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보기
댓글보기
[만민보] 30년 투사로 살아온 80대 할머니의 꿈 ‘효자동 73번지’
없음
2008년 11월29일 오전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 교육회관에서 열린 'KAL858기 사건 진상규명을 촉구하는 21주기 추모제'에 참석한 차옥정 KAL858기 가족회 회장이 추도사를 하고 있다.
2008년 11월29일 오전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 교육회관에서 열린 'KAL858기 사건 진상규명을 촉구하는 21주기 추모제'에 참석한 차옥정 KAL858기 가족회 회장이 추도사를 하고 있다.ⓒ뉴시스

“그날 저는 학교에서 졸업생 환송회를 하고 늦게 귀가했어요. 그땐 핸드폰도 없어서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죠. 집에 들어섰는데 현관에 사람들이 막 있는 거에요. 어머니는 쓰러져 있고. 지인 분들이 와서는 ‘납치 된 걸 수도 있다’, ‘살아있을 거다’ 그런 얘기를 나누고 있었죠…”

박은경(53)씨는 그날을 떠올렸다. 아버지(박명규, 사고당시 53세)를 잃은 1987년 11월29일 늦은 밤을. 당시 대학교 4학년이었다는 박씨는 어느새 아버지와 같은 나이가 돼 있었다. 그럼에도 딸 은경씨에겐 그날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했다.

“사건 당일엔 폭파된 거다, 납치된 거다 의견이 분분했거든요. 살아있길 바라며 안방에 들어가서 기도를 했던 게 기억나요. 그렇게 잠깐 기도를 했는데 날이 새 있었어요. 가만히 기도하는 게 정말 힘든 일이잖아요. 근데 할 수 있는 게 없으니 기도하며 날을 지세운거죠.”

30년이 지났건만, 가족에게 남은 건 납득할 수 없는 수많은 의혹과 분노뿐이었다. 국가와 언론, 국민의 외면으로 아픔을 묵히며 살아야만 했던 유가족들. 그들이 다시 세상 밖으로 나온 건 남북정세가 바뀌고 대한항공 오너 일가의 갑질 논란이 불거지면서다. 유가족들은 납득할 수 있는 사건의 정황이 밝혀지길 바라며 지난 8일 서울 서소문에 위치한 대한항공을 다시 찾았다. 딸 은경씨도 어머니 차옥정(80)씨를 모시고 이 자리에 함께했다.

무채색 옷차림에 머리가 하얗게 샌 여성이 굽은 허리를 치켜세우고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외쳤다. “제발 진실이 밝혀져서 한을 풀 수 있게 해 주십시오.” 박은경씨의 어머니 차옥정씨였다. 이날 故박명규 전 대한항공 기장의 딸 박은경씨와 아내 차옥정씨를 처음 만났다. 이들은 지난 1987년 11월29일 ‘KAL858기 실종사건’으로 아버지이자 남편인 박명규씨를 잃었다. 사건이 발생한지 30년, 그들은 지난 세월을 어떻게 지내왔을까?

KAL 858기 가족회·사건 진상규명 대책본부 회원들이 8일 오전 서울 중구 서소문로 대한항공빌딩 앞에서 '1987 KAL 858기 실종사건 진상규명 기자회견'을 갖고 있다. 이날 기자회견 참가자들은 "KAL 858기 사건 진상규명을 위해 김현희에 대한 소송을 추진할 것"이라며 "법정에서 모든 진실을 밝히는데 집중할 것이다"고 주장했다.
KAL 858기 가족회·사건 진상규명 대책본부 회원들이 8일 오전 서울 중구 서소문로 대한항공빌딩 앞에서 '1987 KAL 858기 실종사건 진상규명 기자회견'을 갖고 있다. 이날 기자회견 참가자들은 "KAL 858기 사건 진상규명을 위해 김현희에 대한 소송을 추진할 것"이라며 "법정에서 모든 진실을 밝히는데 집중할 것이다"고 주장했다.ⓒ김슬찬 인턴기자

사라져가는 기억…
여전히 남겨진 의혹

16일 ‘KAL858기 실종사건’의 희생자 유족 차옥정씨와 딸 박은경씨를 다시 만나기 위해 서울 방배동 자택을 찾았다. 방배역에서 내려 높은 언덕과 주택가를 거쳐 10여분 걷자 허름한 2층 집이 나왔다. 박은경씨는 손님을 맞이한다고 집 대문을 쓸고 있었다. “어머니 손님 왔어”라고 외치는 딸의 목소리에 방 안에 있던 차옥정씨가 거실로 나왔다.

