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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창의 철학산책] 환상의 빛 - 응시에 유혹된 죽음
영화 '환상의 빛'
영화 '환상의 빛'ⓒ영화포스터

1)
고레에다 히로카스의 영화 ‘환상의 빛’을 보았다. 이 영화는 그가 1995년 발표한 데뷔작이다. 국내에서는 뒤늦게 2016년 개봉되었다. 그때 보고 이번에 함께 영화 보는 모임이 있어 다시 보았다. 소설가 미야모토 테루가 죽은 남편에게 보내는 아내의 편지 형식으로 쓴 중편 소설 ‘환상의 빛’을 원작으로 영화가 만들어졌다. 영화는 토론토 국제 영화제에서 촬영상을 받을 정도로 아름다운 장면으로 가득하다.

카메라의 움직임이 인상적이었다. 이광모 감독의 영화 ‘아름다운 시절’처럼 카메라는 자주 멀리서 주로 역광으로 장시간 인물을 잡는다. 카메라는 이때 인물이 아니라 자연(빛과 바다)에 포커스를 맞춘다. 덕분에 인간의 삶은 자연의 흐름 안에 자그마한 파문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이광모 감독이 자연으로 배경으로 파멸적인 전쟁을 담았듯이 고레에다 감독은 자연을 배경으로 죽음과 상실이라는 철학적 주제를 다루었다.

이야기는 간단하다. 유미코의 전남편 이쿠오는 아이가 태어난 지 3개월쯤 철길을 홀로 걷다 뒤에서 다가오는 전철에 치여 죽었다. 그는 일부로 자살을 택한 듯 기차 다가오는 소리에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한다. 그리고 7년 뒤 유미코는 재혼했다. 재혼한 남편 타미오는 바닷가에 있는 마을에서 일한다. 유미코는 새로운 삶에 어느덧 정들어가지만 마음속에는 여전히 전남편의 죽음에 대한 의문과 상실의 아픔, 자책감 등이 떠나지 않는다.

관객인 우리 역시 영화 끝까지 그의 죽음에 대한 의문을 풀지 못한다. 유미코의 전남편은 왜 자살했을까? 감독은 전남편에 초점을 두기보다 그의 죽음을 견디는 유미코이 삶에 초점을 두고 있다.

영화 '환상의 빛'
영화 '환상의 빛'ⓒ스틸컷

2)
영화는 마지막으로 화창한 봄날을 보여주면서 끝나지만 그 직전 바닷가 장면은 정반대로 침울하다. 이 직전 장면 속에 의문을 풀어줄 단서가 않을까? 나는 이 장면을 몇 번이고 되돌려 보았다. 이 직전 장면을 함께 보자.

화면을 가로질러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검은 암석으로 길이 나있다. 그 왼쪽 끝에 죽은 자의 시체를 태우는 화장의 불꽃이 내는 검은 연기가 길을 더욱 이어 하늘로 뻗어간다. 화면 위엔 바다가 있고 구름이 가득하고 마침내 해가 떨어진다. 어떻게 찍었는지, 바다에 비친 석양은 점차 흰 빛으로 변한다.

타미오가 찾아오자, 유미코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돌아선다. 카메라가 워낙 멀리서 더구나 역광으로 찍고 있으므로 두 주인공의 표정은 드러나지 않는다. 앞의 장면에서 유추해 볼 때 유미코는 검은 머리를 풀어헤친 채, 푸른 수의 같은 옷을 온몸에 칭칭 감고 있을 것이다. 바람이, 아마 세찬 바다 바람이 유미코를 떨게 했을 것이다.

유미코가 울음 섞인 목소리로 “그가 왜 자살했고, 왜 철로 위를 걷고 있었는지” 모르겠다고 말한다. 그러자 타미오가 자기 아버지의 경험을 들어 이렇게 설명한다.

