적 개념을 떠나 굳이 ‘인민민주주의’를 상상해 본다면 결국 북한의 정식 국가명인 ‘인민민주주의’ 공화국을 떠올릴 수 있다. 정말 우리 헌법 전문에서 ‘자유’라는 말이 빠진 민주주의가 북한식의 독재로 빠질 수 있는 길을 여는 것으로 생각한다면 그다지 할 말이 없다. 이런 식의 합리적 근거 없는 용어규정은 소모적인 논쟁만 불러일으킨다(뒤에서 보게 되겠지만, 우리 대한민국에서 독재의 공고화는 ‘자유민주주의’라는 기본질서 규정 아래 일어났다).

그렇다면 ‘자유민주주의’란 무엇인가? 서구사회(특히 이 개념이 탄생했다 보아도 좋을 영국)에서는 자신들의 역사의 일부분인 만큼 이 용어에 대한 정의가 사전에도 명료하게 실려 있다. 예를 들어 옥스퍼드 사전은 “개인의 권리와 자유가 공식적으로 인정되고 보장되며, 정치권력의 행사가 법의 지배로 제한되는 민주적인 정부체계”라고 규정해 놓고 있다.

자유민주주의 조건으로서 1) 개인의 권리와 자유의 공식적 보장, 2) 법의 지배를 통한 권력 통제라는 이 두 요소는 이 개념에 대해 제공하는 대부분의 사전에 공유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학문적으로도 필수적인 것들로 여겨진다. 여기에 학문적 논의 과정에서 나온 요소 하나를 더한다면, 이런 보장이 (대개의 경우) 3) 국민들이 직접 선출한 “대표자들”(representatives)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요약해 본다면, ‘개인의 권리와 자유가 보장되며 권력행사는 법으로 제한되는 대표자 민주주의 시스템’이 바로 자유민주주의다.

조선일보 2월 6일자 칼럼
조선일보 2월 6일자 칼럼ⓒ조선일보

우리에게 ‘자유민주주의’란 일관성 있는 용어인가?

위에서 살펴보았듯 자유민주주의는 그 개념 자체만으로는 별다른 문제가 없어 보인다. 그런데 프린스턴의 명예 교수이자 법철학의 대가이자 정치학자로도 손꼽혔던 월터 머피(Walter F. Murphy, 1929-2010)는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를 연결 짓는 이 용어와 관련해 흥미로운 문제를 하나 제시한다.

그는 『헌정민주주의:정의로운 정치질서의 설립과 유지』(2007)에서 ‘자유(주의)’를 뜻하는 liberal(ism)이란 용어가 때로는 개인의 선택을 옹호하기 위해 정부를 제한하기 위해 쓰이기도 하고, 때로는 개인의 선택을 제한하는 정부 행위를 옹호하는 방향으로도 쓰여서 그 쓰임새의 일관성이 상실되었다고 지적한다. 이런 이유로 이 용어가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자유민주주의’라는 용어를 피하겠다고 밝히며 대체재로 ‘헌정민주주의’(constitutional democracy)라는 용어를 쓴다.

그 역사적 과정을 들여다볼 때 자유민주주의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침해할 수 없는 ‘개인의 권리와 자유’의 보호다. 소위 법의 지배 역시 개인의 권리와 자유를 보호를 위해 권력을 자의적으로 행사하는 것을 막기 위한 요소다. 서구의 역사를 들여다보면 이는 필연적인 귀결이었다. 서구에서 자유민주주의의 탄생은 왕의 절대 권력에 맞섰던 정치엘리트들 및 부르주아들과 관련되어 있다. 시장의 탄생과 함께 커지고 있던 자신의 이익을 방어해야 했던 이들에겐 커다란 난관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들이 맞서는 대상인 왕들이 신으로부터 권력을 부여받은 자들이었기 때문이다. 이들에겐 자신들의 권력을 정당화할 수 있는 권력의 새로운 원천이 필요했고, 그 원천으로 로마 시대 이후 오랫동안 잠들어 있던 ‘인민’(people)을 깨워냈다. 자유주의와 민주주의가 손을 맞잡는 순간이었다. 그들이 기대했던 대로 깨어난 ‘인민’의 존재는 절대왕정을 타파하는데 중요한 정당성의 근거가 되었다.

