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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기 업은 엄마까지 죽였던 참혹한 그날의 민간인학살 현장 목격담
충남 아산시 배방면 폐금광에서 발굴된 유해 일부
충남 아산시 배방면 폐금광에서 발굴된 유해 일부ⓒ구자환 기자

1951년 1월 6일 충남 아산시 배방면 중리3구 마을에는 200~300여명의 사람들이 총을 든 경찰과 청년들과 함께 나타났다. 이들은 현재 마을회관 앞에 위치했던 ‘방앗간’으로 들어갔고 한동안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마을에서는 방앗간에 끌려간 이들이 이 시간 동안 강의(교육)을 받은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 동네사람 눈에 비친 이들은 모두 낯선 사람들이었다. 진실화해위원회는 이들 주민은 주로 온양, 배방, 신창 등지의 주민인 것으로 파악했다.

당시 이들이 끌려올라가는 모습은 배방면 중리 3구 이봉의(81. 당시 나이 14세)씨와 임현재(77. 당시 8세)씨에게 목격됐다. 피난을 다니던 이 씨는 도민증을 발급받지 못해 산에서 내려오지 못하고 있다가 저녁에 무렵 산에서 내려오다가 이 광경을 목격했다. 임씨도 마을에서 이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날 오후, 날이 어둑해질 무렵인 오후 5시께부터 100명 단위로 3차례에 걸쳐 현재 63도로로 이어진 농로와 산길을 이용해 마을뒷산 뒤터골(설화산)로 끌려올라갔다. 진실화해위원회 기록으로는 당시 배방지서 순경인 한정우가 향토방위대장 한상익과 공모해 이들을 폐금광에서 전원 총살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폐금광의 길이는 그리 길지 않은 것으로 전해진다.

아산시 배방면 폐금광 학살 직전에 주민들을 감금했던 방앗간 터. 녹색 지붕의 주택이 그 장소다.
아산시 배방면 폐금광 학살 직전에 주민들을 감금했던 방앗간 터. 녹색 지붕의 주택이 그 장소다.ⓒ구자환 기자

이날 1차로 100여명의 사람이 줄 지어 뒷터골로 올랐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콩 뽂는듯한 총소리가 마을에 울렸다. 경찰과 극우청년단인 치안대는 다시 100여명을 산으로 끌고 가기 시작했다. 방앗간을 나선 직후 아이를 등에 업은 한 여성은 ‘여기서 죽여라’고 악다구니를 해댔다.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총을 든 치안대 5~6명은 이들을 위협하며 계속 산으로 이끌었다. 여성이 대부분인 이들 속에는 아이를 업은 여성이 많이 있었고, 60대 노인도 있었다. 이들 중 남성의 비율은 약 30% 가량이었다. 마을에서는 임산부까지 포함되어 있었다는 말이 전해진다. 이렇게 방앗간에 임시 구금된 사람들은 모두 3차례에 걸쳐 같은 날 순차적으로 허무하게 죽임을 당했다.

주민 300여명을 학살한 경찰과 치안대는 마을주민 4명을 불러내어 벼의 낟알을 떨어내고 남은 줄기인 ‘짚’을 지고 산에 오르게 했다. 학살했던 시신을 불태우기 위해서였다. 마을주민은 이들 4명중 1명은 서울에서 거주하고 있다고 한다. 목격자인 임씨는 “3명은 사망했지만, 그중 1명인 이창노씨는 서울에서 살고 있다”고 했다.

이날 산으로 끌려올라간 300여명의 민간인은 단 한명도 빠짐없이 현장에서 학살됐다. 그러나 방앗간에서 밀가루를 담는 함에 숨은 애기엄마와 어린아이, 그리고 남성 1명은 산을 끌려가지 않고 목숨을 건졌다.

이들이 살아서 돌아간 이야기는 마을에서 구전으로 내려오고 있다. 구전에 따르면 마을치안대 책임자인 이형노씨는 마지막으로 방앗간을 점검하면서 이들이 함에 숨어있는 것을 발견했다. 하지만 이 씨는 숨어 있는 이들을 못 본채 하고 ‘이상없다’는 보고를 했다. 해가 완전히 떨어지고 어둠이 깔렸을 때 경찰과 치안대는 마을을 벗어났다. 이후 이들은 외부를 살피기 위해 밖으로 나왔다가 주민의 눈에 띄었다. 이들을 본 주민은 ‘어서 도망가서 살아라’며 길을 알려 주었다고 한다. 이들을 못 본 채 했던 마을치안대 책임자인 이형노씨는 폐금광으로 짚을 지고 올라갔던 이창노씨의 형이다.

충남 아산시 배방면 폐금광에서 발굴된 M1 탄피
충남 아산시 배방면 폐금광에서 발굴된 M1 탄피ⓒ구자환 기자

23일 중리3구 마을회관에서 만난 두 주민은 당시 죽은 사람은 억울하게 죽었다고 했다. 이야기를 하면서 점점 흥분한 상태로 변했다. 배방면 휴대마을에서도 많은 사람이 죽었다는 이야기도 곁들어 했다. 그 순간 다른 노인이 눈치를 주자 잠시 침묵했다. 당시 부역혐의로 가족이 죽임을 당한 세대는 더 이상 같은 마을에 살지 못하고 마을을 떠나 뿔뿔이 타지로 흩어졌다.

진실화해위원회 기록을 보면 당시 아산군에서는 1950년 6월 29일 인천상륙작전 이후 9월 27일께 부터 온양읍을 비롯해 염치면, 탕정면 등 동북부 지역에서부터 치안대가 부역자 체포를 시작했다. 군경이 아직 이 지역을 수복하기 이전이었다. 부역자에 대한 처벌은 미군이 이 지역을 떠나고 온양경찰이 복귀한 후 시작됐다. 이 시기를 기점으로 배방면, 신창면, 염치면, 온양읍, 선장면 등 각 지역에서 본격적인 학살이 자행됐다.

충남 아산시의 민간인학살 가해자는 온양경찰과 경찰의 지시를 받은 의용경찰, 대한청년단, 청년방위대 등으로 구성된 치안대로 파악됐다. 부역혐의자 체포는 주로 주민의 증언과 밀고로 이루어졌고, 조사과정에서는 구타와 전기고문 등이 행해졌다. 부역혐의자 처벌은 상부 지시 이외에 경찰서장의 재량으로도 이루어졌고, 희생규모도 온양경찰서장과 해당 지서주임의 재량에 따라 달라지기도 했다. 부역혐의자 처형에는 경찰 1인이 인솔하고 치안대원들이 부역혐의자를 처형지로 끌고 가서 총살하는 방법으로 진행됐다. 부역자 학살은 1951년 1.4후퇴 시기까지 지속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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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자환 기자

민중의소리 전국부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주로 경남지역을 담당하며, 영화를 제작하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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