“홀로 바다에 있으면, 저 멀리 아름다운 빛이 보였대. 바다가 부르는 것 같았대. 반짝반짝 빛나면서, 아버지를 끌어당겼대.”

타미오가 말한 것이 ‘환상의 빛’이다. 그 빛은 인간을 죽음으로 끌어들이는 빛이다. 유미코가 타미오를 향해 다가가자 타미오는 뒷걸음으로 물러난다. 유미코와 타미오의 거리는 줄어들지 않는다.

타미오는 유미코와 사라졌다는 것을 알고 사방에서 그녀를 찾았다. 마침내 바닷가에서 유미코를 발견했으니, 타미오는 당연히 다가오는 유미코를 껴안을 것으로 나는 기대했다. 그런데 감독의 생각은 다른 모양이었다.

유미코가 다가가자 이젠 거꾸로 타미오가 마치 그녀를 피하는 듯이 물러났다. 나로서는 이 장면에서 당황했다. 감독은 무슨 생각이었을까? 아마 이런 거리두기를 이해한다면 이 영화를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영화 '환상의 빛'
영화 '환상의 빛'ⓒ스틸컷

3)
몇 번 이 장면을 되돌려 보던 나는 갑자기 프랑스 정신분석학자 라캉의 말이 떠올랐다. 타미오의 말이 라캉의 말과 너무 닮았기 때문이다. 라캉이 어느 날 바닷가로 갔다. 낚시 때문이었던가, 어부의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던 중, 그는 바다 한 가운데서 반짝이는 빛을 보았다. 그는 이런 경험을 바탕으로 해서 응시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응시는 주관의 시선과 구분된다. 응시란 사물이 나를 바라보는 사물의 시선이다. 라캉은 바다 한 가운데 반짝이는 빛이 사물의 응시에 해당되는 것으로 설명했다. 이 사물의 응시를 이론적으로 설명하자면 복잡하다.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그것은 프로이트가 말했던 죽음에의 충동을 의미한다. 죽음의 충동을 느낄 때 주관은 사물이 자기를 바라보는 듯한 응시가 출현한다. 언뜻 이해되지 않으면, 죽음의 충동을 느낄 때 누군가가 자기를 부르는 환청을 듣는다는 말을 생각해보면 된다. 응시 역시 환청과 같은 종류에 속하는 것이다.

라캉의 응시라는 개념을 통한다면, 고레이다가 설명하는 환상의 빛도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나는 이런 관점에서 영화 환상의 빛을 마음속으로 재구성해 보았다. 그렇게 본다면 유미코의 전남편과의 삶과 새 남편과의 삶이 대조적으로 묘사되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전남편 이쿠오와 유미코와의 관계이다. 이쿠오와 유미코는 어릴 때부터 같은 동네에서 마치 오누이처럼 살았고 결혼 후에도 그렇게 산다. 두 사람 사이에 아이는 있지만 두 사람이 육체적으로 접촉하는 장면은 보이지 않는다.

회사에 나가는 이쿠오의 등 뒤를 미소로 바라보는 유미코의 얼굴, 회사를 찾았을 때 유미코가 있는 유리창을 향해 환한 미소를 짓는 이쿠오의 얼굴, 이런 미소는 남녀 또는 부부 사이의 관계를 보여주는 성적인 기쁨과는 구분된다.

이쿠오는 자전거를 도둑맞자 부자동네에서 자전거를 훔쳐왔다. 유미코는 파란 페인트를 사가지고 둘이서 함께 자전거를 색칠한다. 이때 자전거 뒤에 나란히 앉은 두 사람은 정말 오누이처럼 다정하다.

이쿠오와 유미코는 대도시(아마 오사카?)에서 살아왔다. 감독은 이 도시의 파편화된 단편만 보여준다. 자전거를 타고 가는 이쿠오의 등 뒤에서 덮칠 듯 굉음을 던지며 다가오는 전철의 모습, 터널 안쪽에 있는 집, 좁은 골목길, 폐쇄된 공장 등은 이쿠오와 유미코를 두려움에 떨게 하고 두 사람을 더욱 밀접하게 가두어놓는다.