하지만 엘리트들과 부르주아들은 이내 또 다른 난관에 부딪혔다. 귀족과 부르주아들이 왕에게 요구했듯, 평범한 인민들은 귀족과 부르주아들을 향해 자신들에게 동등한 권리와 자유가 있음을 주장했다. 자신들의 권력을 정당화하는 근거로 삼은 인민들과 다른 수준의 권리를 갖는 것, 그 자체가 ‘특권’이라는 점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렇게 ‘개인의 권리와 자유’는 평범한 모든 이들에게 확장되었고, 자유민주주의가 방어해야 할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하지만 20세기 이후 서구 세계를 벗어난 ‘자유민주주의’는 그 원래의 의미를 급속히 잃어갔다. 예를 들어 우리 헌정사에서 헌법전문에 ‘자유민주주의’라는 용어가 기본질서로 처음 제시된 헌법은 제8호이다. 이 제8호는 1972년에 만든 것으로 소위 ‘유신헌법’이라 불린다. 구속적부심제도조차 폐지된, 개인의 기본권이 가장 억압된 시대의 기본질서를 만들어낸 그 헌법이다.

이 시절 우리의 기본질서로 규정된 ‘자유민주주의’는 개인의 권리와 자유를 외면하고 독재자의 자의적인 권력행사를 가능하게 하는 원천이 되었다. 좀 더 직접적으로 표현하자면, 우리 헌정사에선 ‘조선일보’에 게재된 칼럼이 그토록 혐오하는 “인민에게서 자유를 박탈하고 억압·학대하는 무자비한 반민주주의, 독재의 가면”은 ‘인민민주주의’가 아니라 바로 ‘자유민주주의’였던 것이다. 박정희 유신정권이야말로 이 용어의 일관성을 망쳐놓고, 그 의미를 퇴색하게 만든 장본인이다. 이런 지점에서 우리는 당연히 물을 수 있다. ‘자유민주주의’는 우리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일관성 있게 표현하는데 역사적으로 적합한 용어인가?

헌법 전문엔 '자율과 조화를 바탕으로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더욱 확고히 하여' 라고 명시되어 있고 제4조엔 '대한민국은 통일을 지향하며,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입각한 평화적 통일정책을 수립하고 이를 추진한다.'라고 되어있다.
헌법 전문엔 '자율과 조화를 바탕으로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더욱 확고히 하여' 라고 명시되어 있고 제4조엔 '대한민국은 통일을 지향하며,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입각한 평화적 통일정책을 수립하고 이를 추진한다.'라고 되어있다.ⓒnaver post / nhn no.1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이렇게 헌정사에서 그 의미가 퇴색된 ‘자유민주주의’를 대체하려는 이들이 제시하는 용어는 ‘민주주의’다. 명백해 보이지만 한편에선 논쟁적인 ‘민주주의’는 몇몇 측면에서 편견으로 가득한 용어라고 할 수 있다. 많은 사람이 민주주의를 ‘이데올로기’처럼 이해하고 있지만, 민주주의는 그 의미 자체로만 본다면 데모스, 요즘 말로는 한 국가의 ‘전체’ 구성원들이 통치하는 정부의 형태를 말한다.

우리가 흔히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를 비교하면서 양자를 이념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전자는 정치이데올로기(-ism)인 반면 후자는 통치의 형식(-cracy)이다. 다시 한 번 강조하자면, 민주주의는 그 자체로 이념이라기보다는 정체의 통치방식이다.

