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보기
댓글보기
[서정민갑의 수요뮤직] 재즈로 표현한 신자유주의와 사회주의, 들어보셨나요?
정수민 1집 ‘Neoliberalism’
정수민 1집 ‘Neoliberalism’ⓒ정수민

창작자의 창작의도를 감상자가 다 알아차리지는 못한다. 창작자가 제대로 표현하지 못해서 일수도 있고, 감상자가 온전히 이해하지 못해서 일수도 있다. 창작자는 달을 가리키고 있는데, 감상자는 손가락에 낀 반지만 바라볼 수도 있고, 달을 가리킨다고 했는데 허공만 짚고 있을 수도 있다. 그래서 어떤 창작자는 부러 쉽게, 혹은 선명하게 작품을 만들기도 한다. 오해의 여지를 줄이고, 최대한 많은 이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가능한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을 수 있도록. 음악에서 노랫말을 사용하는 이유도 표현의 정확성을 높이고 대중성을 강화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반대로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열어놓는 경우들도 적지 않다. 사람은 어디에 서 있는지에 따라 태도와 생각이 다르고, 다양한 측면에서 해석함으로써 시선을 확장하는 것이 작품의 의도일 수 있다.

그러나 작품은 발표하는 순간 작가의 손을 떠난다. 작품을 감상하는 일은 항상 개별 감상자들의 이해와 곡해를 동반한다. 작품을 감상하는 일은 이해와 곡해 사이에서 서성이고 헤메이고 주저앉고 영영 돌아가지 못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 과정에서 자신의 삶이 끼어들고, 취향이 나대고, 젠더와 세대와 계급과 지역과 이데올로기가 눈을 가렸다가 틔우기를 서슴치 않는다. 그래서 항상 감상자는 자신만큼만 본다. 아는만큼 보는 게 아니라 딱 자신만큼 본다.

정수민 1집 ‘Neoliberalism’
정수민 1집 ‘Neoliberalism’ⓒ정수민

‘신자유주의’에 대한 각자의 인상과 판단 ‘Neoliberalism’

그 이유로 예술에서는 말하기 어려운 거대담론이나 철학을 곧장 예술의 소재로 삼지 않는 편이다. 대신 객관적 상관물을 빌어 말하게 한다. 계급을 말하기 위해 부르주아와 민중을 형상화하고, 젠더를 말하기 위해 남성과 여성과 간성의 삶을 보여주는 방식이다. 그러나 재즈 베이시스트 정수민은 다르다. 그가 3월 28일 발표한 자신의 첫 리더작 음반 제목은 ‘Neoliberalism’. 바로 신자유주의다. 신자유주의. 자본권력의 절대화를 위해 자본권력이 1970년대부터 내놓은 이론체계로 현재까지 여전히 세계를 장악하고 있는 후기 자본주의의 작동방식. 좌파들에게는 분노의 근원이고, 우파들에게는 맹신의 대상인 신자유주의는 경제학자들뿐 아니라 인문사회과학과 예술, 정치 영역에서 여전한 연구와 창작, 정책의 원동력이다. 하지만 신자유주의 자체를 예술 창작의 대상으로 삼는 경우는 드물다. 예술 언어는 인문사회과학 언어와 다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재즈 베이시스트 정수민은 과감하게 신자유주의를 음반의 타이틀로 정하고, ‘Neoliberalism’을 주제로 한 곡을 두 곡이나 담았다. 게다가 또 다른 수록곡은 ‘Sociallism’, 사회주의이다. 이쯤 되면 그가 신자유주의를 비판하고, 사회주의를 찬양하는 좌파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그가 내놓은 음반의 수록곡들은 모두 재즈 연주곡이다. 노랫말은 없고 피아노와 드럼, 베이스가 연주한 피아노 트리오 곡이다. 우리가 들을 수 있는 것은 멜로디와 리듬, 앙상블과 즉흥 연주가 구현한 사운드뿐. 물론 그가 최근 젠트리피케이션 현장에 연대하고 있다는 사실과, 어떤 현장을 보고 곡을 썼는지 설명을 듣는다면 음악을 좀 더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겠지만 이는 모두 작품 바깥의 해설일 뿐이다. 지금은 오직 작품이 직접 말하고 있는 이야기에만 귀 기울여야 한다.

정수민이 음반에 담은 다섯 곡의 음악에서 일관되게 구현하는 정서는 쓸쓸함이다. 이 음반에는 신자유주의의 작동원리와 형성 과정, 사회주의의 철학적 기반이나 역사적 정당성 같은 이론은 없다. 그 사회과학적 인식을 노랫말도 없는 연주만으로 어떻게 표현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예술의 몫이 아니다. 물론 어떤 작품들은 그 역할을 기꺼이 담당하기도 하지만 정수민의 시선은 다른 쪽을 향한다. 그가 보고 있는 것은 신자유주의가 휩쓸어버린 세계의 폐허와 공허, 그리고 사회주의의 정서적 원형이나 무너진 현실이 야기한 패배감과 상실감에 더 가까워보인다. 그렇게 추론하는 이유는 수록곡들이 대체로 느리고 비어 있으며 쓸쓸한 연주를 이어가기 때문이다. 음반의 첫 곡인 ‘Neoliberalism 1’에서 이선지의 피아노와 정수민의 베이스, 박정환의 드럼은 숨죽인 즉흥 인터플레이를 이어가며 어둠 속에서 더듬거리듯 조심조심 나아간다. 이것이 신자유주의가 파괴해버린 세계의 초상이며, 그 세계를 살아가는 이들의 암울한 내면이라고 해석할 수 있을 것 같은 곡임에도 명확한 정답은 없다. 그러므로 듣는 이들이 각자 경험하고 느끼고 생각하는 신자유주의에 대한 판단과 경험이 곡을 만나면서 각자의 인상과 판단으로 이어질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이들은 왜 이렇게 음울한 정서를 드러냈는지 의아해 할 수 있고, 어떤 이들은 신자유주의에 대한 저항과 해방 의지를 명쾌하게 느낄 수 없다고 비판할 수 있다.

