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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민보] “내 고향은요…” 북녘에 고향을 둔 실향민들의 추억, 향수로 재현해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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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 이야기 좀 들려달라'는 질문에 85세 이재순 할머니는 어렸을 적 오빠가 꺾어준 해당화향을 떠올렸다. 할머니의 고향은 함경남시 흥남시 유정리. "'흥남부두'로 유명한 곳 아느냐"며 할머니는 노래 한 소절 흥얼거렸다.

할머니가 해당화 한 두송이를 꺾으려고 할 때마다, 할머니의 오빠는 가시에 찔릴까 매번 자신이 꺾어준다고 했다. 새빨간 해당화 냄새와 그 옆의 바닷물과 모래사장 냄새만으로 어렴풋이 남아있는 그 고향. 이재순 할머니는 오빠를 떠올리다 '오빠생각'이라는 노래를 나즈막이 한 곡 더 불렀다.

94세 이주경 할아버지는 고향을 산딸기 향으로 기억한다. 누가 심지도 않았는데 "대추알만한 산딸기"가 주렁주렁 달린 고향. 새콤한 딸기를 한 바가지 따면서 놀다가 저녁에는 가족들과 그 산딸기를 함께 나눠 먹었다. 이주경 할아버지는 아직도 딸기를 보면 고향 생각을 한다.

대동강변에서 살던 98세 김형석 할아버지는 학교 가던 길 소나무가 쭉 늘어져 있던 그 골목을 떠올렸고, 쌀이 귀한 평안도가 고향인 97세 김혁 할아버지는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면 형제들과 옥수수를 구워 먹던 추억을 생각했다. 산 좋고 물 좋은 황해도 해주에 살았던 97세 송용순 할머니는 고향의 모습들을 하나하나 돌아보며 영단포 바닷물의 바다냄새를 이야기했다.

"추억은 많지만 이제는 가물가물해. 고향길도 다 잊어버려서 모를 것 같아"라고 말은 하지만, 봇물 터지듯 쏟아낸 고향의 기억들. 지금은 북녘땅에 있어 갈 수 없는 어르신들의 고향은 수십 년이 지나도 추억으로 아스라이 남아있었다.

‘통일향수 조향사’ 이성민 퍼퓸라이퍼 대표
‘통일향수 조향사’ 이성민 퍼퓸라이퍼 대표ⓒ민중의소리

이성민 조향사(41·퍼퓸라이퍼 대표)는 실향민들의 고향에 대한 그리운 추억을 세상에 단 하나뿐인 향기로 담아냈다.

이재순 할머니의 고향은 '함경남도 명사십리 해당화향'으로, 이주경 할아버지의 고향은 '함경도 한여름 산딸기향'으로, 김형석 할아버지의 고향은 '평안남도 대동강 솔향'으로, 김혁 할아버지의 고향은 '평안북도 옥수수향의 추억'으로, 송용순 할머니의 고향은 '황해도 해주 바다내음'으로 재현해냈다.

그래서 '향수'의 '향'자도 향기향(香)이 아닌 고향향(鄕)을 쓴다. 이북 5도(황해도, 평안남도, 평안북도, 함경남도, 함경북도)를 상징하는 5개의 향을 만들어 '통일향수'라는 큰 이름 안에 담아냈다. 향수의 핵심 원료는 '실향민들의 그리움'인 셈이다.

"처음에는 통일부 광고대행사에서 일하는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통일향수'를 한 번 만들어볼까 라는 생각에 시작하게 됐어요. 단순히 '향수로 향수를 달랜다'는 컨셉이 마음에 들어서 시작했던 거였죠. 그런데 실향민 어르신들을 30분 정도 직접 인터뷰하고 나니 나중에는 마음이 아프더라고요. 마치 우리들의 고향에 대한 이야기인 것 같은데, 이제 그분들은 갈 수 없는 '먼 곳'이 되어버렸잖아요. 안타까움이라고 해야 할까요. 인터뷰를 다 끝내고 날 때 즈음에는 숙연해졌습니다."

멀지만, 사실은 멀지 않은 곳. 자신은 가보지 못한 북녘 어딘가를 향으로 재현해내면서 이상민 조향사는 "결국 똑같은 우리들의 이야기였구나"라고 생각했다. 너무 낯설어서 마치 '다른 나라' 같았던 그곳은 꽃 향과 바다 향과 나무 향이 살아있는 우리네 고향과 다를 바 없었기 때문이다.

"어르신들에게 기억나는 고향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했어요. 저희가 가볼 수 없는 곳들이라 궁금하다고, 생각나시는 대로 이야기해주실 수 있느냐고 부탁드렸죠. 그런데 듣다 보니 우리 이야기더라고요. 조그마한 땅덩이가 남북으로 갈라져 있는데, 사실 같은 동네잖아요. 그러니까 결국 우리 고향의 모습과 똑같더라고요. 바닷가 냄새, 해당화 냄새, 옥수수 냄새…. 먼 나라가 아니라 '우리나라' 이야기였죠."