민주주의에 대한 또 하나의 오해는 민주주의를 ‘다수결주의’로 환원하는 것이다. 민주정체가 최종결정방식으로서 다수결주의를 활용하는 것은 맞지만, 다수결주의가 민주주의 그 자체인 것은 아니다. 만약 다수결주의가 민주주의라면 ‘다수의 독재’는 피할 길이 없다. 다수결주의가 그 자체로 민주주의라면 소수자들에겐 지옥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밀이 주장하듯 다수결주의는 그 자체로는 분파주의이며, 다수와 소수의 경계가 명확한 곳에 일어나는 분파주의는 일종의 독재로 전락할 가능성이 높다. 이런 곳에서 ‘이견’은 사실상 존재할 수 없으며, 존재한다 하더라도 그 의미는 미미하다. 다수결주의는 의사결정의 도구로써 필요하지만 모든 구성원을 동등하게 대하겠다는 민주주의 정신을 때로 외면할 수도 있다.

극단적인 경우 다수결주의로 민주주의를 포기할 수도 있으며, 히틀러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 일부 전체주의는 다수결주의 아래 생겨났다. 우리가 앞서 살펴본, ‘자유민주주의’가 확장되며 힘을 얻을 수 있었던 데는 바로 이런 요인이 숨어 있었다.

어떤 이들은 ‘민주주의 그 자체가 개인의 권리와 자유를 방어하지 못한다’는 이런 주장을 근거로 삼아, 결국 자유(주의)가 민주주의의 기초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이런 주장은 개인의 자유는 모든 구성원이 최소한의 평등한 자유를 공유한 곳에서만 확립된다는 점에서 본다면 완전히 잘못된 것이다. ‘일부만 자유로운 상태’를 우리는 ‘특권’이라고 부른다.

‘개인의 권리와 자유’를 강조하는 자유주의는 모든 구성원 간의 평등을 강조하는 민주주의라는 정체 없이 꽃필 수 없는 이념이다. 이렇게 보면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는 양자가 다른 한쪽의 기초라기보다는, 노르베르토 보비오(Norberto Bobbio) 가 『자유주의와 민주주의』(1988)에서 지적하듯이 서로를 필요로 하는 이념이자 정체이다.

김만권 박사
김만권 박사ⓒ민중의소리

제헌시절의 ‘민주주의’, 지금의 맥락에도 유효한가?

모든 정체에는 과거가 있다. 헌정사에서 본다면 당연히 그 시작은 제헌헌법이다. 진보진영의 많은 이들이 제헌헌법의 논의 과정에 나타난 ‘민주주의’라는 용어에 관심을 쏟아붇고 애정을 드러낸다. 예를 들어 ‘프레시안’에 게재된 “‘자유민주주의’가 아니라 ‘민주주의’인 이유”도 그렇다.

그런데 이 글의 필자가 강조하는 ‘민주주의’는 앞서 소개한 그런 개념이 아니다. 이 글에 따르면 ‘민주주의’라는 용어 뒤에 숨은 뜻은 이념으로써 ‘사회민주주의’다. 이 글에서 필자는 임시정부가 ‘사회민주주의’를 지향했을 뿐만 아니라 제헌헌법 역시 ‘사회민주주의’를 지향했다고 사료를 근거로 들어 설명한다. 애초에는 ‘자본주의로부터 사회주의로의 점진적이고도 평화적인 이행’을 의미했던 사회민주주의라는 용어는, 지금 현재엔 1)자유롭고 민주적인 정체와 2)자본주의 경제 내에서 주로 3)분배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정부의 적극적 개입을 강조하는 신념/정체를 뜻하는 말로 쓰인다. 관련기사:프레시안 칼럼

이 글을 대하면서 문득 드는 의문은, 만약 맥락이 그러하고 그 노선을 이어받고 싶다면 ‘사회민주주의’라고 쓰면 되지 왜 그냥 ‘민주주의’인가이다. 제헌헌법에 있는 표현을 그대로 쓴다면 의미의 명료성 차원에서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말하고 싶다. 만약 ‘사회[주의]적’이라만 말만 들어가면 의심받는 우리 맥락에서 이 용어를 그대로 쓰는데 복잡한 심경이 담겨 있다고 한다면 충분히 이해는 된다. 다만 폭우가 내릴 때 길을 나서고자 한다면 비를 맞을 각오쯤은 되어 있어야 하는 건 아닐까하는 생각도 든다.

