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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벗 칼럼] ‘대화’와 한반도 평화

대화는 아주 평범하고도 자연스러운 접촉이다. 만나고 대화하는 것은 인생의 실이 되어 그 사람의 앞날에 무늬와 채색을 입힌다. 난 대화야말로 관계와 교류의 기본적 방법론이라고 믿고 있다. 의료인과 환자도 마찬가지다. 한의사와 환자야말로 서로 대화해야 결국 그 관계 속에서 건강이라는 선(善)의 결실을 맺을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건강. 그리고 상대방이 존귀한 존재라는 것에 기초한 대화와 교감. 그런 의미에서 폭력과 대화는 인간의 행위라는 직선 위 서로 대척점에 위치하는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해, 폭력이라는 점에 가까워질수록 대화가 희박해지고, 대화라는 점에 가까워질수록 폭력이 설 자리가 사라진다는 상식적 이해관계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이번 4월 27일, 5월 26일 남북정상회담에서도 국가와 국가와의 평화적 관계 또한 국가 최고 수뇌가 대화의 테이블을 함께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는 지고지순의 움직일 수 없는 원리가 목격됐다고 할 수 있다.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정상회담 후 함께 통일각을 나오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정상회담 후 함께 통일각을 나오고 있다.ⓒ청와대 제공

대화를 지속적으로 시도한다는 것은 웬만한 인내 없이는 어려운, 지루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베트남 전쟁에 종지부를 찍은 것도 결국 그 지루하게 끌어온 파리회담이었다. 폭력으로부터 파생된 너와 나 사이의 칼날 같은 공백은 결국 다시 대화했기 때문에 메워졌다.

남북과 북미는 오랫동안 대화하지 않고 서로를 분석하고 비판해왔다. 난 여기에서 대화라는 행위의 성질이 어떤 분석과 비판이란 객관상의 이해를 넘어서는 어떤 철학적 실천행위라는 말을 하고 싶다. 대화를 통한 이해라는 것은 사실 형태가 없는 마음을 바라보는 것이다. 대화는 본질적으로 미래를 지향하는 경향이 있다. 분석과 비판과는 조금 다르다. 지나간 일은 고정적이며 분석은 상대방의 과거를 토대로 하기 때문이다. 남북과 북미간의 분명한 객관적 분석과 비판이 대화가 결여되었을 때, 모순적이게도 불확실한 미래밖에 남지 않게 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지 않나?

자연관계의 이치와 인간관계 생리 병리가 좋은 모습으로도, 또한 나쁜 모습으로도 될 수 있는 불확실성이 존재한다고 할 때, 그 비결정적 장래를 선(善)의 결실로서 나타내는 작업은 모순적이게도 무형의 ‘마음’을 바라보는 대화와 소통이다. 따라서 객관적 분석과 비판도 좋지만, 어쨌든 결국 대화를 통해서만이 상대와 내가 어떤 하나의 체계로써 분명해진다고 강조하고 싶다.

난 여기에서 더 나아가 민중 사이의 우정이라는 마음의 재산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국가’ 대 ‘국가’의 신뢰마저도 이룩할 수 있는 것이 바로 결국 민중 개개인의 신뢰관계의 누적이지 않을까. 그러려면 우리가 설령 서로를 향한 긍정적 데이터, 부정적 데이터를 모두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대화해야 한다. 만나야 한다.

난 이것이 주치의와 환자가 만나서 대화하면서 쌓는 신뢰와 하등 다를 것이 없는 이치라고 본다. 부모와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대화한다. 직장 내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대화한다. 국가 수장 간 대화하는 데에서 외교가 시작된다. 대화. 사람이 잘 살기 위한 아주 쉽고 단순하고도 핵심적인 철학적 행위가 아닐까.

이제 곧 북미정상회담도 할 예정이다. 이 얼마나 기쁜 일인가. 한반도에 평화의 결실을 맺는 대화가 이제 정상회담을 넘어 민중대화로 나아갈 날만을 기다린다.

허명석 길벗 한의사, 평화와통일을여는사람들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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