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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민보] “열심히 해봐” 건물주의 배려를 백여명의 예술가에게 갚은 ‘공간사일삼’
공간사일삼 운영자 김윤익씨
공간사일삼 운영자 김윤익씨ⓒ기타

“법에서 임차인의 권리를 보호해주는 기간이 5년이잖아요? 5년 됐을 때, 사장님을 찾아갔어요. 처음 공간을 만들었던 친구들도 각자의 사정 때문에 흩어지면서 보증금도 빼간 상태였죠. 월세도 3개월이나 밀려 있었어요.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고 갔습니다.”

10년가량 서울 영등포구 문래동에서 문화공간 ‘공간사일삼’을 운영해온 김윤익(32)씨. 그는 재계약을 위해 다시 건물주를 찾아갔던 ‘운명의 날’을 떠올렸다.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며 마치 어제 일처럼 술술 이야기를 쏟아냈다.

그가 떨리는 마음으로 건물주를 찾아갔던 2015년 11월 그날을 기점으로 그와 수많은 예술가가 거쳐 간 ‘공간사일삼’의 운명이 정해졌다. 그날 이후 다시 살아난 ‘공간사일삼’은 지금까지 수많은 예술가들에게 생명력을 불어넣고 있다. 최빛나, 엄유정, 강정석, 이수경, 한진, 김정태, 구나, 신민, 다이애나 밴드 등 120여명의 젊은 예술가들이 활동을 이어갈 수 있는 발판이 됐다. 문화예술에 갈증을 느끼는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지면서 문래동에 활기를 불어 넣었다. 건물주 한 사람의 선의가 얼마나 많은 이들에게 새로운 기회가 될 수 있는지 확인 할 수 있는 사례가 됐다.

초대 레지던스 작가인 심혜린씨와 김윤익 작가가 결혼할 당시 ‘공간사일삼’ 앞에서 찍은 사진.
초대 레지던스 작가인 심혜린씨와 김윤익 작가가 결혼할 당시 ‘공간사일삼’ 앞에서 찍은 사진.ⓒ김윤익 작가 페이스북
문래동 문화공간 ‘공간사일삼’으로 가는 길
문래동 문화공간 ‘공간사일삼’으로 가는 길ⓒ민중의소리

철공단지 문화공간 ‘공간사일삼’

지난 26일 내리쬐는 햇볕과 문래동 미로처럼 펼쳐진 철공단지를 찾았다. 허름한 1-2층 높이의 공장건물들이 빼곡했다. ‘○○ CNC 금속가공 진공금형’, ‘○○조각’, ‘○○기계’, ‘신발 작업복’, ‘○○전기도소매’, ‘○○정밀’, ‘개나리 슈퍼’ 등 오래된 간판들은 나 좀 봐달라는 듯 빛바랜 색을 뽐내고 있었다.

문래역에서 내려 10분가량 걸었을까, 등 뒤로는 구슬땀이 흘러내렸다. 그늘도 없는 골목을 누비다가 다다랐다. ‘여기일까?’ 하고 들어선 골목이었다. 철공단지에 너무나 자연스럽게 섞여있으면서도 독특한 분위기를 띄는 건물 하 나가 보였다. 기어오른 담쟁이가 공장을 포근하게 감싸주고 있었고, 덩굴 위로 ‘SPACE 413’(공간사일삼) 네온사인 간판이 걸려 있었다. 더위로부터 벗어날 수 있겠구나, 안도의 한숨을 쉬며 들어서는데 누군가 문을 열고 나왔다. 김윤익 작가였다. 커다란 덩치에도 불구하고 푸근한 미소로 상대를 안도하게 하는 매력을 지닌 사람이었다.

마침 공간 위층에선 ‘포유류 대장간’이란 제목의 전시도 열리고 있었다. 간이식으로 설치된 철제계단을 타고 옥탑방 같은 2층으로 올라서려는데, 관람료를 내야했다. 관람료는 2000원. 그리 부담되는 금액은 아니었기에 별 생각 없이 천원짜리 지폐를 꺼내서 함에 짚어 넣었다. 관람료 함에는 보일 듯 안보일 듯 작은 글씨로 다음과 같은 문구가 적혀 있었다.

‘공간사일삼의 전시 입장 수익금은 다음 공간 사용자의 전시 지원금으로 릴레이 전달됩니다.’