또 하나 아쉬운 점은 이 글이 “자유민주주의가 정치적・형식적・절차적 평등을 추구하는 민주주의지만, 사회민주주의는 경제적・사회적・실질적 평등을 추구하는 민주주의”라는 조금은 낡고도 기계적인 구분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구분은 자유주의는 정치적・형식적・절차적 평등을 추구하는 반면, 사회주의는 경제적・사회적・실질적 평등을 추구한다는 편견에 근거를 두고 있음이 분명하다.

하지만 자유주의자들 내에도 실질적 평등을 주장하는 이는 많다. 대표적으로 19세기에는 존 스트어트 밀이 있었고, 20세기에는 존 롤스가 있었다. 이들은 정치적・형식적・절차적 평등 없이 경제적・사회적・실질적 평등이 확보되지 않는다고 주장할 뿐이다, 더욱이 지금 자유주의 사상을 바탕으로 활동하고 있는 대부분의 세계시민주의자는 실질적 평등주의자들에 가깝다. 현실이 이러한데, 이런 구분이 진보진영의 자유민주주의와 사회민주주의에 대한 인식이라고 딱히 믿고 싶지는 않다.

여기서 우리가 논의해보았으면 하는 사안은 다름 아닌, 제헌헌법이 살폈던 정의의 영역이다. 한 정체의 최고규범 혹은 최고결정의 내용이 헌법이라면, 그 헌법은 어떤 방식으로든 그 정체가 지향하는 정의의 원칙들을 품고 있다. 우리의 제헌헌법이 만들어지던 시기 인간이 관심을 기울였던 정의의 영역은 ‘어떻게 나눌 것인가’였다. 소위 ‘분배’가 정의의 핵심 영역이었다.


그러나 낸시 프레이저(Nancy Fraser)가 제시하듯, 새로운 시대의 정의는 경제적 영역의 분배뿐만 아니라, ‘사회적 체계와 가치 속에서 개인과 집단의 평등한 지위 인정’과 ‘정치적 장에서 나를 드러낼 수 있는 대표’의 영역에서도 제기되고 있다. 우리 시대의 정의는 ‘분배’(경제), ‘인정’(사회), ‘대표’(정치)라는 삼차원적 영역의 문제다. 우리의 제헌헌법에 담긴 ‘민주주의’라는 용어는 새로이 제기된 ‘인정’과 ‘대표’라는 영역을 수용하고 있는가? 시기적으로 볼 때 당연히 그럴 수 없었다는 것은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다.

만약 제헌시대의 ‘민주주의’의 의미를 불러들이고자 한다면, 이에 대한 재정의가 분명히 있어야 한다. 개인적으로는 민주주의라는 용어가 그 자체로는 보편적 통치방식만을 뜻하는 용어일 뿐이라는 점에서 우리의 고유한 기본질서의 지향성을 드러내는 데는 그다지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우리 정체의 지향성을 모호한 용어에 숨겨놓는 것이 과연 바람직할까?’

이렇게 묻고 싶다. 오히려 사회민주주의가 옳다고 믿는다면, 사회민주주의라고 명백하게 밝히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민주주의’라는 용어의 재정의를 사회민주주의 쪽으로 이끌어갈 때 희망적인 부분은, ‘사회민주주의’를 표방한 북유럽 국가들이 ‘인정’과 ‘대표’라는 새로운 정의의 영역에서도 상대적으로 훌륭한 성과를 내고 있다는 점이다.

민주적 헌법의 원리들, 어떻게 우리의 것이 되는가?

