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보기
댓글보기
[나이팅게일의 노래] 나비효과

새 연재 알림

나이팅게일은 19세기 중후반에 활약했던 영국의 간호사입니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나이팅게일의 이미지는 등불을 든 여인 혹은 백의의 천사입니다. 그러나 실제 나이팅게일은 뛰어난 통계학자이자 행정가여서 크림 전쟁 당시 감염관리 등을 통해 수많은 병사들의 목숨을 구했습니다. 미미할 수 있지만, 제 글이 아주 조금이라도 세상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쳐서 한 사람의 환자라도 살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필자주

"이 개 같은 년아!!"

얼마 전 한 환자에게서 들은 말이다. 치료를 위해 필요한 처치들은 대부분 환자에게 불편감 혹은 고통을 야기한다. 그래서일까, 환자들은 치료를 받으면서 의사나 간호사에게 욕을 하기도 하고 발로 차고 때리거나 의료인들의 가족이나 자식들의 불행을 바라는 저주를 퍼붓기도 한다.

예전에 동두천 지역의 유일한 응급실이 문을 닫게 될 위기에 처했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작은 병원이다 보니 응급실을 지키는 사람은 의사 1명에 직원 2~3명이 전부였다. 일주일에 2~3번 취객이나 난폭한 환자들에 의한 의료인 폭행사건이 발생하자 응급실을 운영하기 힘들어진 원장의 결단이었다. 다행히 동두천 시장까지 나서서 재발 방지 대책을 마련하겠으니 응급실 폐쇄를 유보해달라고 호소하자, 이전까지 소극적으로 대처하던 경찰들이 뒤늦게나마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하고 폴리스콜을 설치하는 등 적극적으로 대응하기 시작해 폐쇄까지 가진 않았다고 한다.

드라마에서 판사인 주인공 남성이 아픈 엄마를 업고 응급실을 들이닥쳐서 빨리 치료해달라고 난동을 부리는 장면.
드라마에서 판사인 주인공 남성이 아픈 엄마를 업고 응급실을 들이닥쳐서 빨리 치료해달라고 난동을 부리는 장면.ⓒJTBC 캡쳐

관대한 의료인 대상 폭력, '환자'라는 이유로 면죄부

우리 사회는 병원에서 환자나 보호자가 의료인에게 저지르는 폭력에 대해 매우 관대한 것 같다. 그런 행위가 범죄라는 인식이 거의 없다. '얼마나 아프면 그러겠냐', '아픈 사람이 그럴 수도 있지', '가족들이 얼마나 절박하면 그러겠냐'는 식이다. 그렇다면 직장이 병원이고, 직업이 의료인이라서 매일 그 아픈 사람과 절박한 사람들을 만나야 하는 우리들은 매일 맞고만 있어야 하는 걸까?

얼마 전 "미스 함X라비"라는 드라마에서 판사인 주인공 남성이 아픈 엄마를 업고 응급실을 들이닥쳐서 빨리 치료해달라고 난동을 부리는 장면이 있었다. 주인공은 지나가던 간호사의 팔을 거칠게 휘어잡고 소리 지르고 환자를 데리고 어딘가로 이동 중이던 의사의 멱살을 잡기도 했다. 알고 보니 엄마가 겪는 통증은 매우 심하지만 생명에 큰 위협은 없는 요로결석이었고, 의사가 치료하려고 급히 모셔가던 할머니는 축 늘어져서 통증을 호소하진 않았지만 뇌혈관에 문제가 생긴 심각한 환자였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드라마이기도 하고 주인공은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고 눈물을 흘렸지만 나는 그 장면이 좀 불편했다. 주인공이 의료인에게 폭력을 쓰는 장면을 넣을 수 있는 것은 이 행위로 인해 주인공에 대한 시청자들의 호감이 반감되지 않을 것이라는 인식이 전제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극심한 통증을 호소하는 엄마가 걱정돼서 주인공이 눈에 보이는 것이 없다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응급실에 뛰어들어오면서 마주친 청소노동자를 비키라며 세게 밀치는 장면이나 지나가던 아이를 넘어뜨리고는 못 본 체 하고 지나가는 장면을 넣을 수 있었을까?

나도 환자에게 성희롱을 당하거나 불쾌한 신체접촉 또는 맞거나 상스런 욕을 들어봤고, 내 주변 의사나 간호사들도 다들 그런 경험이 있다. 불과 며칠 전에도 환자로부터 성희롱을 당했다. 심장마비로 죽을 뻔한 사람을 겨우 살려놨더니, 살만해지니까 걸리적거린다고 모니터링 장치 등을 잡아떼고, 떼면 안 된다고 설명하자 자꾸 그렇게 떽떽거리면 이불속으로 확 끌어당겨버리겠다는 둥, 내가 체온을 재러 다가가니 이불을 들추며 들어오라는 둥 그런 쓰레기 같은 농담을 던졌다.

