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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민보] 서른 셋 죽음 앞에 다짐했던 한 기독교 여성운동가의 삶
만민보
만민보ⓒ기타

“그 해 사순절이 시작되던 1993년 2월, 여성 노동운동을 하던 33세 지인의 죽음은 같은 나이였던 제게 큰 충격이었어요. 그 앞에서 저도 모르게 약속 했어요. ‘네가 못 다한 일, 이제 내가 할게’라고…”

위장취업으로 노동운동을 하던 동갑내기 지인의 죽음이 시작이었다. 윤혜숙(57) 한국교회여성연합회 사회선교위원장이 처음 사회운동에 발을 들여놓게 된 계기다. 그 당시 지인의 나이는 33살.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순교한 나이와 같았다. 그 죽음 앞에 다짐을 한 뒤, 벌써 20여년이 훌쩍 넘었다.

지인의 죽음을 계기로 그는 ‘한국기독교장로회 여신도 전국연합회’(기장여신도회) 교육원에서 여신도 지도자 교육을 받았다. 이후 기장여신도회 인권추진위원부터 시작해 인권부위원장·평화통일위원장·사회위원장·협동총무, 그리고 한국교회여성연합회 사회선교위원장을 맡으며 사회선교활동(통일·여성인권·탈핵운동) 전반에 참여해 왔다.

북에 결핵검진차를 보내기 위해 모금운동을 펼치고, 북에 수차례 연탄을 보내는데 일조 했으며, 매해 수차례 일본군 ‘위안부’ 문제해결을 위한 정기 수요집회를 주관하는 등 각종 사회운동에 참여했다. 이 외에도 효순이·미선이 사고현장, 미군 해군기지가 들어선 강정마을, 원유 유출 사고가 난 태안반도, 4대강 사업이 진행됐던 팔당댐 등 모든 현장을 찾아다니며 연대의 목소리를 냈다.

2월26일 종로의 한 카페에서 윤혜숙 한국교회여성연합회 사회선교위원장을 만났다.
2월26일 종로의 한 카페에서 윤혜숙 한국교회여성연합회 사회선교위원장을 만났다.ⓒ민중의소리

기독교에 대한 오해… “민중 같은 기독교가 있다”

그와의 인터뷰는 쉽지 않았다. 윤 위원장은 “우연한 계기로 시민사회운동에 참여하고 신도들과 시민사회 사이에서 가교역할을 했을 뿐, 사회운동의 중심에서 어떤 역할을 한 게 아니”라며 인터뷰 수락을 꺼려했다. 그럼에도 요청 끝에 26일 종로의 한 카페에서 윤 위원장을 만났다. 그의 딸 이현정(31)씨도 함께했다.

그를 인터뷰한 이유는 좀처럼 사회가 주목하지 않았던 기독교계 여성 사회운동가 중 한 명이기 때문이다. 그동안 기독교는 일부 대형교회의 성소수자 혐오나 세습, 극우적 행태 등의 추문으로 소위 ‘개독교’라고 비난 받아왔다. 반면, 기장여신도회 등의 사회적 활동은 제대로 조명 받지 못했다. 특히 한국교회여성연합회가 ‘기생관광반대운동’으로 상징되는 성매매반대운동을 펼치고, 오늘의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태동에도 큰 역할을 한 점은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다. 기독교가 70~80년대 민주화 운동에 기여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대형교회 중심의 그릇된 모습으로 제대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교회 여성들의 활동은 더욱 가려져 있었다.

이런 환경 속에서 윤 위원장을 비롯한 많은 기독교 여성들은 지난 세월 동안 꾸준히 사회운동을 이어왔다. 그의 영향인지 딸 이현정씨는 페미니즘 작가로 활동 중이다. 이현정 작가는 “10대 때 추운 겨울 어머니를 따라 효순이·미선이 촛불집회에 나갔다 힘들다고 떼를 쓰다가 어머니께 크게 혼난 기억이 난다”며 “당시 어머니는 또래의 죽음을 목전에 두고 어떻게 분노하지 않을 수 있냐고 다그쳤다”고 회상했다. 그러면서 “어머니의 영향을 많이 받아 지금의 일을 하고 있는 듯하다”고 덧붙였다.