어떤 논쟁이 벌어졌을 때, 가장 난감한 상황은 같은 용어를 서로 다른 의미로 쓰고 있을 때다. 특정 용어를 둘러싼 논쟁이라면 더욱 그러하다. 최소한의 기반을 공유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이 글을 썼다.

‘자유민주주의냐, 민주주의냐’라는 용어논쟁과 관련해 덧붙여 둘 사안이 있다. 첫째, 정체의 기본질서의 지향성을 헌법전문 혹은 헌법조항에 반드시 규정할 필요는 없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미국 헌법의 전문은 “우리들 연합주(the United States)의 인민은 더욱 완벽한 연방(Union)을 형성하고, 정의를 확립하고, 국내의 안녕을 보장하고, 공동의 방위를 도모하고, 국민의 복지를 증진하고, 우리들과 우리들의 후손에게 자유와 축복을 확보할 목적으로 미국(the United States of America)을 위하여 이 헌법을 제정한다.”는 말이 전부이다. 심지어 헌법 어디에도 이런 기본질서에 대한 규정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애초에 모방한 독일의 사례처럼 헌법에 이 기본질서의 내용을 반드시 규정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둘째, 최근의 학문적 연구들이 ‘자유민주주의’라는 용어에서 벗어나 ‘헌정민주주의’(constitutional democracy)라는 용어를 자주 쓰고 있다는 점이다. 이 용어를 굳이 소개하는 이유는 우리에게 ‘자유민주주의’ 혹은 ‘민주주의’가 아니더라도 다른 선택지가 있을 수 있다는 점을 밝혀두기 위해서다(그렇다고 헌정민주주의라는 용어를 채택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며, 단지 다르게 규정할 수 있다는 사례로 제시하는 것이다).

헌정민주주의는 국민들이 자유롭게 선택한 대표자들이 일상의 정치에서 통치는 하지만, 이 선출직 공직자들이 자신에게 가해진 실질적 제약을 존중해야 한다는 신념에 바탕을 둔 민주정체다. 내용을 들여다본다면 자유민주주의와 다를 바 없어 보이지만, 대표자의 권력 행사에 가해지는 제약, 소수자의 권리 보호 등 다양한 측면에서 민주적 원칙들이 더 명료하게 작동하는 체제다. 어떤 이들은 이런 헌정민주주의를 ‘헌법대로 하는 민주주의’라는 오해를 하곤 하는데, ‘그 내용이 무엇이든 헌법에 있는 대로 한다’는 신념은 ‘헌법주의’(constitutionism)라고 불린다.

헌정민주주의는 민주주의 역사적 과정에서 만들어진 혹은 사회적 합의를 통해 만들어진 민주적 원칙 아래에서만 작동한다. 예를 들어 이런 정체에서 소수자 권리의 보호는 단순한 다수결의 결정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데, 이 정체의 근본정신이 이들의 권리를 ‘민주정체의 약속’으로서 방어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어떤 국가라도 헌법은 가질 수 있지만, 헌법을 보유한 모든 국가가 헌정민주주의는 아니다. 헌법주의 아래에선 악법도 법이지만, 헌정민주주의에선 민주적 원칙에 근거를 둔 법이어야만 한다. 이런 헌정민주주의는 그 구성원들이 개인의 권리 방어, 국민에 의한 제한 정부, 시민들의 참여라는 민주적 원칙을 내면화할 때야 작동할 수 있다.