일주일 전 기자회견에서 만난 차씨는 기자를 기억하지 못하는 기색이었다. 옆에 있던 딸 박은경씨가 말했다. “사실 어머니가 경도인지장애 진단을 받았어요.” 차씨는 그런 얘기 하지 말라는 듯 손을 내저었다. 경도인지장애는 정상노화에 비해 기억력이 많이 떨어져 있는 상태로, 의학계에선 알츠하이머로 이행될 수 있는 위험군으로 본다. KAL858기에 대한 의혹을 가장 강력하게 제기하며 목소리를 높여온 그의 머릿속에서 기억이 점차 희미해지고 있었다. 그렇기에 지난 30년 세월은 간접적으로나마 어머니의 활동을 지켜본 박은경씨의 기억을 빌려야만 했다.

2018년 5월16일 방화동 자택에서 차옥정(80)씨가 남편의 사진첩을 꺼내 보고있다.
2018년 5월16일 방화동 자택에서 차옥정(80)씨가 남편의 사진첩을 꺼내 보고있다.ⓒ민중의소리

세세한 기억은 사라지고 커다란 덩어리와 감정만 남았지만, 가장 선두에 서서 세상과 맞서 온 차옥정씨의 목소리는 그대로였다.

“절대 포기할 수 없어요! 조종사 가족으로 30년인데, 그 정도 상식도 없겠어요? 하다못해 그렇게 됐으면 고인에 대한 예우라도 있어야죠! 보통 이런 일이 발생하면 (회사와 국가는) 최선을 다해서 그 슬픔을 감싸줘야 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된 게 이놈의 나라는, 대한항공은! 내 몸을 던져서라도 다 부수고 싶어요! 그런 심정이에요. 남편만 생각하면 미치겠거든요.”

그가 분노하는 이유는 사건 발생 다시 희생자 가족에게 보인 국가와 대한항공 측의 안하무인격 태도 때문이다. 이들 가족에겐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대한항공 오너 일가의 갑질 논란이 전혀 새롭지 않았다. “엄마가 매일 대한항공을 찾아갔던 게 기억나요. 아빠가 대한항공 직원이었으니까 회사가 사건의 진상을 낱낱이 밝혀주던지, 도와줘야 하잖아요. 그래서 회사에 가서 애원하고 (의혹을) 주장하고 그랬는데, 그 당시 회장 조양호가 나와서 고함지르고, 현수막을 집어 던졌었죠.” 딸의 말에 당시 상황이 떠올랐는지 차옥정씨도 “사람이 아니더라, 이런 걸 당했을 때 어떤 심정이겠나. 죽고 싶었다”고 말했다.

사건 발생 2년만에(90년) 찾았다는 KAL858기 잔해ⓒKAL858기 사건 진상규명 시민대책위원회
사건 발생 2년만에(90년) 찾았다는 KAL858기 잔해ⓒKAL858기 사건 진상규명 시민대책위원회ⓒKAL858기 사건 진상규명 시민대책위원회

■ KAL858기 실종사건

1987년 11월29일 승무원과 승객 115명이 타고 있었던 대한항공 비행기 KAL858기가 버마상공에서 사라진 사건.

28일 이라크 바그다드 공항을 출발해, 29일 아랍에미레이트연합(UAE) 아부다비를 경유하고 태국 방콕을 거쳐 서울로 향하던 KAL858기가 ‘Urdis, 북위 14도 45분, 동경 95도 38분’ 지점에서 미얀마 지상 관제탑에 비행고도·바깥온도·바람속도·도착예정시간 등을 보고한 뒤 사라졌다. Tavoy 지점에서 다시 교신하겠다고 통보했으나 이후 아무런 신호도 없이 교신이 두절된 것. 비상 신호조차 없었다.