이런 장면들을 검토해 보면, 이쿠오가 자살을 택한 이유는 어렵지 않게 이해된다. 나는 라캉의 이론을 빌려 그것은 죽음의 충동이며 곧 사물의 응시에 유혹된 것이라고 설명하고 싶다. 그 점에서 이 영화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라는 소설과도 이어진다.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에서도 어릴 때 오누이처럼 자란 두 사람이 끝내 육체적 관계를 이루지 못한다. 남자는 자살하고 여자는 정신병원에 갇힌다. 소설 ‘상실의 시대’에서 여주인공과 달리 ‘환상의 빛’의 여주인공 유미코는 폐쇄된 근친상간의 동굴을 탈출한다.

영화 '환상의 빛'
영화 '환상의 빛'ⓒ스틸컷

4)
이쿠오가 죽은 후 7년 뒤 유미코는 재혼했다. 새 남편 타미오가 사는 마을은 한눈에 보기에도 위태로운 곳이다. 거대한 바다가 일렁이고 해변에 바로 직면해서 마을이 있다. 집은 비탈진 언덕에 서 있다. 집 앞에는 파도를 막기 위해 대나무로 방죽을 쌓아놓았다. 백사장조차 비스듬하고 짧다. 나무로 된 집은 언제 파도에 휩쓸릴지 위태롭다.

그 마을에서 두 아이, 유미코의 아이와 타미오의 아이가 손을 잡고 돌아다니는 장면이 있다. 앞에 거론한 장면에서 검은 암석들이 화면을 가로지르듯이 이 장면에서는 논두렁이 화면을 가로지른다. 화면 위에는 바다가 보이고 아래에는 물이 가득 채워진 논이 보인다. 두 아이는 그 사이 논두렁길을 통해 지나간다. 관객은 그 장면을 보면서 아이들이 떨어지지 않을까 위태로움을 느낀다.

타미오가 사는 마을은 어쩌면 우리 삶의 모습과 닮았다. 우리 역시 언제 위험이 닥쳐올지 모르는 세상 속에서 이리저리 흔들리면서 살아간다. 그런데 그런 위험은 전철의 굉음이 덮칠 듯 닥쳐오는 도시에서의 위험과는 다른 느낌이다.

저쪽은 폐쇄적이지만 이쪽엔 무언가 열려진 것이 있다. 그 차이는 마치 전철의 터널을 지나면 하얀 빛 밖에 보이지 않지만 이쪽 기차의 터널을 지나면 영롱한 자연이 있는 차이와 같다. 전철 지나가는 소리와 기차 지나가는 소리, 미싱을 박는 소리와 목재 켜는 소리, 이상하게 차이가 느껴진다.

새로 결혼한 타미오와 유미코의 관계는 이쿠오와 유미코의 관계에서 보이지 않았던 모습이 보인다. 즉 육체적인 접촉이다. 두 사람은 무더운 여름, 팬티만 입고 아이들이 학교서 돌아오는 것을 기다리면서 관계를 맺는다. 이런 육체적 관계는 앞에서 오누이와 같은 다정한 관계와 대비된다.

대도시에서 유미코는 아이를 돌봐주는 이웃 그리고 카페의 친구와 교제하지만, 나머지 세계와는 단절되어 있다. 그런 교제 사이에 유머가 없다. 반면 타미오와 유미코는 주변 마을 사람들과 더 넓게 연결되어 있고 그 관계는 유머가 통하는 관계이다.

특히 마을에서 고기잡이 하는 할머니와의 관계는 특별하다. 어느 폭풍이 치는 밤 할머니는 바다로 게를 잡으러 나간다. 유미코는 할머니를 걱정하며 밤을 새운다. 다행히 다음날 아침 할머니는 강인한 생명의 웃음을 터뜨리며 잡은 게를 유미코에게 건네준다.

