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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와 위로의 마법, 부모님 삶을 기록하기

박범준은 2015년 아버지의 자서전을 쓴 것을 계기로 가족이 선물하는 자서전 ‘기억의책’ 제작을 전문으로 하는 꿈틀을 창업했고 지금까지 160명이 넘는 이들에게 '자신의 책'을 선사했습니다. 기사는 3회까지 발행합니다.

아버지는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이다. 단지 나를 낳아주시고 키워주셨기 때문만은 아니다. 나는 철이 들면서부터 아버지와 불화를 거듭했다. 다른 사람 앞에서는 제법 당당하고 어른스러운 나였지만 아버지 앞에서는 늘 위축됐다. 나를 철없고 답답한 막내로만 보는 아버지의 시선이 느껴졌다. 나는 아버지 앞에 서면 긴장했다. 조리 있게 내 뜻을 설명하지 못했고 답답하고 억울한 감정을 강변할 뿐이었다. 내가 철이 들고 내 생각을 갖게 되면서부터, 아버지는 일에 바빠 보이지 않다가 느닷없이 나타나 나에게 이해할 수 없는 잔소리를 하는 사람일 뿐이었다.

나이 먹으면서도 아버지와의 관계는 내 마음속에 깊은 상처였다. 늘 힘들었고, 자주 불화했고, 그 속에서 깊은 좌절과 수치심을 느꼈다. 마흔이 넘으면서 막연하게 아버지와 좋은 관계를 회복할 기회가 얼마 남지 않았다고 느꼈다. 그런 마음에 아버지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더 많은 이야기를 하려고 할수록 더 큰 갈등만 생겼다. 삼십 년이라는 세월동안 만들어진 서로 다른 가치관은 사사건건 부딪쳤다. 차라리 멀리 떨어져 지내는 것이 서로에게 좋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아버지도 마찬가지의 어려움을 겪고 계신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래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제사를 마친 어느 늦은 밤. 식사를 하다가 무척 오랜만에 아버지가 말문을 여셨다.

“요즘은 무슨 일을 하고 있냐?”

아버지의 물음에 나는 당시에 쓰기 시작한 책에 대해 설명해 드렸다. 아버지는 답답하다는 표정으로 말씀하셨다.

“너는 대체 언제 정신을 차릴 거냐? 그런 책을 쓰는 게 무슨 소용이 있다고 그러는지 모르겠다. 아직 늦지 않았으니 지금이라도 어디 취직할 생각을 하지 않고......”

나에게 중요한 의미를 지닌 일을 ‘철없는 짓’이라고 비난하시는 모습에 마음이 상한 나는 거친 숨을 가다듬어야 했다. 예전 같으면 욱하고 성질을 냈겠지만 차분하게 내 감정을 설명하려고 애썼다.

“아버지, 저 이제 나이가 마흔이 넘었어요. 아버지가 제 삶을 인정해주지 않으셔서 답답해요.”

이렇게 말하면서 나는 아버지가 조금은 내 뜻을 이해해 주시리라 기대했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나의 말을 듣고 불같이 화를 내셨고, 나는 다시 한번 좌절감을 곱씹으며 자리를 떠야 했다. 혼자 방에 누워서도 화가 가라앉지 않았다. 대체 나의 삶을 인정해달라는 말이 뭐가 그렇게 화가 날 말인지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문득 무서운 생각 하나가 내 머리를 스쳤다.

박범준 편집장은 많은 이들에게 자신 혹은 타인의 기록을 책으로 내는 일을 가르치거나 책을 내주고 있다.
박범준 편집장은 많은 이들에게 자신 혹은 타인의 기록을 책으로 내는 일을 가르치거나 책을 내주고 있다.ⓒ사회적기업 꿈틀

‘마흔이 넘은 아들의 삶을 인정해주지 않는다고 아버지에게 말하던 그 순간까지 내가 일흔을 넘긴 아버지의 삶을 인정한 적이 있었던가?’

철이 들면서 아버지의 삶은 내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어떤 것이었다. 답답하고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했을 뿐 그 삶을 있는 그대로 인정한 적은 없었다. 마흔이 넘도록 아버지에게 인정받지 못한 아들의 마음이 답답했다면, 일흔이 넘도록 아들에게 인정받지 못한 아버지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그때야 아버지가 보인 분노를 이해하면서 혼자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이 무렵 한 책에서 아버지의 어린 시절에 대한 대화를 나누라는 조언을 들었다. 현재와 미래에 대한 이야기는 가치관의 차이로 부딪히기 쉽지만, 아버지의 어린 시절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다. 내 아버지가 되기 전 아버지의 이야기. 어른이 되고 아버지가 되어버린 내 기억 속 아버지 모습이 아니라 미래를 고민하는 한 소년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 소년은 나처럼 생각이 많고 겁이 많았다. 미래는 불안했고 기댈 곳은 많지 않았다. 기억 속 나의 어린 시절 혹은 내 주변 가까이 지내는 친구나 후배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때서야 거짓말처럼 아버지의 모습이 편안하게 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철이 들고 나서 처음으로 몇 시간이고 편하게 아버지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되었다. 무척이나 신기하고 행복한 경험이었다.

