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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의 학생운동가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이번 기사에선 학생운동의 시원이라 할 수 있는 3.1운동 당시 학생의 사례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아직도 3.1운동 하면 유관순 열사(이하 유관순)를 떠올리는 이가 많죠. 유관순의 상징성이 너무나 커져서 당시 투쟁을 주도했던 학생지도부나 이외의 인물이 유관순의 그늘에 있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런데 일제감정기동안 사람들은 유관순을 잘 몰랐습니다. 3.1운동 시위횟수는 2,000회가 넘었고 사망자 7,509명에 부상자 15,961명, 체포된 인사가 46,948명이었습니다. 일제의 시위 참여자 추산은 110만 명이었으니 실제 200만 명이 넘었다는 것이 정설입니다. 인구를 감안하면 집안 식구 중 두세 명은 시위에 나선 셈이었습니다. 당시 서대문 형무소에만 수감되었던 여성 독립운동가만 33인이었고, 경남 통영에선 기생 신분이었던 이소선, 정막래가 기생단(妓生團)을 조직해 시위할 정도였으니 그야말로 모든 계층을 초월한 민족항쟁이었습니다. 따라서 당시 사람들이 학생투사로 딱히 유관순만을 특정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때 사람들이 학생운동가에 대한 관심이 없었냐면 그것도 아닙니다. 3.1운동 학생 지도자 중 한 명이었던 김원벽이 출소하는 날 동아일보는 장문의 스케치 기사를 발행했습니다. 요약하면 ‘영웅의 귀환을 맞이하기 위해 경성감옥 앞을 메운 군중이 수천 명이었고 그를 태우기 위해 각 청년단체들이 준비한 승용차가 칠팔 대나 감옥 문전에서 기다렸다’고 보도했습니다. 당시 사람들의 학생 지도자에 대한 관심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해방 후 친일경력자일수록 유관순과 같은 독립열사를 자신의 정체성으로 포장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이화학당(이후 이화중학교)의 교장 신봉조는 친일했던 사람이었습니다. 해방후 자신과 이화학당의 역사성을 홍보할 인물로 유관순을 꼽았고, 이후 유관순 기념사업이 활성화되며 개신교계와 군사독재정권이 내세우는 대표적인 3.1운동 투사로 정립됩니다. ‘삼월 하늘 가만히 우러러보면 유관순 누나가 생각납니다.’로 시작하는 노래 ‘유관순’이 나왔고, 영화로도 나왔습니다.

2015년 교육부 국정교과서 TF가 벌인 유관순 캠페인. 영상 후반부엔  '2014년까지 일부 교과서에는 유관순은 없었습니다. '유관순은 2014년 8종의 교과서 중 2종은 기술이 안되었고, 2종은 사진 없이 이름 등만 언급되었습니다.'라는 자막이 나온다. 아래는 당시 YTN의 보도
2015년 교육부 국정교과서 TF가 벌인 유관순 캠페인. 영상 후반부엔 '2014년까지 일부 교과서에는 유관순은 없었습니다. '유관순은 2014년 8종의 교과서 중 2종은 기술이 안되었고, 2종은 사진 없이 이름 등만 언급되었습니다.'라는 자막이 나온다. 아래는 당시 YTN의 보도ⓒ교육부 유투브 영상, YTN 화면

뼛속까지 일본군이었던 박정희를 비롯해 이후 독재자들 모두 항일위인을 내세워 정권의 정통성을 내세웠습니다. 70년대는 이순신과 논개, 유관순과 이승복 어린이, 맥아더 장군의 시대였습니다. 2015년 교육부가 국정교과서를 밀어붙이기 위해 내건 홍보 동영상의 카피는 ‘나는 유관순을 모릅니다’였습니다. 아이들이 잘못된 교과서로 인해 유관순열사도 모르고 자란다는 내용이죠. 조악한 위안부 협정을 맺었던 박근혜 정권 역시 유관순을 정치적 아이콘으로 활용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는데 바로 ‘유관순의 역설’이 있습니다.

한 위인을 추념하거나 내세울 때 사료가 부족하면 과장과 가공이 들어갑니다. 유관순의 신심이 천안의 민족 지도자들을 부끄럽게 만들어 유관순이 지도력을 행사했다거나, 옥사 후 일제가 그의 시신이 독립운동의 구심이 될까 두려워 일곱 토막으로 훼손했다는 등의 주장이 그것입니다. 굳이 이런 가공이 없어도 유관순 열사는 장엄한 민족사에 붉은 피를 뿌린 아름다운 청년이었습니다.

