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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숙 칼럼] 혐오는 사회의 불안이 투영되는 것

요즘 언론에 자주 등장하는 말이 ‘혐오’다. 박근혜 정부 시기에 널리 퍼진 혐오의 정치 덕에 혐오는 우리 사회를 뒤덮었다. 어버이연합을 비롯한 보수단체에 돈을 주고 반정부 집회나 노조를 반대하는 집회를 벌이도록 사주하면서 더 본격화됐다.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유족들과 시민들에 대한 혐오선동이 대표적이었다. 그런데 사실 이보다 더 꿈틀꿈틀 자라난 것이 일부 근본주의 기독교집단의 동성애혐오였다. 이들은 이명박 정부 때부터 성장하더니 박근혜 정부시절 활개를 쳤다.

보수정권 하에서 혐오세력이 성장한 것은 혐오의 정치라는 통치방식 때문이다. 혐오는 사회구성원들을 분리시킴으로서 국가의 책임을 뒤로 돌리기에 극우정치가 애용한다. 그리고 만인의 평등보다는 질서를 강조하는 보수 가치는 ‘상상화된 자연 질서’을 기반으로 한 혐오의 전제와 맞닿는다.

‘상상화된 자연질서’의 대표적인 것이 가부장적 성별 역할 규범이다. 남녀가 결혼해서 여성은 집안일을 하고, 남성은 밖에서 돈을 벌어오는 것이 자연(신)이 결정한 질서이자 순리라고 본다. 순리에 어긋난다고 여겨지는 건 혐오하며 밀어내려 한다. 그러나 그건 자연 질서도 아니며 현실의 권력관계를 숨기기 위해 고안된 ‘상상화’된 자연질서로, 혐오의 속성이다.

서울 서초동 서초경찰서 앞에서 20대 여성들이 여성혐오 피켓을 들고 강남 여성 살인사건을 '묻지마 범죄'로 규정한 서초서에 항의하고 있다.
서울 서초동 서초경찰서 앞에서 20대 여성들이 여성혐오 피켓을 들고 강남 여성 살인사건을 '묻지마 범죄'로 규정한 서초서에 항의하고 있다.ⓒ양지웅 기자

차별구조에서 탄생한 혐오

그런데 최근 혐오라는 말이 너무 난립해 무엇이 혐오인지조차 분간하기 어려운 지경이 됐다. 우리가 혐오라고 일컬으며 문제 삼는 것은 ‘단순히 싫은 감정’(혐오감)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한 사회 내 불균형한 권력관계에서 특정 집단에게 일상적으로 행해지는 차별발화와 행위인 혐오다. 남성을 욕하고 재벌을 비난한다고 혐오는 아니다. 법철학자 홍성수 교수의 말대로 “남성에 대한 차별적, 모욕적 표현이 난무한다고 해서 내가 차별과 성폭력의 피해자가 될 것을 걱정하지는 않는다. 그저 좀 언짢을 뿐이다. 그러나 여성은 다르다”(‘말이 칼이 될 때’) 그래서 남성혐오라는 말은 성립하지 않는다. ‘백인에 대한 혐오 표현’이나 ‘재벌에 대한 혐오’라는 것이 불가능한 것과 같다.

여성혐오는 뿌리 깊은 성차별구조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그래서 여성혐오(misogyny)라는 단어도 싫어하다는 의미의 그리스어 ‘misein’과 여성을 의미하는 ‘gyne’의 합성어로 여성을 멸시하고 대상화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 시인 소포클레스는 “여자는 보아야 하는 것, 그 말은 듣지 말아야 한다”며 사실상 여성들이 말할 기회도 인정하지 않았다. 즉 여성을 동등한 인격적 주체로 인정하는 않는 여성혐오는 성차별주의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물질적 토대가 있다. 단순히 싫어하는 감정이 아니다. 따라서 혐오표현이나 혐오 범죄를 없애기 위해서는 표현을 규제하는 것만이 아니라 혐오표현의 물질적 기반인 차별의 구조를 해체하는 것이 동반돼야 한다. 인종주의와 성차별주의는 혐오의 산실이다. 즉 동성애나 트랜스젠더 등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도 성소수자의 시민권이 보장되지 않는 한 지속될 수밖에 없다.