‘공간사일삼’은 전시를 관람하러 온 관객들로부터 2000원의 관람료를 받는다.
‘공간사일삼’은 전시를 관람하러 온 관객들로부터 2000원의 관람료를 받는다.ⓒ민중의소리

‘너와 나와 연결고리’

전시 수익금이 다음 전시를 준비하는 작가에게 전달된다니 무슨 말일까? 보통 전시를 통해 벌어들인 수익금은 공간을 운영하는 운영자의 몫이거나, 해당 전시작가의 ‘아티스트 피(artist fee)’로 돌아가는 게 일반적이다. 그런데 다음 작가에게 전달된다니, 선뜻 이해하기 힘들었다.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자 김윤익 작가는 설명했다.

“이 돈은 다음 작가가 전시를 준비하는데 사용돼요. 물론 ‘내가 열심히 한 만큼 성과를 가져가는 것’도 좋지만, 그리 큰 금액도 아니기에 다르게 사용하는 방법을 생각해봤어요. 다음 전시작가에게 넘겨주면 어떨까 궁금했어요. 실행에 옮겨봤죠. 작가들의 반응은 너무 좋았어요. ‘나도 관객이 많아야 할 텐데!’, ‘전시 열심히 준비해야지!’ 이런 말을 하시더라고요. 앞선 작가가 열심히 한 덕에 모인 금액을 소중히 여기고, 다음 작가를 위해서 자신도 열심히 하겠다고 다짐하는 걸 느꼈어요.”

동기부여가 생겨나는 또 다른 창구였다. 개인의 이기심과 욕망이 가득한 사람들의 경쟁으로 이 사회가 움직이고 있다고 무심코 믿고 있던 기자의 뒤통수를 때리는 소리였다. ‘입장료 시스템은 크게 홍보해야 할 가치가 있다’며 호들갑떠는 기자에게 그는 말했다.

“너무 의미와 가치를 사람들에게 보여주기보단, 작가들 안에서만 서로 공유됐으면 해요. 관객들은 재정적으로 어려운 작가들을 도와준다는 느낌이 아니라, 그에 합당한 값을 지불하고 전시를 봤다고 생각했으면 좋겠어요. 그래야만 우리가 만들어가는 문화도 사람들에게 설득이 되는 장르가 되지 않을까 생각해요.”

공간사일삼의 독특한 시스템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처음엔 아는 친구들끼리 시작했던 작업공간이 지금은 수많은 예술가들이 거쳐 가는 레지던스 공간으로 탈바꿈했다. 레지던스란, 뜻이 맞는 예술가들이 일정 기간 머무르며 예술활동을 하는 프로그램의 일종이다. 지금도 이 공간엔 김윤익 작가를 포함한 3명의 작가가 작품활동 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다. 게다가 공간운영자와 입주작가의 관계를 수평적으로 형성하면서 특색 있는 레지던스 공간이 됐다. 입주작가가 원할 때는 언제든 공간 운영자로서의 기획과 의견제시가 가능토록 문을 열어둔 것이다.

전시공간을 활용하는 매뉴얼도 다른 곳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점이다. ‘공간사일삼’ 홈페이지엔 ‘접속-방문-협의-인터뷰-디자인-홍보-사용-복구-전달-출판’으로 이어지는 각 단계별 사용방법이 상세히 소개돼 있다. 이런 시스템 덕분에 예술가들의 접근의 문턱은 낮아졌고, 다양한 예술가들이 실험적으로 작품을 발표할 수 있는 공간이 됐다.

김윤익씨와 동료 작가들은 4달가량의 공장 리모델링 과정을 기록해 전시했다.
김윤익씨와 동료 작가들은 4달가량의 공장 리모델링 과정을 기록해 전시했다.ⓒ공간사일삼
담쟁이가 공간사일삼 건물을 덮고 있는 모습.
담쟁이가 공간사일삼 건물을 덮고 있는 모습.ⓒ공간사일삼

첫 번째 위기이자 기회, ‘공간사일삼’의 시작

시작은 평범했다. 미술을 전공한 학생들이 처음 작가로 첫발을 내딛는 순간과 다름없었다. 지방에 있는 한 대학에서 동양화를 전공하다가 중퇴한 그는 2009년경 마음이 통하는 친구 2명과 작업실을 구하러 다니기 시작했다.