이런 식으로 본다면 감독은 삶이란 위태롭지만 공동체적인 관계를 통해서 서로 견디며 살아간다는 철학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라캉이라면 이런 관계를 상징계적인 삶이라 규정했을 것이다.

이 공동체적 삶에서 밀폐되지 않는다. 개인은 서로 어울려 공동체를 이룬다. 여기서 개인은 사라지지 않는다. 유미코가 따라가지만 타미오가 일정한 거리를 남겨두었듯이 꼭 그런 거리만큼 개인은 서로 떨어져 있다.

5)
이번에는 바닷가 장면 바로 앞의 장면을 보자. 그 앞의 장면에서 유미코는 타미오를 기다린다. 타미오는 술에 취해 늦게야 들어왔다. 유미코는 타미오를 거짓말쟁이라 비난한다. 유미코가 마을 할머니한테 들은 것에 따르면 타미오가 이 바다마을로 돌아온 것은 헤어진 전 부인과 재혼하기 위한 것이었다. 유미코는 타미오의 마음에 아직도 전 부인이 남아있는가 의심한다.

타미오는 더는 설명하지 않는다. 그는 단지 유미코가 떠날까 두렵다고만 말한다. 유미코는 강하게 고개를 젓는다. 유미코는 밤새 고민한 것으로 보인다. 유미코는 다음날 마을 정거장에 서 있었다. 버스를 타고 떠나려 했던 것일까? 버스가 떠나자 그녀는 남았다.

그녀는 버스를 타기 직전 타미오의 마음에 전 부인이 있지만 그것은 마치 자기가 이쿠오의 방울 달린 자전거 열쇠를 간직하고 있는 것과 같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리라. 이제 유미코도 타미오를 떠나보낼 때가 되었다. 이어지는 바닷가 장면은 유미코가 이쿠오를 애도하고 떠나보내는 장면이다.

이어지는 장면에서 유미코는 장례식 행렬을 따라간다. 이때 장례식 행렬을 이끄는 스님의 요령 소리는 어릴 때 이쿠오 자전거의 방울 소리를 연상시킨다. 유미코는 말없이 장례 행렬을 따른다. 마침내 화장하는 불꽃과 연기가 솟아오르면 유미코는 자신의 오빠에 해당되는 이쿠오를 애도한다. 애도란 곧 떠나보내는 것을 말한다.

영화 '환상의 빛'
영화 '환상의 빛'ⓒ스틸컷

7)
유미코는 이를 통해 새로운 삶을 택한 것이 아닐까? 이 새로운 삶이란 곧 일정한 거리를 가지고 서로 만나는 공동체로 이루어진 삶이다.

이 삶 속에서 각자는 이미 근본적인 상실, 즉 어머니의 상실을 견디고 살고 있다. 이 상실은 삶의 해체를 의미하지 않는다. 상실은 오히려 욕망을 일으킨다. 라캉은 이런 상실 이후에 충동이 욕망으로 된다고 설명한다. 삶은 그런 것이 아닐까? 누구나 상실을 안고 산다. 어쩌면 상실 때문에 그것을 메우기 위해 우리가 살고 있는지 모른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자연은 화창한 봄날이다. 타미오는 아이들과 개와 함께 해변에서 뛰논다. 타미오의 아버지가 말없이 멀리 바다를 바라본다. 그 옆에 유미코가 섰다. 유미코가 말한다 “화창한 날이예요” 할아버지도 말을 받는다. “정말 화창하구나.” 화창이라는 말의 의미는 서로 다를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서로 어울려 산다.

그리고 유미코의 방에서 멀리 바다가 보인다. 바다 한 가운데는 파도에 부딪히는 작은 바위가 하나 있다. 영화는 그 바위를 바라보면서 끝난다.

이병창 동아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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