사건 발생 직후 정부와 대한항공은 어떤 근거에선지 비행기가 공중 폭발됐다고 추정했다. 당국은 UAE 아부다비 공항에서 내린 15명의 외국인 탑승자 명단을 확인해 이 중 일본인으로 보이는 ‘하치야 신이치(김승일, 당시나이 70)’와 ‘하치야 마유미(김현희, 당시나이 26)’를 용의자로 지목했다. 그리고 김승일·김현희를 추적한 끝에, 이틀 뒤인 12월1일 바레인에 있는 두 사람을 찾았다고 밝혔다. 정부 당국은 음독자살 시도로 두 사람 중 김현희만 살아남았다고 밝혔다.

김현희는 제13대 대통령 선거 하루 전날 국내로 압송됐다. 이 때문에 안기부의 공작이라는 의혹이 끊임없이 제기됐다. 김현희 압송이 당시 집권당 후보였던 노태우의 대통령 당선에 극적으로 기여했기 때문이다. 김현희 압송 이틀 전 “미얀마 안다만 해상에서 구명보트를 발견했다”는 당국의 발표도 가족입장에선 이상했다. 시신이나 유품·동체·블랙박스 그 어떤 것도 발견하지 못했는데, 비행기가 “공중 폭파됐다”는 장소에서 구명보트 하나를 찾았다는 것은 가족들에게 또 다른 의혹으로 작용했다. 김승일·김현희가 비행기 선반에 설치했다는 위장 액체 폭발물(라디오·양주) 또한 비행기를 한 번에 폭파시키기엔 너무 적은 양이었다. 폭발이 있었더라도, 비상 신호는 있었어야 한다는 게 가족회 및 시민단체의 주장이다.

이에 참여정부 시절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가 재조사를 진행했지만, 의혹을 완전히 해결하진 못했다. 2007년 10월 국가정보원이 발간한 ‘국가정보원 과거사진실위원회 보고서’에 따르면, 진실위원회는 당시 정권이 사건을 여당 후보에게 유리하게 작용토록 활용한 점은 확인했으나 “안기부가 사건을 기획 또는 공작했다고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다만 보고서에서 위원회는 강제적인 조사권한이 없어 김현희와 대한항공 사장조차 면담하지 못한 점, 가족들이 납득할 만한 구체적인 증거들을 확보하지 못한 점 등을 들어 “신뢰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을 받을 수 있다”고 인정했다.

시청앞 광장을 행진하며 진상규명을 촉구하는 KAL858기 가족들ⓒ민중의소리
시청앞 광장을 행진하며 진상규명을 촉구하는 KAL858기 가족들ⓒ민중의소리ⓒⓒ민중의소리

국가가 쳐 놓은 덫

사고 직후 등촌동 대한항공 사무실에 대책본부가 꾸려졌다. 가족들은 이곳에 찾아가 정부와 대한항공에서 발표하는 정보에 의존해 “찾아 달라” 호소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사고 직후 폭파사고라고 확신한 정부와 대한항공은 너무나 신속하게 사건을 북한 공작원에 의한 테러라고 규정했다. 그리고 곧바로 진행된 게 보상협상 작업이었다. 집에는 대한항공 직원과 안기부 관계자로 보이는 이가 보상협상을 위해 상주하다시피 했다.

딸 은경씨는 “가족을 위한다기보단, 무마하는 차원에서 보상협상을 하러 온 느낌이었다”며 “매일 찾아와 도장을 찍으라고 하고, 엄마는 못 찍겠다며 버텼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아내 차옥정씨도 대한항공 관계자들과 입씨름하던 상황을 기억했다. “주변엔 항상 안기부 직원들이 지키고 있었어요. 감시하는 느낌이었습니다. 아마 몇 달을 계속 그렇게 왔어요.” 또 보상협의는 가족보단 주로 친척들을 상대로 이루어졌다고 했다. 박은경씨는 “친척들을 회유했다”며 “엄마에게 오빠인 큰삼촌이 있었는데, (정부·대한항공 측과 대화를 나누고 온) 큰삼촌이 ‘이렇게 된 이상 빨리 처리하자’는 식으로 부추겨서 한동안 다투기도 했다”고 말했다.