너무나 상식적인 이야기지만, 의료인이기 이전에 우리는 대한민국 법의 보호를 받을 자격이 있는 국민의 한 사람이다. 그러나 환자라는 이유로 인지능력이 정상인 성인임에도 그런 가해를 저지르고도 처벌로부터 꽤 자유롭다. 심지어 응급실에 환자로 접수했다 뿐이지 딱히 아픈 곳도 없는 술주정뱅이도 "환자"라는 이유로 면죄부를 받는다.

특별 대우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교도소의 범죄자들도 아프면 치료를 받는다. 하지만 그 사람들이 병에 걸렸다고 해서 죄를 사면받는 것이 아니듯, 환자들도 병에 걸린 것을 이유로 그들이 저지르는 만행을 모두 용서받을 수는 없다. 죄를 지은 다음에 병을 얻느냐, 병을 얻은 다음에 죄를 짓느냐...전후관계가 다를 뿐이지 남을 때리고 성희롱, 성추행을 저지르면 범죄자라는 것은 똑같다.

환자들이 아프다고 해서, 본인이 힘들다고 해서 모두 다 의료인을 때리는 것은 아니다. 병원에서 매일 수많은 환자들을 만나다 보면 의료인의 노고에 늘 감사해하는 사람, 대기시간이 길어져도 오히려 바쁜 의료인들을 안쓰럽게 생각하고 걱정해주는 환자들도 많다. 꼭 욕이나 반말을 하는 사람만 하고, 때리는 사람만 때린다. 문제는 이 욕하고 소리 지르고 때리는 사람 때문에 진료가 지연되고 방해가 되니까 정작 선량한 환자들이 피해를 본다는 것이다. 때로는 원칙을 고수할 여유나 시간이 없어서 결국 그들의 억지스러운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을 때도 있다.

의료인에 대한 폭력을 제대로 처벌해달라고 하는 것은 새삼스레 국민으로서의 내 권리를 되찾겠다는 것도 아니고, 의료인에 대한 특별 대우를 요구하는 것도 아니다. 병원 문을 나서서 평범한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길 가다 두들겨 맞았을 때는 그 가해자를 다른 폭행사건의 경우와 똑같이 처벌해도 된다. 하지만 병원 내에서 의사로서, 간호사로서 일하고 있는 동안 당하는 폭력에 대해서는 더 강력하게 처벌해야 한다. 주행 중인 대중교통 운전자를 폭행하는 것을 엄격하게 처벌하는 이유와 같다.

치과의사 폭행
치과의사 폭행ⓒKBS 캡쳐

의료인에 대한 폭력이 초래할 결과

그동안 누누이 말해왔지만 우리나라 병원 중에 인력이 넉넉하게 배치되어 있는 곳은 아무 데도 없다. 의사나 간호사 한 두 명이 주취자나 난폭한 환자들에게 얻어 맞고 실려나가면 그 빈자리를 메울 여유인력 따위는 없다. 그냥 그 빈자리만큼 진료에 공백이 생기는 것이다. 그 의사나 간호사가 돌봐줄 예정이었던 환자들이 치료를 못 받게 되는 것뿐이다.

의료인에 대한 진료방해행위가 초래할 결과는 누구도 예측할 수 없다. 그저 대기시간이 한두 시간 길어지는 불편에 그칠 수도 있고, 동두천시의 사례처럼 그 지역의 유일한 응급실 문을 닫게 할 수도 있다. 어수선한 상황에서 다른 환자의 중요한 증상을 놓쳐서 심각한 후유증을 남게 할 수도 있고, 응급환자를 수술해줄 의사가 다치는 바람에 수술을 못 하게 된 환자를 다른 병원으로 이송하다가 그 환자가 사망하게 되는 지경에 이를 수도 있다.

주취자가 휘두른 주먹 하나로 인한 나비효과가 누군가의 삶을 송두리째 휩쓸어가는 거대한 태풍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의료인에 대한 폭행을 이대로 방관해서는 안 된다. 의료인에 대한 폭력의 피해는 의료인 당사자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그 의료인에게 치료받기 위해 기다리고 있던 환자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친다. 당신의 아버지가 심각한 흉통을 호소하여 급히 응급실을 찾았을 때 그 응급실의 유일한 의사가 좀 전에 환자에게 두들겨 맞아서 다른 병원 응급실에 실려가고 없다고 하면, 그래서 치료의 골든타임을 놓치게 된다면 누구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을 것인가?

행동하는 간호사회 최원영 간호사

기자를 응원해주세요

기사 잘 보셨나요? 독자님의 작은 응원이 기자에게 큰 힘이 됩니다. 독자님의 후원금은 모두 기자에게 전달됩니다.

이시각 주요기사

카카오톡 카카오스토리 카카오스토리2
닫기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