그렇다면 당연히 물어야 할 질문이 있다. 이런 민주적 원칙들은 어떻게 구성원들 간에 내면화되는 것일까? 돌이켜보면 87년에 만들어진 우리의 제10호 헌법은, 헌법 그 자체로만 보면 매우 훌륭한 것이다. 그럼에도 이 훌륭한 헌법에 담긴 조항들은 우리 국민들 사이에서 내면화된 원칙이 되지 못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한나 아렌트는 『혁명론』에서 그 결정적 이유 중 하나로 헌법이 국민들이 스스로 만들어낸 산물이 아니라 누군가에 의해 주어진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 나 자신이, 혹은 내 부모들이 이 헌법을 만드는 과정의 일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스스로 그 과정의 일부가 되지 못할 때, 헌법의 원칙들은 문서에 기록된 원칙으로만 남는다. 특히 우리 헌법의 역사를 보면, 대부분의 개정이 권력구조에 집중되어 있을 뿐, 헌법의 또 다른 축인 기본권은 주요한 관심사가 되지 못했다. 헌법을 재설계하는 과정에서 평범한 사람들의 권리와 자유는 사실상 철저하게 외면당해 왔다.

여러분에게 헌법이란 무엇인가? 엘리트들이 설계해서 평범한 자들에게 내리는 일종 시혜의 산물인가? 아니면 이 국가에서 여러분의 삶의 질을 좌우할지도 모를 기본권과 사회구조에 관한 원칙인가? 만약 후자라면 여러분은 헌법을 짓는 과정에 어떻게 참여하고 있는가? 예를 들어 앞으로 가장 오랫동안 이 헌법의 영향력 아래에 살지도 모를 미래세대 및 청년세대의 목소리는 헌법에 어떻게 반영되고 있는가? 여러분은,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는 설계과정 일부로서 어떻게 목소리를 내고 있는가?

베르톨트 브레히트는 우리 삶의 원리가 되지 못한 헌법의 원칙들을 ‘바이마르 헌법 제2조’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국가의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그런데 나와서 어디로 가지?
그래, 도대체 어디로 가는 거지?
...
뭔가가 누워 있다. 진흙탕투성이가 되어.
...숨이 끊어진 채.
그러나 그것이야 말로 국민!
진짜로 그것이 국민?
그렇다. 진짜로 국민이다.”

2016년 겨울, 다행히 우리는 바이마르 시대 숨이 끊어진 독일 국민과 달리 우리로부터 나온 권력을 광장으로 다시 불러들였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확신할 수 없다. 우리로부터 나온 권력이 어디로 향해 가는지. 우리가 명백히 지켜보지 않는다면 어쩌면 그곳은 또 다른 진흙탕이 될지도 모른다. 권력이 가는 곳을 가장 쉽게 확인하는 분명한 방법은 여러분이 동료시민과 함께 정체를 구성하는 원리를 함께 만드는 과정의 일부가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용어전쟁’이 아니라 시민들이 더 광범위하게 헌법을 만드는 과정에 참여하는 제도적 채널을 확보하는 것이란 생각이다. 시민들이 함께 참여하는 제도적 과정에서 (‘자유민주주의’든 ‘민주주의’든) 국가의 정체성이 확립되어야만 한다. 그 제도적 과정이 어떻게 설립되는지 의문이 들 수도 있을 것이다. 여러분이 한 번쯤 들어보았을 ‘진실과 화해를 위한 위원회’는 남아프리카에서 헌법이 지어지던 시기 대중이 참여할 수 있는 광범위한 채널을 연 제도적 과정의 일부였다 (만약 필요하다면 이에 대한 이야기는 따로 쓰겠다).

혹 몇몇 여러분은 헌법을 설계할 수 있는 능력이 자신에게 있는지 의심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2016년 겨울을 돌이켜보자. 그 시작에서 누구도 앞으로 일어날 놀라운 일에 대한 확신은 없었다. 하지만 시민들의 힘이 모여 변화를 이루는 과정의 원동력이 되었다. 그래도 여전히 스스로 헌법을 짓는 일에 대한 확신이 없다면, 프랑스 혁명과 미국 혁명 모두에 참여했던 토마스 패인이 남긴 말이 힘이 되길 바라며 또.박.또.박. 적어둔다.

“헌법을 짓는 일이란 정부의 행위가 아니라, 정부를 만드는 국민들의 행위다.”

정치철학자 김만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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