어린 시절 내 꿈 중 하나가 내 이름으로 된 책을 세상에 내놓는 것이었다. 운 좋게도 나는 30대에 그 꿈을 이뤘지만, 혹시 아버지에게도 그런 꿈이 있지 않았을까? 굳이 많은 독자를 만날 수는 없어도 상관없다. 누구에게나 자신 삶의 이야기는 그 무엇보다 의미 있을 테니 말이다. 적어도 아들, 딸과 손주들은 그 책을 읽고 자신의 뿌리를 떠올릴 수 있으리라. 그리고 그런 이야기들이 하나하나 모이면 사회적으로도 가치가 있는 기록이 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 사람의 생애를 담은 책이니 생애사라고 부를지, 자신의 삶을 기록한 책이니 자서전이라고 부를지 고민이 많았다. 그러다가 ‘기억의 책’이라는 이름을 생각해냈다. 대단할 것 없고 특별할 것 없어도 한 사람의 기억을 그대로 담은 책이다.

처음에는 아버지에게 책을 만들자는 말씀을 차마 꺼내지 못했다. 왜 또 쓸데없는 짓을 하느냐고 꾸짖지는 않으실지...... 여전히 나에겐 아버지에 대한 불편함과 두려움이 남아있었다.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냈는데 마침 아버지도 흔쾌히 책을 만들고 싶다고 하셨다. 아버지에게 선물하고 싶은 마음에 책을 만들기 시작했는데, 막상 아버지 책을 만들고 나니 아버지로부터 큰 선물을 받았다는 기분이 들었다. 아버지가 용기를 내주지 않으셨다면 사라져버렸을 이야기들이 빛바랜 사진과 함께 책으로 남았으니 말이다. 아버지 책이 완성되어 처음 보여드리는 날 무척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책을 찬찬히 살펴보시는 아버지를 보면서 나는 속으로 이렇게 말했다.

‘아버지, 오래 기다리셨죠? 이제야 막내아들이 아버지 삶을 그대로 보고 듣고 인정합니다. 누가 뭐래도 아버지 덕분에 세상에 나와서 이렇게 성장하고 살아왔어요. 참 고맙습니다.’

불화를 겪던 나는 아버지의 인터뷰하며 아버지에 대해 새로운 눈을 떴다.  아버지의 이야기를 경청했고 그곳엔 내가 몰랐던 아버지가 있었다. 나는 그렇게 아버지를 품었다.  책을 아버지께 드리는 날 무척이나 떨렸다.
불화를 겪던 나는 아버지의 인터뷰하며 아버지에 대해 새로운 눈을 떴다. 아버지의 이야기를 경청했고 그곳엔 내가 몰랐던 아버지가 있었다. 나는 그렇게 아버지를 품었다. 책을 아버지께 드리는 날 무척이나 떨렸다.ⓒ사회적기업 꿈틀

차마 입 밖에 내지 못한 내 마음이 책을 통해 아버지의 마음에 닿았을 거라고 나는 믿는다. 그렇게 나는 마흔이 넘은 나는 아버지의 일흔을 넘긴 아버지와 화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뒤이어 어머님의 삶 역시 한 권의 책으로 기록할 수 있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부모님의 책에는 우리 가족이 어떻게 탄생했는지, 우리 형제들이 어떻게 자랐는지, 그 소소한 가족의 역사를 담고 있다.

세월 어느 길목, 나이가 되어서 내 인생의 의미를 찾고 그 이야기를 책으로 만들어보고 싶은 마음이 들 때가 있다. 내가 그런 생각을 하게 된 나이가 되었을 때, 나보다 한 세대를 더 살아온 부모님의 마음은 어떨까? 우리 모두에게 부모님은 인생에서 만나는 ‘첫 번째 위인’이다. 내가 누군가의 삶을 기록하는 책을 쓰고 싶다면, 그 첫 번째는 응당 부모님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부모님의 자서전을 쓰기 위해서는 부모님과 대화를 나눠야 한다. 그리고 그 삶을 이해하고 그것을 글로 풀어내야 한다. 내 부모님과 그것을 해낸 사람이라면 나 자신과도 같은 작업을 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내 인생을 책으로 만들고 싶은 사람이라면, 먼저 내 부모님의 인생을 책으로 만들어보라고 나는 권하고 싶다. 그 과정이 아름다울 뿐 아니라, 그 결과 부모님과 나 자신 그리고 내 가족 모두에게 의미 있는 기록을 선물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부모님과 아직 깊은 대화를 나눠보지 못했더라도 상관없다. 글을 잘 쓰지 못해도 상관없다. 그 어떤 경우에라도 그 의미는 절대로 퇴색하지 않는다. 필요한 것은 오직 용기뿐이다.

이후 연재는 ② 인터뷰하고 글쓰기 ③ 내 자서전 만들기 순으로 발행합니다.

누군가의 삶을 기록한다는 것은 '경청'으로 시작한다. 부모님의 삶이 활자화된 책으로 나오는 경험도 멋진 일이지만, 그 과정이 바로 치유와 위로의 과정이 되기도 한다.
누군가의 삶을 기록한다는 것은 '경청'으로 시작한다. 부모님의 삶이 활자화된 책으로 나오는 경험도 멋진 일이지만, 그 과정이 바로 치유와 위로의 과정이 되기도 한다.ⓒ사회적기업 꿈틀

'기억의책'에 대한 소개영상 보기 (클릭)

박범준 사회적기업 꿈틀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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