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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 사망 신고도 못했어요” 4년간 팽목항을 지킨 아버지

세월호 참사 후 4번째 봄이 다가옵니다. ‘눈물의 팽목항’, ‘광장의 노란 리본 물결’, ‘물 위로 올라온 찢겨진 선체’··· 지난 4년의 시간이 주마등처럼 스쳐갑니다. 돌이켜보면 지난 4년은 ‘분노’와 ‘눈물’, ‘기다림’, ‘약속’과 ‘다짐’의 시간이었습니다. 이런 조각을 모아 ‘세월호 4년, 다시 봄’이란 이야기로 묶어봅니다.

[① | ‘세월호 마지막 생존자’의 증언]
[② | 팽목항을 지키는 사람들]
[③ | 유족에게 보내는 편지]
[④ | 세월호, 진실을 세우다]
[⑤ | 안산의 봄]
[⑥ | ‘4.16세대’의 약속]

단원고 2-8반 고(故) 고우재군의 아버지인 고영환(51)씨가 팽목분향소에서 아이들의 영정사진을 바라보는 모습.
단원고 2-8반 고(故) 고우재군의 아버지인 고영환(51)씨가 팽목분향소에서 아이들의 영정사진을 바라보는 모습.ⓒ민중의소리

전남 진도군 팽목항에서 '네 번째 봄'을 맞는 아버지가 있다. 노란 리본을 가슴에 새긴 채 바다를 비추는 붉은 등대처럼 아버지는 팽목항을 지키고 있다. 304명의 목숨을 빼앗은 참사가 일어난 곳에서 가장 가까운 항구에서 사는 단원고 2학년8반 고(故) 고우재 군의 아버지인 고영환(51) 씨를 5일 오후에 만났다.

"팽목항은 우재가 살아서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밤을 지새워던 곳이에요. 그리고 2014년 4월 20일 우재가 왔어요. 이곳이 사라져서는 안 돼요. 기억 속에서 잊혀지지 않았으면 합니다." '기다림의 바다'는 4년이 흐른 후 아버지의 삶의 잊을 수 없는 '기억의 바다'가 됐다. 아버지는 세월호 참사의 기억을 간직한 이곳을 지키고 싶었다.

팽목으로 가는 길에 흐드러지게 핀 벚꽃, 봄은 찾아왔지만 아버지는 아들이 갇혀있던 차가운 바다, 꽃 피우지 못한 아이들의 '봄'을 떠올린다.

쓸쓸한 팽목 분향소, 아버지는 4년간 '상중'

전남 진도 팽목항에 위치한 세월호 분향소의 모습
전남 진도 팽목항에 위치한 세월호 분향소의 모습ⓒ민중의소리

아버지에게 4년의 세월은 흐르지 않고 멈춰있었다. 아들의 죽음에 대한 '진실규명'과 '책임자 처벌'되지 않은 현재까지 아버지는 삼년상을 지나 4년간 '상중'이다.

'팽목 분향소'라는 팻말 아래 아직 돌아오지 못한 미수습자들의 사진들이 현수막으로 걸려있었다. 조심스럽게 분향소 안으로 들어갔다. 세월호 가족과 시민들이 다녀간 흔적이 곳곳에 가득했다. 방명록에는 '잊지 않겠습니다', '기억하겠습니다', '미안합니다' 등의 글귀가 적혀있었다. 세월호 인양 후 발길이 뜸해졌지만, 서울에서만 5시간이 넘는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찾아온 시민들도 있었다.

고씨는 분향소에 놓인 영정 옆에 툭 튀어나온 명패를 밀어 넣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가끔 생일이었던 아이들 명패가 이렇게 튀어나와요. 한 번 봐달라는 것처럼. 얘가 어제 생일이었거든요. 미안해 죽겠네..."

"올해 우재가 22살이네요" 분향소 안에서 단원고 학생들의 영정사진을 지긋이 보던 고영환 씨의 눈가에는 금세 눈물이 고였다. "나중에 하늘에 가서 만나면 내가 우재한테 했던 거랑 똑같이 당할 거 같아. 하늘에선 우재가 고참이잖아."

영정 사진 앞에는 우재 아버지가 나무를 깎아 만든 조각물이 놓여있었다. "혹 섭섭해할까봐 다른 반부터 먼저 만들었는데, 우재가 있는 2학년 8반은 아직 못 만들었어요" 분향소에 놓인 물건들을 다시 가지런히 놓은 후 아버지는 밖으로 나갔다.

단원고 2-8반 고(故) 고우재군의 아버지인 고영환(51)씨가 각 반마다 만든 조각들
단원고 2-8반 고(故) 고우재군의 아버지인 고영환(51)씨가 각 반마다 만든 조각들ⓒ민중의소리

아들 '사망신고'도 할 수 없었던 아버지

분향소를 나오자 진돗개인 '팽'이와 '목'이가 우재 아버지를 보자 꼬리를 흔들며 껑충껑충 뛰며 반갑게 맞이했다.