당시 한국사회엔 외환위기가 덮쳐 미대생들이 그나마 자생할 수 있는 길조차 사라지고 있던 상황이었다. 특히 기존의 미술생태계가 무너져 내리면서 작품을 발표하고 연구할 수 있는 공간들이 하나 둘 문을 닫을 때였다. 그럼에도 작가가 되고 싶었던 그들은 서울 도심 곳곳을 돌아다니며 함께 쓸 수 있는 작업공간을 찾아다녔다. 그러다 눈에 들어온 곳이 문래동 철공단지였다. 마침 산업환경 변화로 철공소들이 도심 외각지로 빠져나가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집값이 싸게 나온 곳이 있었다. 이 빈 공장은 차가 드나들기 힘든 골목에 위치해 있었다. 지금의 ‘공간사일삼’이다.

그는 처음 건물주를 만났을 때를 떠올리며 말했다.

“어떤 목적으로 이 공간을 사용하려고 하느냐고 저희에게 물었어요. 공장을 운영하는 사람도 아니고, 젊은 애들이 와서 공장을 빌려달라고 하니 당연한 질문이었죠. 그래서 저희는 미술작업하는 친구들이고, 공장을 공동작업실로 쓰려고 한다고 설명했죠. 그리고, 안 그래도 낮게 나온 임대료를 더 낮춰달라고 했어요. 많이 난감해 하셨어요.”

부동산에 나와 있던 공장 월세는 120만원이었다. 그런데 건물주는 월세를 70만원까지 낮춰줬다. 이들에겐 행운이었다. 당시 서울 도심 어딜 가도 그만한 공간을 월세 70만원으로 사용하는 경우는 없었다. 보증금은 1000만원이었다. 3명이서 나눠서 낼만한 금액이었다. 그럼에도 돈이 없었던 이들은 월세방 보증금과 저금통을 깨서 마련했다.

그렇게 구한 공장을 그들은 자신들 만의 작업공간으로 바꾸기 시작했다. 공장이었다고는 하지만, 오랫동안 비어있던 곳이라 쓰레기가 쌓여 있었고 전기선조차 깔려있지 않았다. 십시일반 돈을 모으고, 주변 철공단지를 돌아다니며 폐자재들을 주었다. 막아야 할 구멍에 덧대고, 무너져 내리는 천장을 보강했다. 공사는 꼬박 4개월이 걸렸다. 작품을 만들 듯 정성을 쏟았다. 그 과정을 사진과 영상으로 기록했다. 그래서 열린 첫 전시가 바로 ‘문래동 공장과의 즐겁지만 않은 네 달간의 대화’다. 작업공간을 조성하는 과정을 전시로 소개한 것이다.

“주변 친구들이나, SNS에서 본 젊은 친구들이 알음알음 많이 왔었어요. 저희가 포스터를 만들어서 미대에도 보내고 그랬거든요. 그 뒤로 이 공간에서 전시하고 싶다는 친구들도 연락이 왔어요. 그게 시작이었죠.”

‘공간사일삼’에서 열린 첫 전시 ‘문래동 공장과의 즐겁지만 않은 네 달간의 대화’
‘공간사일삼’에서 열린 첫 전시 ‘문래동 공장과의 즐겁지만 않은 네 달간의 대화’ⓒ공간사일삼

두 번째 위기이자 기회, ‘운명의 날’

공간 운영은 쉽지 않았다. 돈이 되지 않는 작품활동을 업으로 한다는 건 동료들이 있어도 힘든 일이었다. 결국 한 사람씩 생계를 찾거나 새로운 길을 모색하기 위해 떠났다. 떠날 때마다 남아있는 사람들의 부담은 늘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한 방법으로 새로운 작가들을 모집해야만 했다. 이는 레지던스 공간이 된 배경이기도 했다.

진짜 위기는 5년이 됐을 무렵 찾아왔다. 현행법상 임차상인들이 보호받을 수 있는 법적 기간은 5년이다. 원치 않더라도 건물주를 만나서 재계약을 해야 하는 상황이 온 것이다. 원년멤버들이 나가는 바람에 보증금도 빠져 나간 상황인데다가, 월세까지 3개월치가 밀려 있었다. 당시 문래동은 예술가들이 몰려들기 시작하고, 곳곳에 카페가 생겨나면서 점차 활기가 돋고 있었다. 건물주가 원한다면 월세와 보증금을 올려야 했다. 목돈이 없었던 그로선 쫓겨날 위기였다.