천도교, 기독교, 학생. 이 3대 세력이 3.1운동을 주도했습니다. 정당과 사회단체가 모두 해산되었으니, 조직을 가진 세력은 오직 종교계와 학생그룹이었겠죠. 학생들은 각국 영사관에 『독립선언서』를 전달하고 전국 각지에 『조선독립신문』을 전달하는 임무와 함께 군중 동원을 책임졌습니다.

3월 1일 민족대표 33인이 태화관에서 따로 모이기로 결정하면서 종교지도자들과 학생 사이에는 불협화음이 발생합니다. 약속 시간인 정오에 민족대표들이 나오지 않았고, 탑골공원의 군중은 한 시간 반가량이나 민족대표들을 기다렸습니다. 기다리다 못한 강기덕, 김원벽 등의 학생대표가 태화관으로 몰려가 격하게 항의하며 탑골공원으로 가자고 합니다. 사전에 종교인들과 학생 사이의 연락을 담당했던 이갑성이 강기덕에게 28일 밤 민족대표들이 모이는 장소가 태화관으로 변경되었다고 알렸다는 얘기가 있지만, 이러한 사실이 학생들에게 제대로 전달된 것 같지는 않습니다.

3월 1일, 봇물같이 터진 수만 군중의 함성이 탑골공원 인근을 삼켰고 3월 5일 남대문 광장에서 학생지도부였던 강기덕, 김원벽이 인력거를 타고 대오를 지휘합니다.일경이 무리지어 추격하면 인파 속으로 숨거나 골목을 질주하며 행진을 독려했습니다. 당시 기사를 보면 인력거는 숨 가쁘게 질주했지만 학생지도부는 거사 후 잠수를 고려한 것 같지 않습니다. 김원벽은 경찰의 몽둥이를 맞아 쇄골이 부러지며 체포되었습니다.

지금의 관점에서 보면 ‘기자회견 및 고발장 접수’ 수준으로 그칠 수 있는 투쟁을 전국적인 만세항쟁으로 이끈 세력이 바로 학생이었습니다. 학생들은 애초 시위가 일회성으로 그칠 것을 우려해 3월 1일, 5일을 거사일로 정하고 학생 지휘부도 2선까지 꾸려놓았습니다. 1선이 체포되면 2선이 맡아 거리 시위를 이어간다는 계획이었습니다.

전면에 나선 이들이 전문대학생이었고, 학생들은 자신의 출신 고등보통학교(오늘의 중고등학교) 후배를 조직했고, 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은 읍내 소학교 학생을 조직했습니다. 당시 전문대학은 지금과는 차이가 있지만 일제의 조선교육령(朝鮮敎育令)에 따라 만들어진 당시의 대학입니다.

3.1 운동 학생운동 지도자들이다. 좌측부터 강기덕, 김원벽, 한위건
3.1 운동 학생운동 지도자들이다. 좌측부터 강기덕, 김원벽, 한위건ⓒ구글

1919년 당시 조선의 전문대학생은 585명에 불과했으나 이들의 영향력은 매우 컸습니다. 서울 시위를 마친 학생들은 전국적 확산을 위해 고향으로 돌아가 만세시위를 주도합니다. 만세시위는 읍·면 단위 마을의 경합과도 같았습니다. 다른 마을에서 시위가 났다는 소식을 들으면 우리 마을에선 더 크고 세게 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고, 특히 성씨가 모여 살았던 집성촌의 경우 ‘애국심 경쟁’은 문중의 대사였습니다. 문중 어른이 나서면 죄다 따라 나섰습니다. (2014년, 세월호 참사로 서울에서 촛불시위가 일자 전남 광주에선 보란 듯이 횃불 시위를 한 적 있죠.) 가족 친지가 모두 나섰기에 지방에선 식구 중 두 어명이 모두 사망하거나 투옥되는 일도 많았습니다.