11년만에 재개된 남북 대화
"이제 어르신들도 북녘 고향을 다시 밟으실 수 있겠죠"

‘통일향수 조향사’ 이성민 퍼퓸라이퍼 대표가 실향민 할머니와 인터뷰를 나누는 모습
‘통일향수 조향사’ 이성민 퍼퓸라이퍼 대표가 실향민 할머니와 인터뷰를 나누는 모습ⓒ통일부 유튜브 캡쳐

이상민 조향사에게 향수는 '위안'이었다. IMF 직격탄을 맞은 20대의 힘든 날들을 버티게 해준 유일한 위안이 바로 향수였기 때문이다. 빚에 허덕이는 상황에서 조금의 여윳돈이 생길 때면 저렴한 향수를 하나씩 사모으곤했다. 패션디자이너를 꿈꿨던 20대 청년이 광고회사로 흘러 들어가 일했을 때도 포기하지 못한 꿈은 바로 이것이었다. 내가 향수로부터 느낀 위안을 다른 사람도 느낄 수 있도록 하는 것. 그래서 그는 자신의 일을 소개할 때 "향에 대한 새로운 관념을 만드는 것"이라고 표현했다.

그가 통일향수를 만들어야겠다고 마음먹은 이유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단순히 '주제가 마음에 들었다'는 이유로 시작했다고 말했지만, 이상민 조향사는 실향민들에게 고향의 향을 통해 따뜻한 위안을 건네고 싶었다. 마치 어떤 향을 맡으면 잠시 잊고 있던 추억들이 문득 떠오르듯이.

1년여간의 긴 제작과정을 거쳐 탄생한 통일향수는 지난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통일향수전'이라는 이름의 전시회를 통해 공개됐다. 북녘땅이 보이는 통일전망대에서 열린 전시회에는 인터뷰에 참여했던 어르신들도 초청됐다. 전시회는 다섯 분의 사연을 영상으로 만나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사연을 재현한 향수를 직접 뿌리고 맡아볼 수 있었다.

통일향수 전시전(자료사진)
통일향수 전시전(자료사진)ⓒ통일부 제공

실향민 어르신들은 이날 많은 눈물을 흘렸다고 이성민 조향사가 전했다. 해당화향의 주인공인 이재순 할머니는 오빠와 함께 맡던 꽃향이 향수병에 담겨 재현되자 할머니는 눈시울이 붉어진 채 소녀 같은 웃음을 지었다고 한다. 이재순 할머니는 "옛 생각이 되살아나서 꿈만 같아"라고 고마움을 표시했다.

"인터뷰했던 어르신들이 자신의 그리움으로 만든 향을 맡으시고는 많이들 우셨다고 하더라고요. 상상할 수는 없겠지만 아마 위안이 되지 않았을까 싶어요. 북에 있는 가족과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은 깊어지지만 기억은 점점 흐려지니까요. 고향의 냄새를 맡으시면 사라져가는 기억들을 다시금 되살릴 수 있길 바랐죠. 어르신들의 고향에 대한 향수를 고향의 향으로 위로해드리고 싶었어요."

이번 4.27 남북정상회담을 지켜본 이성민 조향사의 심경도 남달랐다. 가장 먼저 떠오른 건 다름 아닌 실향민 어르신들이었다. 11년 만에 다시 시작된 남북 대화를 그 누구보다도 간절히 기다리고 있던 분들. 숱한 세월히 흘렀지만 고향과 가족을 떠올리면서 했던 어르신들의 그리움은 여전히 이상민 조향사의 가슴에 박혀있었다.

"남북정상회담 중계를 보면서 어르신들이 많이 생각났어요. 다들 '살 날이 얼마 안 남았는데, 죽기 전에 가볼 수 있으려나'라는 이야기를 참 많이 하셨어요. 떨어진 채로 수십 년이 흘렀지만 가볼 수만 있다면 꼭 가보고 싶다고 하셨죠. 남북정상회담을 통해서 이제 우리가 평화를 이야기하고 미래를 이야기하잖아요. 이제 어르신들도 고향의 땅을 다시 밟으실 수 있게 될 날이 머지않아 다가왔으면 좋겠습니다."

영상:'통일향수 展' 1. 함경남도 명사십리 해당화향

영상:'통일향수 展' 2. 함경도 한여름 산딸기향

영상:'통일향수 展' 3. 평안남도 대동강 솔향

영상:'통일향수 展' 4. 평안북도 옥수수향의 추억

영상:'통일향수 展' 5. 황해도 해주 바다내음

남소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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