효순이, 미선이 추도문을 읽는 윤혜숙씨.
효순이, 미선이 추도문을 읽는 윤혜숙씨.ⓒ뉴스타파

“그날의 참사 현장 통곡이 이어졌다. 장갑차에 깔린 너희의 여린 몸에 시퍼런 죽음의 공포가 덮쳐왔을 때 얼마나 두렵고 고통스러웠니. 장갑차가 지나가는 것을 수없이 보고 살았지 위험하긴 해도 서로 비키면서 조심하니까 별일 없을 거라 믿고 사셨겠지. 그러나 막연한 믿음에 돌아온 것은 사랑하는 너희들의 주검이었다.”

효순이·미선이 10주기 당시 윤혜숙 위원장이 읽어내려 간 추도문이다. 그가 떨리는 음성으로 추도문을 읽는 장면은 뉴스타파 19회 ‘연극이 끝나고 난 뒤-효순이와 미선이가 걷던 그 길’ 영상에서도 볼 수 있다. 영상 속 그의 목소리에서도 느낄 수 있듯이 윤 위원장은 딸 같은 아이들의 죽음에 분노했다. 그는 “6월에 일어났던 사고였는데, 월드컵 때문에 11월부터 촛불을 시작됐었다”면서 “가슴을 치면서 여중생인 애들을 끌고 다녔다”고 말했다.

“북한서는 연탄이 땔감이에요”

그가 가장 열렬히 참여하고 주도했던 운동 중 하나는 통일운동이다. 북한과의 왕래가 잦았던 노무현 정부 시절 그는 개성과 금강산을 5차례 다녀왔다. 연탄을 실어 나르는 ‘한반도 사랑의 연탄 나누기’ 일에도 두 차례 동참했다. 다녀와서는 2007년 72회 기장여신도회 총회에서 “북한에서 연탄은 난방용이 아니라, 땔감입니다. 산에 나무가 없어 식량이 있어도 밥을 하려면 연탄이 필요합니다. 연탄을 보내야 합니다”라고 호소했다. 이에 많은 기독교인들이 연탄보내기 운동에 동참했다. 기장여신도회 각 연합회는 7차례 더 개성을 오가며 연탄 나누기를 이어갔다.

그밖에도 그가 인권부위원장으로 있던 2002년, 기장여신도회는 ‘평화통일 기도잇기’ 모금운동을 벌여 북에 결핵검진차를 보내기도 했다. 2003년부터 4년 동안은 남북 상호 협력 사업으로 함경도산 황태를 들여와 판매하여 ‘북한 어린이탁아소 건립’을 위한 기금을 마련하기도 했다.

하역 중인 연탄 (자료사진)
하역 중인 연탄 (자료사진)ⓒ뉴시스

윤 위원장은 북한에 다녀온 이야기보따리를 풀어 놓으며 개성시에서 봤던 뜻깊은 장면을 회고하기도 했다. 개성 박연폭포 옆에는 관음사가 하나 있었는데, 그는 이곳에서 “종교의 중요한 역할을 봤다”고 말했다. 절에서 흘러나오는 목탁 소리에 남한 관광객들이 북측 사람들과 함께 기도하는 모습이 그의 눈에 ‘하나’ 된 모습으로 보였던 것이다. 그는 “불교가 이웃종교지만, 자연스럽게 함께 불경을 외는 모습이 참 좋아보였다”며 당시를 떠올렸다. 그렇게 윤 위원장은 통일에 대한 희망을 키웠다고 했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면서 북한과의 왕래는 점차 단절되어 갔다며 아쉬움을 토로했다.

이 외에도 수원다산인권센터 운영위원으로도 활동했던 윤 위원장은 기장여신도회 사업으로 교도소를 방문해 수감자들의 인권문제를 살피기도 했다. “비전향장기수들과 함께했던 시간들은 그분들이 다시 북한으로 건너간 뒤에도 오랫동안 여운으로 남아있다”고 그는 말했다.

지난 20여 년 동안 윤 위원장이 내밀었던 연대의 손은 수없이 많았다. 이토록 열렬하게 사회 곳곳을 찾아다녔던 그였지만, 최근 윤 위원장은 회의감에 젖어 있었다. 기독교에 대한 오해 때문이다. 그는 “정말 민중 같은 기독교가 있는데, 모든 기독교가 문제가 있는 것처럼 비춰질 때면 정말 가슴이 아프다”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한국 기독교는 진보와 보수의 두 가지 성격으로 존재해 왔는데, 어느 한쪽만을 확대해 전체인 것처럼 치부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봐요. 이 부분을 언론과 학계, 시민사회가 유념해줬으면 좋겠어요. 기독교 여성운동과 그 활동가들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평가도 반드시 재정립되었으면 합니다.”

이승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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