보상과 돈 문제로 친척들과 등져야 했던 상황도 가슴 아팠지만, 진짜 아픔은 따로 있었다. 국가는 가족들에게 KAL858기와 함께 사라진 남편·아들·딸을 마음속에서 떠나보낼 권리마저 빼앗았다.

당시 국가는 유품도, 시신 한 줌도 찾아오지 못했다. 아니, 국가는 찾지 않았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국가는 무슨 이유에선지 사고 발생 한 달 만에 희생자들을 일괄 사망처리 했다. 한 마디 상의도 없이 남편을 세상에서 지워버린 것이다. 이조차 우연한 계기로 알게 됐다고 딸 은경씨는 말했다. “어떤 분이 서류를 준비할 게 있어서 동사무소에 갔다가 이미 사망신고 처리된 걸 알게 됐어요.”

□ 민법 제27조(실종의 신고) ①부재자의 생사가 5년간 분명하지 아니한 때에는 법원은 이해관계인이나 검사의 청구에 의하여 실종선고를 하여야 한다. ②전지에 임한 자, 침몰한 선박 중에 있던 자, 추락한 항공기 중에 있던 자 기타 사망의 원인이 될 위난을 당한 자의 생사가 전쟁종지후 또는 선박의 침몰, 항공기의 추락 기타 위난이 종료한 후 1년간 분명하지 아니한 때에도 제1항과 같다.

□ 민법 제28조(실종선고의 효과) 실종선고를 받은 자는 27조의 기간이 만료한 때에 사망한 것으로 본다.

“법적으로 실종자와 미수습자에 대한 실종유예기간은 1년이 지나야 해요.”

최소한 실종된 가족을 마음속에서 보낼 1년이란 시간은 보장됐어야 했다. 그 고유의 권한마저 빼앗긴 가족에게 “폭발로 사라졌으니, 돈 받고 잊으라”는 것은 단순한 인권침해 차원의 폭력이 아니었다. 덫이었다. 존재의 부재를 평생 받아들이지 못하도록 만든 덫 말이다. 가족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희망과 “그럴 리 없다”는 고통 사이에서 여전히 아파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마음을 추스르고 아버지를 보낼 기회마저 박탈당한 딸과 아내는 “지금도 어딘가에 살아있을 것만 같다”고 말했다.

“한동안 바다나 강물을 볼 때면, 눈물이 났어요. 그곳에 아버지의 세포 하 나라도 있을까 싶어서요. 바닷물에 아버지가 산산이 흩어져 있다고 생각했어요. 존재가 있다가 없어졌는데, 아무 살점 하나 유품 하나 없다는 건 가족들에게 스트레스가 보통 큰 게 아니거든요. 죽음은 받아들여야 하는데, 그거라도 어떻게 넣어서 관을 만들고 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는 거죠. 그래서 막연하게 희망을 갖게 되는 거에요. 어딘 가에 살아 있을 수도 있다고. 이사해도 전화번호를 절대 바꾸지도 않고. 10여년 전 전화번호를 갖고 살아가게 되는 거죠.”

줄여가는 것들…

하루아침에 가장을 잃었어도 그나마 차옥정·박은경씨 가족은 버틸 만 했다. 공군 중령 출신에 대한항공 기장까지 했던 아버지였기에 축적해 놓은 자산이 좀 있던 편이었다. 다만 살림살이를 하나씩 줄여갔다. 차옥정씨는 아들·딸을 장가·시집보내기 위해 갖고 있던 땅과 집을 팔았다. 방배동에서 일산, 양주, 정릉을 옮겨가며 전세살이를 했다. 그러다 최근 다시 이사한 곳이 아들이 살고 있는 이곳 방배동 주택이라고 했다. 방배동은 딸 은경씨가 살고 있는 동네이기도 했다.