보성법률상업학교의 강기덕, 연희전문학교 김원벽, 경성의학전문학교 한위건 이렇게 3명이 학생그룹의 시위를 주도했습니다. 경성공업전문대의 김대우 역시 학생대표였으나 그는 체포와 동시 투항하여 변절합니다. 강기덕은 옥고를 치른 후 원산에서 노동운동 지도자로 투쟁했고, 김원벽은 『신생활』,『시대일보』에 몸담으며 언론운동을 했습니다. 한위건은 이후 조선공산당의 핵심 간부로 활동했습니다. 옆 갈래로 조금 가면 한위건 이야기에 김산이 빠질 수 없습니다.

님웨일즈와 김산의 공저『아리랑(Song of Ariran)』에 그들의 기구한 인연이 나옵니다. 조선공산당이 궤멸되자 한위건은 중공 베이징지부를 찾아 입당 청원합니다. 이때 한위건에게 ‘조직을 얼마나 엉망으로 꾸렸으면 일망타진 당하고 또 너만 살아서 왔냐’며 입당을 반대한 사람이 중공 간부가 김산이었고, 이후 김산이 일제에 체포된 후 석방되자 ‘변절자’라는 굴레를 씌운 이가 한위건이었습니다.

배재학당을 다니던 학생 김동혁의 기록이 흥미롭습니다. 김동혁이 일제에 검거될 때 발각된 한 통의 편지가 남아있습니다.

독립을 열망하는 청년의 순수함과 완벽히 훈련되지 않은 운동가로서의 순박함을 동시에 느낄 수 있다.
독립을 열망하는 청년의 순수함과 완벽히 훈련되지 않은 운동가로서의 순박함을 동시에 느낄 수 있다.ⓒ민중의소리

편지엔 독립을 향한 청년으로서의 포부가 담겨있지만, 보안에는 치명적인 실수를 했지요. 임무와 실행은 물론, 동선까지 적었습니다. 자기 행위가 ‘비밀(불법)’이라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고 숙부에게 사전에 ‘범행계획(?)’을 알렸다는 것까지 적어 거의 ‘자백’의 수준이라고나 할까요. 일제 경찰의 간교함에 대비하면 매우 순박합니다.

김동혁은 배재학당을 다녔고 당시 19살이었다.
김동혁은 배재학당을 다녔고 당시 19살이었다.ⓒ국가기록원

당시 지하신문이었던『조선독립신문』의 제작·배포과정도 흥미롭습니다. 사망자와 구속자가 속출하던 때였지만 신문의 발행인을 명시했고, 발행인이 투옥되면 2선이, 2선이 투옥되면 3선, 4선이 맡아 신문을 제작했습니다. 『조선독립신문』이 안보이면 약속이라도 한 듯 누군가는 다음 순서를 짐작해 신문을 발행했습니다. 무려 27호까지 발행되었습니다. 1호는 이종일, 윤익선 등의 40대 활동가가 했지만 이후엔 많은 학생들이 이어받습니다.

조선독립신문의 발행인이 검거되면 사람들은 약속이나 한듯 뒤를 이어 발행해 27까지 나왔다.
조선독립신문의 발행인이 검거되면 사람들은 약속이나 한듯 뒤를 이어 발행해 27까지 나왔다.ⓒ구글

경성공업전문학교 2년생 양재순은 『각성호』라는 이름으로 신문을 만들어 배포했는데 한 점씩 박아 넣은 문구가 인상적입니다.


“조국에 사는 자, 조국을 사랑하라. 자기의 천부인 자유를 타인에게 양도하고 노예가 되는 자는 멸망이 있을 뿐”

“2천만 동포의 심과 3천리 강산을 가진 우리 민족은 맨손임을 걱정 말라. 철함 대포는 각자의 마음에 있다.”

양재순의 수형카드
양재순의 수형카드ⓒ국가기록원

우리나라 학생운동은 이런 순수한 용기와 결단으로 시작되었고, 이때 얻은 경험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10년 뒤 광주학생항일운동(광주학생의거)에서 재현되었고 이후 4.19와 80년 광주, 6.10 항쟁으로 이어졌습니다. 이렇게 한국의 청년은 시대의 등불이었습니다.

국가기록원과 국가보훈처는 독립운동 관련 판결문을 올려놓았는데, 위에 언급한 이들의 판결문이 원문 또는 번역본의 형태로 있습니다. 원문은 선고내용만 있지만, 번역본의 경우 판결문 전문이 기록되어 있어 일제가 이들을 어떤 시각에서 보았는지를 생생히 느낄 수 있습니다.

국가기록원 독립운동관련 판결문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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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영재 이산아카데미 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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