또한 혐오는 타자화와 맞닿아있다. 타자화는 ‘순수한 나’를 지키기 위해 나와 다른 것을 나보다 낮은 것, 나쁜 것으로 여기게 만든다. 마사 누스바움은 혐오감을 통해 이를 설명한다. “입 안에 고인 침은 삼킬 수 있지만 컵에 뱉은 침은 삼킬 수 없듯이, 혐오는 내가 나로부터 분리한 속성을 나와 다르다고 구분지은 타자에게 부여하며 느끼는 감정이다. 되기 싫고 나쁘다고 여겨지는 속성들을 타자에게 부여한 뒤 타자를 약하며 악한 것이라고 혐오함으로써, 나는 선하고 무결하며 우등한 주체가 되는 것이다. 혐오는 주체가 스스로 선함과 우월함을 만들어내는 과정에서 활용되는 감정이기에, 본질적으로 정치적일 수밖에 없다.” (‘혐오와 수치심’)

최근 제주도에서 벌어진 난민혐오가 그렇다. 막연히 나와 다르다고 여겨지는 존재, 낯선 이들은 나를 위협할 것이라는 두려움이 혐오로 변질된다.

그래서 혐오는 사회의 모든 불안을 드러낸다. 불안이 투영된 혐오가 사회적 소수자를 공격한다. 여성이 안전하지 않은 세상에서 성폭력에 대한 두려움이 난민에 대한 두려움으로 탈바꿈하고, 취업이 어려운 현실이 여성들이나 이주자들이 일자리를 빼앗았다는 박탈감으로 둔갑한다. 불평등한 사회구조의 문제를 더 약자인 자들에게 화살을 돌리는 방식으로 혐오가 확산된다. 한마디로 불평등한 사회가 혐오를 부추기는 것이다.

제주시 노형로터리에서 제주난민대책도민연대를 비롯해 예멘 난민 수용을 반대하는 단체들이 집회를 열어 무사증 제도 폐지 및 난민법 개정 등을 촉구했다
제주시 노형로터리에서 제주난민대책도민연대를 비롯해 예멘 난민 수용을 반대하는 단체들이 집회를 열어 무사증 제도 폐지 및 난민법 개정 등을 촉구했다ⓒ뉴시스

‘혐오’란 용어의 난립, 차별구조를 이해하기 어렵게 해

그런데 여성혐오에 대한 미러링을 남성혐오라고 하거나 특정 권위 집단에 대한 비판행위에 대해 혐오라고 붙이기는 어렵다. 여성은 남성에 종속돼야 한다고 주장하는 극우근본주의 개신교에 대한 조롱을 개신교혐오라고 하지 않는다. 그러한 맥락에서 천주교를 비판하기 위해 성체를 훼손한 것은 종교모독행위이지 천주교혐오라고 하기 어렵다. 한국에서 두 종교는 소수종교가 아니다. 이렇게 비난행위나 모독행위를 다 혐오라고 명명하는 것은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차별구조를 이해하기 어렵게 만든다.

반면 쌍용차 30번째 희생자 고 김주중 조합원을 추모하는 대한문 분향소를 설치하던 날, ‘태극기혁명국민운동본부’(이하 태극기본부) 사람들이 쌍용차 희생자와 동료노동자들을 조롱하고 모욕하는 발언을 쏟아냈다. ‘시체팔이’니 하며 해고자들을 모욕했는데 이는 혐오라 할 수 있다. 우리 사회에서 노조(활동을 하는 사람)에 대한 혐오와 사회적 약자인 해고자에 대한 비난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혐오를 중단시키는 것은 무엇인가. 혐오세력에 대해 혐오감을 느낀다고 해결되지 않는다. 그들(사람)과 그들의 행위를 주의 깊게 구분해야 한다. 그들의 언행이 어떻게 인간의 존엄과 인권의 가치를 훼손하는지를 또박또박 비판하고 규제하고 사회적 소수자들을 차별하는 제도와 관행을 바꾸는 일이다.

그런데 한국 사회에서 혐오가 개별 사람들에 의해 자연스레 확산되기보다 혐오를 확산시키는 세력이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혐오는 확산성을 특징으로 하는데 혐오세력의 활동이 우리 사회 혐오(문화)를 확산시키기 때문이다. 그들은 주로 교회를 기반으로 한 극우기독교세력이거나 보수정치인(정당)을 기반으로 한 정치세력이다. 이들의 활동에 대한 규제가 필요하다. 특히 정치인과 고위공직자가 하는 혐오표현에 대한 법적 규제는 필수적이다. 정치인과 고위공직자의 정치적 권위와 영향력이 커서, 사람들은 이들이 하는 말들을 혐오표현이라고 자각하기 어렵기 때문에 더 쉽게 확산된다. 특정 정당의 경우, 혐오를 정치적 지지를 얻기 위한 수단으로 여기는 경우도 있어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 등 혐오표현에 대한 제도적 규제방안이 어느 때보다 필요한 시기다.

명숙 인권운동네트워크 바람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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