방배동 이사는 딸의 바람이었다. 옆에서 어머니를 돌봐야 할 시기가 왔다고 판단한 것이다. “방배로 오기 전에는 엄마가 정릉에 살았어요. 집이 어찌나 후졌는지, 뜯어고치다시피 했어요. 겨우 집처럼 만들어서 엄마가 살았어요. 평소엔 일주일에 한 번씩 제가 가고, 한 번은 강남 쪽으로 나오라고 하면서. 그런데 어느 날부턴가 엄마가 깜빡깜빡하시는 거에요. 그래서 병원에 모시고 갔더니, 경도인지장애 판정을 받았죠.”

사실 차씨는 가족 모두가 인정할 정도로 명석한 사람이었다. 지금과는 다르게 멋도 아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남편의 실종 뒤로 그는 화려한 옷을 입기를 거부하고, 육식도 끊었다. “예전엔 엄마가 화려한 옷을 입고 명동에도 나가시고 그랬는데, 그 날 이후부터 그러지 않으세요. 고기는 입에도 안 대고 나물만 드시고 그런 식으로 사셨어요. 과일도 사다가 놓으면 안 먹어서 제가 다시 집에 갔을 땐 이미 썩어 있곤 했어요. 자기를 안 돌본 거죠.”

차씨는 딸 은경씨가 초등학교 시절 위암 판정을 받기도 했다. 위 절제수술로 겨우 살았다고 했다. 이 때문에 남편 박명규씨는 아내를 끔찍하게 아꼈다고 딸 은경씨는 말했다. “어디 갔다 올 때면, 엄마 것만 선물을 사왔었어요. 선물 가방을 열어보면 항상 엄마 선물뿐이었죠. 엄마가 술도 좋아하셨는데, 출장 다녀올 때마다 술도 한 병씩 사와서 나중엔 진열도 했었어요. 물론 지금은 고마운 사람들에게 한 병씩 갖다주다보니 거의 없지만요.”

차씨는 ‘KAL858기 실종사건’ 진상규명에 함께 해주고 힘써줬던 사람들에게 남편에게 받았던 소중한 물건들을 하 나씩 나눠줬다. 줄건 없고, 그나마 소중하게 모아뒀던 술이 고마움을 표현할 최선의 방법이었다.

사진첩을 꺼내 보고 있는 차옥정씨의 손.
사진첩을 꺼내 보고 있는 차옥정씨의 손.ⓒ민중의소리

효자동 73번지

“나는 대구고, 남편은 서울 효자동, 효자동 73번지.”

딸 박은경씨에게 아버지와 어머니의 고향을 묻자, 옆에 있던 차씨가 잽싸게 답했다. 그것도 구체적인 번지수까지 말이다. 다른 건 잊어도 남편의 본적만큼은 잊을 수 없다는 듯. 차씨가 말했다. “남편이랑 나중에 돈 생기면 거길 꼭 사자고 약속했었어. 그게 이렇게 허무하게 될지 모르고. 그래도 그거 꼭 실천할거야.”

차씨의 남은 목표이자 꿈이었다. 그의 목소리엔 살며 여러 번 다짐했던 결심이 담겨있었다. 딸 은경씨는 “돈 생기면 고마운 사람들에게 인사하고, 아빠 본적지 집을 사는 계획이 있다”며 “본적지는 예전 그 모습 그대로 있는 건 아니지만, 지금도 가보면 옛 모습 비슷하게 있긴 하다. 선조가 좀 사는 집이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차씨가 ‘효자동 73번지’를 꼭 살 거라고 반복해서 말하자, 딸 은경씨가 농담처럼 물었다. “누구 명의로 살 거야?” 그러자 차씨는 “당연히 느그 아버지 명의로 사지”라고 답했다. “엄마, 아버지 명의가 존재하질 않는데? 내가 아버지 명의로 개명해야겠네~”

“느그 아버지 사람이 참 신사였지. 양반이었어. 성 내는 법이 없었어. 동내 지나가다 동내 할머니가 무거운 짐 들고 가고 있으면 타시라고, 태워다주고 그랬어. 동네에서 노는 애들과도 잘 어울렸어…”

이승훈 기자

기자를 응원해주세요

기사 잘 보셨나요? 독자님의 작은 응원이 기자에게 큰 힘이 됩니다. 독자님의 후원금은 모두 기자에게 전달됩니다.

이시각 주요기사

카카오톡 카카오스토리 카카오스토리2
닫기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