그러나 ‘Neoliberalism 2’에서 구현하는 쓸쓸한 베이스 연주와 피아노 멜로디의 서정성은 첫 곡에서처럼 신자유주의에 대한 서로 다른 가치 판단과 모호함을 뛰어넘을 만큼 아름답다. 정수민이 이 쓸쓸한 서정으로 말하려는 것이 최소한 신자유주의의 장점이 아니라는 사실을 모를 수는 없다. 정수민은 자신의 작곡과 연주를 통해 신자유주의가 초래한 비극성을 섬세한 음악으로 표출해냈고, 이 곡의 밀도와 완성도만큼은 부정할 수 없게 했다. 이 곡에 다른 이름을 붙인다 해도 얼마든지 공감할 수 있을만큼 곡은 완성도가 높다. 정수민은 곡의 아름다움으로 신자유주의를 말하는 자신만의 방식에 설득력과 차이를 부여함으로써 예술의 언어가 인문사회정치 언어와 어떻게 다른지 확연하게 보여주었다. 또한 그는 예술의 역할 가운데 세계와 인간의 본질과 변화를 기록하고 탐구하는 역할 가운데 아직 채워지지 않은 틈을 채워 넣었다.

정수민 1집 ‘Neoliberalism’
정수민 1집 ‘Neoliberalism’ⓒ정수민

사회주의에 대한 자신만의 이야기를 하는 ‘Sociallism’

음반의 표지인 강남 구룡마을을 노래한 것으로 보이는 곡 ‘강남 478’에서도 섬세한 아름다움은 이어진다. 이 곡에서 도시 빈민의 삶 그 처절함과 궁핍함. 그들을 내쫓는 자본과 국가 권력의 악랄함을 감지하기는 어렵다. 대신 제목을 모르고 들었을 때도 쉽게 느낄 수 있는 따뜻함과 아름다움은 좋은 피아노 트리오 곡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게 할 뿐 아니라, 제목을 알고 들을 때 정수민이 강남 478에서 무엇을 보고 있는지 추정하게 한다. 그는 그 곳의 가난하지만 소중했던 삶들의 가치, 그리고 그 곳에 쌓였던 추억과 우정과 환대를 표현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남들에게는 보잘 것 없어 보이지만 누구도 함부로 할 수 없는 소중한 삶들이 지켜지지 못하고 사라진 것이다. 그는 분노와 안타까움 대신 그 곳에 깃들었을 눈물겹게 아름다운 마음들을 건져올림으로써 역으로 그들을 쫓아내는 현실의 비정함을 묵묵히 고발한다. 이것이 신자유주의가 짓밟은 현실이고, 지금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그러나 정수민이 그 해법과 대안을 사회주의에서 찾고 있는지는 모호하다. ‘Sociallism 1’과 ‘Sociallism 2’로 이어지는 곡들 역시 연주곡으로 가사가 없는데다 앞 곡들이 품고 있는 쓸쓸한 정서를 계속 이어가기 때문이다. ‘Sociallism 2’에서는 드럼이 훨씬 역동적으로 펼쳐지지만 피아노와 베이스 연주는 서늘한 차분함을 유지한다. 이 곡들이 실패한 것처럼 보이는 사회주의에 대한 그리움과 안타까움을 노래한 것인지, 사회주의가 지향하는 이상적 인간애를 표현하려고 했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각자의 판단과 성향에 따라 다른 해석이 가능한 곡은 이번에도 어느 쪽이든 설득력을 발휘할 만큼 아름답다. 그 아름다움은 사회주의라는 금기의 이념에 대한 신념과 반발, 회의 어느 쪽에도 서지 않고 자신만의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정수민의 태도에 예술적 개성과 정당성을 부여한다. 정수민이 그렇게 함으로써 비로소 이념에 대한 표현의 천편일률적인 전형성에서 벗어나 새로운 가능성 하나가 늘어난다.

이러한 가능성이 음악에서 특히 재즈에서 나왔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한국의 재즈가 현실 참여적이었다거나 혹은 그 반대였다는 사실을 지적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랜 역사 속에서 이어지면서 풍부해지고 있는 한국 재즈계에 갑자기 툭 튀어나온 것처럼 보이는 정수민의 음악은 어떤 현실도 음악으로 껴안을 수 있고, 누군가는 현실을 물고 늘어짐으로써 예술의 역할 중 하나를 끝내 외면하지 않고 있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지금 로두스에서 뛰고 있는 음악들에 정수민의 음악이 더해진 것이다. 게다가 아름다운 음악을 당장 듣지 않을 이유가 없다.

서정민갑 대중음악의견가

기자를 응원해주세요

기사 잘 보셨나요? 독자님의 작은 응원이 기자에게 큰 힘이 됩니다. 독자님의 후원금은 모두 기자에게 전달됩니다.

이시각 주요기사

카카오톡 카카오스토리 카카오스토리2
닫기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