우재 아버지는 '세월호 가족식당'이라는 팻말이 붙여진 컨테이너로 안내했다. 자갈 위에 지어진 컨테이너 박스는 밧줄로 땅에 고정시킨 상태였다. "컨데이너라서 바람이 불면 옆으로 막 돌아가요" 이 곳은 아버지가 머무는 곳이다. 컨테이너 안으로 들어서 문을 닫자 '휘잉-'하고 거센 바람 소리가 들렸다. 아버지는 지난 겨울 난로 하나로 버텼다고 말했다.

"우재가 주검으로 돌아오던 날, 갓 목욕하고 나온 얼굴이었어요. 그때 심폐소생술이라도 해보라고 소리쳤죠. 방금 죽은 모습같았으니까." 아버지는 가족들 품으로 돌아온 우재의 마지막 모습을 다시 떠올렸다.

"우재 사망신고를 하지 못했어요..." 아들이 어떻게 죽었는지 그 원인이 아직도 밝혀지지 않았기에 아버지는 아이를 보낼 수는 없었다. "아이가 어떻게 죽었는지 밝히고, 끝까지 책임을 묻고 죗값을 받게 할 거예요. 그래야 우리 아이들과 우재를 보낼 수 있으니까요."

세월호 참사 이후 정부는 가족들에게 '기다리라'고만 얘기했다. "4년 전 그때로 돌아간다면 마냥 기다리지는 않았을 것 같아요." 우재 아버지는 4년동안 가만히 있으면 아무 것도 바뀌지 않는다는 걸 온몸으로 느꼈다.

이제 겨우 박근혜의 거짓말이 드러났을 뿐이었다. "제일 무서웠던 게 그거였어요. 배에 문제가 생기든, 사고에 의해서도 아니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 상태에서 애들을 죽인 거라면 억울해서 못살 거 같더라고요. 그런데 그게 현실이 됐어요."

아버지는 나비 모양 나무 조각 안에 그려진 리본에 노란 물감을 색칠했다. 2015년부터 2만 개도 넘는 목걸이를 만들었다. "시간이 안 가니까 만들기 시작한 거죠."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 하루에 담배 두세 갑을 필 정도로 아버지의 가슴은 여전히 까맣게 타들어 가고 있다. "당시 참사 이후에 상황이 꿈에 계속 나타나면 미쳐요. 꿈에서 딱 깨면 그때부터 잠을 못 자는 거예요."

단원고 2-8반 고(故) 고우재군의 아버지인 고영환(51)씨가 자신이 머물고 있는 세월호 가족식당에서 나비모양의 나무 조각에 물감을 칠하는 모습
단원고 2-8반 고(故) 고우재군의 아버지인 고영환(51)씨가 자신이 머물고 있는 세월호 가족식당에서 나비모양의 나무 조각에 물감을 칠하는 모습ⓒ민중의소리

'슬픈 팽목항'이 아니라 '기억의 공간'으로

팽목항의 거센 바닷 바람에 자꾸 등이 떠밀려 걸음이 빨라졌다. 아버지는 "오늘은 바람이 약한 편이에요. 서 있었는데 걷게 된다니까요." 붉은 등대로 가는 '팽목바람길' 난간에 매달린 풍경 소리는 울음 소리로 변했다. 때가 탄 노란리본들도 봄을 알리는 개나리처럼 한 데 엉켜 바람에 나부끼고 있었다.

빨간 등대로 향하는 길에는 잠시 앉아 세월호의 희생자들을 떠올리는 '기억의 의자'가 있었다. 길을 따라서 쭉 늘어진 '기억의 벽'에는 전국 26개 지역의 어린이와 시민들이 그린 타일 4656장이 붙어있었다. 세월호와 편지, 리본 모양의 조각들은 염분 섞인 바닷바람에 녹이 슬어있었다.

팽목항 바람길 맞은 편 수풀 속에는 '국민해양안전관 건립부지' 팻말이 서 있었다. 우재 아버지는 "세월호가 해양 안전사고인가요? 전 '참살'이라고 생각해요. 해양안전관이 언제 지어질지 모르겠어요"라고 말하며 한숨을 내뱉었다.

"진도가 슬픈 지역이 됐잖아요. 앞으로는 시민들에게 좋은 기억을 주기 위해 섬을 잇는 둘레길을 만들었어요" 아버지는 기억과 상생의 도보여행길을 준비하고 있다. 아버지는 세월호 4주기를 앞두고 오는 14일 팽목항에서부터 12km, 약 3시 30분이 걸리는 길을 시민들과 함께 걷는다.