5년 동안 많은 예술가들의 실험적인 작품발표가 이루어졌었고, 원년 멤버가 나갔어도 새로운 작가들이 레지던스에 참여하면서 또 다른 문화예술적 공간으로 다시 태어나고 있는 ‘공간사일삼’을 그는 이대로 포기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동안 ‘공간사일삼’에서 있었던 이야기들이 담긴 기록물과 자신의 작품까지 바리바리 싸들고 김포에 있는 공장으로 향했다. 김포 공장은 문래에서 처음 사업을 시작한 건물주가 공장을 확장하면서 이사한 곳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어렸던 것 같아요. 어린마음에 저는 공간을 후원해달라고 요청하기 위해 갔어요. 저희 나름대로 이곳을 의미 있게 키워가고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건물주를 만나 공간을 후원해달라고 하니, 코웃음을 치셨죠. 그런데 그분이 기분나빠하진 않으셨어요. 오히려 제가 갖고 간 기록물들을 찬찬히 보셨어요. 그때 그분이 오래된 기계를 하나 보여주셨어요.”

건물주가 처음 문래동 공장에서 혈혈단신으로 사업을 시작하면서 썼던 기계였다. 지금은 고물이 되어버린 그 기계는 그와 함께 사업을 키운 동지였다. 김윤익 작가의 도전이 그의 젊은 시절을 떠올리게 한 것이다.

“뭔가 해보겠다는 저를 보니, 공감도 가고 응원하는 마음이 생긴다고 했어요. 후원까진 어렵지만, 보증금 없이 월세만 기존 수준에서 받겠다고 하셨어요. 밀린 월세는 어떻게든 내라고 하셨죠. 다만, 월세가 두 달 이상 밀리면 자동으로 나가야 한다는 특약을 걸었어요. 그게 제게도 열심히 하는 계기가 될 거라고 했죠.”

김윤익 작가 등의 전시가 열리고 있던 테이크아웃드로잉에 용역이 집기들을 강제로 꺼내는 상황.
김윤익 작가 등의 전시가 열리고 있던 테이크아웃드로잉에 용역이 집기들을 강제로 꺼내는 상황.ⓒ김윤익 작가 페이스북

“마음이 한 번 더 따뜻해지는 특별한 경험”

“너무나 고마웠다”고 김윤익 작가는 말했다. 고마움의 표시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다. 그는 “사무실 곳곳에 제 작품을 착착 걸어드렸다. 그걸 보시면서 한참을 웃으셨다”며 당시 상황을 떠올렸다. “그 자리에서 재계약 사인도 해주셨어요. 그런데 5년 뒤에는 너도 나처럼 나가야하지 않겠냐, 성공해서 더 좋은 곳을 가라고 했어요. ‘감사합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라고 했죠.”

비슷한 시기, 김윤익 작가는 정반대의 상황을 경험하기도 했다. 한남동에 있는 한 전시공간 ‘테이크아웃드로잉’에서 전시를 하던 중 해당 건물의 건물주가 강제집행을 위해 전시장에 용역을 투입한 것이다.

지금은 자리를 옮긴 복합문화공간인 ‘테이크아웃드로잉’은 한 때 건물주가 바뀌면서 건물주와 극심한 갈등을 치른 바 있다. 3차례의 강제집행이 있었고, 용역들이 집기를 모두 끄집어내는 상황이 벌어졌다. 당시 이곳에는 김윤익 작가를 비롯한 동료 작가들의 작품이 걸려 있었다. 자칫 작품들까지 훼손될 수 있는 위험한 순간이었다. 김윤익 작가는 “근처에 아내와 함께 있다가 너무 놀라서 달려갔었다”며 당시 상황을 떠올렸다.

상반된 경험을 갖고 있던 그에게 ‘공간사일삼’ 건물주의 배려는 그만큼 특별했다. 김윤익 작가는 말했다. “예술가들이 있는 곳이 땅값이 올라서 나가게 되는 젠트리피케이션은 흔한 이야기에요. 그런데 한 사람의 선의로 공간이 유지될 수 있고, 촉박한 마음을 안 가지게 되면서 마음이 한 번 더 따뜻해지고, 그게 제가 작가들을 대하는 태도로도 연결이 되는 걸 느꼈어요.”

김윤익 작가에겐 세상을 좀 더 따뜻하게 바라볼 수 있는 여유가 생겨나고 있었다.

“그때까지 저는 그 세대 어른에게서 받았던 좋은 경험이 별로 없었어요. 항상 괴리감과 단절감을 느끼며 살아왔던 게 사실이에요. 그분들만의 드라마라고 생각하고 살아왔었죠. 그런데 정말 놀라운 경험이었어요. 한 번도 그런 적 없었기에…”

이승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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