전남 진도 팽목항 방파제에 있는 붉은 등대
전남 진도 팽목항 방파제에 있는 붉은 등대ⓒ민중의소리
진도 팽목항 인근에 있는 국민해양안전관 건립부지의 모습
진도 팽목항 인근에 있는 국민해양안전관 건립부지의 모습ⓒ민중의소리

'기억의 공원' 놓인 고(故) 김관홍 잠수사와 304 그루의 나무

"관홍이 보고 가셔야지..." 아버지는 팽목항에서 차를 타고 얼마 가지 않아 '기억의 공원'에서 내렸다. 세월호 희생자 수습 작업을 한 후 후유증으로 목숨을 잃은 고(故) 김관홍 잠수사의 조각상이 있는 곳으로 안내했다. 동백꽃이 핀 '기억의 숲' 속에 노란 리본을 손으로 쥐고 있는 김관홍 잠수사의 조각상을 볼 수 있었다. 우재 아버지는 김관홍 잠수사 조각상 목에 걸어준 리본 목걸이를 매만지며 "다른 거로 바꿔줘야겠다"고 중얼거린다.

김관홍 잠수사 조각상 세월호 희생자 304명을 의미하는 304그루의 '기억의 나무'가 있었다. "관리를 제대로 하고 있는 지 모르겠어요. 나무 목조르는 것처럼 꽉 묶어놔서..." 앙상하게 마른 나무는 밧줄에 꽉 묶인 채 서 바람을 버티고 서있었다. 아버지는 우재군의 나무 쪽으로 안내했다.

5일 오후 단원고 희생자 우재군의 아버지인 고영환씨가 김관홍 잠수사 조각상을 살펴보고 있는 모습.
5일 오후 단원고 희생자 우재군의 아버지인 고영환씨가 김관홍 잠수사 조각상을 살펴보고 있는 모습.ⓒ민중의소리
기억의 공원에 있는 304그루의 나무의 모습
기억의 공원에 있는 304그루의 나무의 모습ⓒ민중의소리

고민 끝에 '우재는 어떤 아들이었나요?'라고 물었다. "속 한번 썩인 적 없는 착한 아이였어요. 어릴 때부터 로봇을 너무 좋아해서, 마트가면 여동생하고 짜서 로봇을 들고 튀어요. 그럼 어쩔 수 없이 사줘야지. 그때 왜 많이 안 사줬나 몰라."

"우재가 손으로 만드는 걸 참 좋아했어요. 단원고에서도 로봇동아리를 했어요. 고등학교 갈 때 아빠처럼 엔지니어가 되고 싶다고 전자과를 간다고 했는데 말렸죠. 그때 전자과를 보낼 걸 그랬어요 그럼 단원고 안 갔을 거 같아..."

아들에 대한 그리움은 아버지의 차 안 곳곳에서 드러났다. "우재가 사진 찍는 걸 안 좋아해서 사진이 별로 없어요" 운전대 바로 앞에 달린 우재의 사진. 아버지는 우재의 사진을 압화로 만들어서 목걸이로 만들었다.

노란 리본을 따라가는 아버지

"1년 후에 다시 회사로 돌아갔는데 돈 벌면 뭐하나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우재 아버지는 참사 이후 1년동안 노란 리본을 차에 실고 세월호를 알리기 위해 전국을 돌아다녔다. "세월호를 알리고 싶어요. 사람들이 ‘세월호 뭐?’이러니까 미쳐버리겠더라고요. 세월호를 모르더라고요. ‘진짜 남의 나라인가’라는 생각하면서 괴로웠어요" 회사를 나온 아버지는 세월호 진실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위해 거리 위에서 싸웠다

차를 운전하던 아버지의 눈에 들어온 노란리본, 앞 차에 뒤쪽에는 '기억할게'라는 글귀와 함께 노란리본 스티커가 붙여져 있었다. 고씨는 "누구지? 저렇게 글씨 달고 다니는 차량이 별로 없는데..."라고 혼잣말했다.

아버지는 노란리본을 쫓아 도로를 달렸다. "노란리본을 누군가가 달고 있으면 저도 모르게 쫓아가요. 차 타고 다니다가 노란리본이 붙여진 차를 보면 그 차를 쫓아서 가고 있어요. 다른 건 안보이고, 리본만 계속 보고가요. '저 차가 어디서 온 차인데, 노란리본을 달고 다니지? 대단한 사람이네' 고마운 마음이 들어요. 한참 가다보면 길을 잘못 들어 있더라고요." 노란리본은 아들을 가슴에 묻은 아버지를 끌어당겼다.

▶관련기사:[세월호 4년, 다시 봄 ①] 세월호 생존자가 말하는 ‘박근혜의 거짓말’

단원고 2-8반 고(故) 고우재군의 아버지인 고영환(51)씨가 작업 중인 리본 조각들.
단원고 2-8반 고(故) 고우재군의 아버지인 고영환(51)씨가 작업 중인 리본 조각들.ⓒ민중의소리

양아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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