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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애화 칼럼] 먹방 중독 사회
밥블레스유의 한 장면.
밥블레스유의 한 장면.ⓒOlive 캡쳐

꿈꿀 수 있는 욕망의 대상

짧은 기간 동안 미국에서 살았던 적이 있었다. 벌써 20여년 전의 일이다. 그때 영어를 배우기 위해서 TV를 즐겨봤는데, 신기한 프로그램은 유명인의 집, 취미 등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수준이 평범을 넘어서고 있었다. 풀장은 말할 것도 없고, 요트 생활, 해외의 별장 그리고 사냥을 하고, 스포츠카를 타고, 비행기를 직접 조종하는 셀렙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 속에는 값비싼 희귀한 재료로 직접 요리하는 셀럽의 모습도 빠지지 않았다. 별천지 같은 생활이 펼쳐지고 있었다. 더 놀라운 것은 그런 화려한 생활이 일반 대중 프로그램으로 전파되고 있다는 점이었다.

당시 나는 이민자들의 동네에 살고 있었다. 나의 이웃이던 라티노, 아시안들은 그런 TV 방송 내용에 나처럼 부정적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그저 다양한 생활 패턴으로 받아들이고 있었고, 방송을 통하여 대리만족을 하고 있었다. 사실 그들은 방송에서 보여주는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이민 온 사람들이었다.

재미있는 것은, 나도 그런 방송에 점점 중독되고, 멋진 풍광, 생활을 간접적으로나마 체험할 수 있는 기회를 즐기게 되었다는 점이다. 그것은 시청 후 갖게 되는 허망함보다 더 큰 중독 효과가 있었다. 마치 약 먹은 듯 시청 후에도 화려함에 내가 잠기어 있는 상태를 발견하기도 했다. 잠시나마 고단한 미국생활을 잊는 효과도 있었다.

다행인지 한국은 아직도 이런 종류의 프로그램은 덜한 편이다. 몇몇 아이돌 가수가 스포츠카를 타고 요트 파티를 하는 것을 방송에서 본 적이 있다. 그런데 그들의 그런 모습은 개인적 허세로, 희화화되고 있었다.

미국식 자본주의를 꿈꾸던 한국의 경우, 7080년대까지만 해도 절제와 성실함이 사회적· 개인적 미덕으로 여겨졌다. 1990년대에 들어서면 그런 미덕이 미국식 소비 패턴으로 보상을 받을 것이라고 기대했지만 그렇지 못했다. IMF 사태와 2007년 금융위기로 휘청거렸고, 소득의 불평등 차가 극심해진 상태가 되었다. 셀럽이 등장하여 시청자의 쾌락과 욕망의 신경을 자극하며 더 많은 소비, 더 높은 소비를 자극하는 사회를 만들기는 힘들어졌다. 패션, 화장 등을 전파하는 케이블 방송이 있는데, 이런 프로들은 경쟁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여자에게 강요되는 메이킹을 돕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한국에는 다른 소비와 쾌락의 본능을 자극하는 방송이 있다. 먹방이다. 먹방은 서민들의 음식에서, 인생에서 몇 번 먹을까말까 하는 음식까지 다양하게 소개되고 있다. 소개를 넘어 그 음식을 게걸스럽게 즐기는 모습이 쉽게 잡힌다. 예전의 기준대로 말하면, 먹지 못해 죽은 귀신이 붙은 듯 모두가 음식을 게걸스럽게 먹어 치우고 있다.

요트, 스포츠카라면 나의 욕망대상이 될 수 없지만, 음식은 그렇지 않다. 조금만 노력하면 즐길 수 있는 욕망 대상인 것이다. 한우처럼 값비싼 음식을 매일 먹을 수는 없어도 그 맛을 상상할 정도는 경험할 수 있다. 불안한 경제 상태와 외식이 많아지는 생활 패턴 속에서, 시청자들이 정서적 거부반응을 갖지 않으면서, 그들의 사회적 허기를 달래고 있는 것이 먹방이다.

밥블레스유의 한 장면.
밥블레스유의 한 장면.ⓒOlive 캡쳐

음식중독 또는 음식힐링

음식은 중요하고 우리 생활의 중심에 있다. 예전의 드라마를 보아도 밥상을 중심으로 가족이 둘러앉아 있는 모습, 음식을 장만하는 가족의 그림은 심심치 않게 나온다. 음식은 우리 생활과 깊이 관련되어 있고, 너무 익숙해서 사회적 핫심 이슈가 되지 못했다. 우리가 음식 이야기를 이렇게 많이 한 적이 있었을까.

이제는 먹방이 넘쳐서 다른 방송 장르로도 진입하기 시작했다. 여행, 예능, 시사토크, 상담 등에 먹방이 결합하기 시작했다. 먹방과 거리가 있던 방송프로가 이렇게 변화한 것을 밥상머리에서 하는 실제생활을 반영한 것이라는 변명이 있다. 그러나 이런 프로가 먹방 틀을 얼마나 벗어날 수 있을까?

그 중 하나로 요즘 관심을 끄는 것이 ‘밥블레스유’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 프로의 MC들을 좋아한다. 이들 캐릭터 때문에 이 방송을 보았다. 싱글 중년들이 한꺼번에 나와 펼칠 입담에 대한 기대가 컸다. 여성들의 우정만으로 즐거운 생활, 프로를 만들 수 있기를 바랐다.

그들은 먹는다. 먹으면서 시청자들이 보내온 고민상담을 한다. 애인과 헤어졌을 때, 상사와 불화가 있을 때 등 고민 상담을 하고 힐링 푸드를 추천한다. 프로의 이름처럼 음식이 축복이 된다는 의식이다. 그러나 나는 유감이다. 상담을 해서가 유감이 아니라 결국 먹방을 못 벗어났기 때문이다. 못 벗어난 것이 아니라 먹방을 확장시켰다. 밥블레스유를 보고 시청자가 기억 하는 것은 그들의 토크가 아니라 음식이다. 결국 음식을 파는 식당을 포털에서 검색한다.

내가 먹방에서 느낀 유감스런 점을 밥블레스유도 피해가지 않았다. 우선 육식이 과도하게 많다는 점이다. 이 점은 내가 육식을 최대한 줄여야 한다는 태도를 갖고 있기 때문에 거슬린다. 두 번째로 음식을 괴물 수준으로 지나치게 많이 먹는다는 점, 이는 중독을 보여주는 것이다. 상업적 흥행을 위해 중독까지 힐링으로 둔갑하여 팔고 있다. 마지막으로 그 소비 정도가 일반 서민이 쉽게 접근하기 힘든, 비현실적으로 풍성한 만찬이라는 점이다. 소확행을 외치지만 누구나 누릴 수 있는 소확행은 아니다.

음식이 힐링이 된다는 점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돈과 시간의 한계로 얻을 수 있는 그 힐링의 품목이 음식뿐이라면 다른 문제이다. 먹는 것을 통해 느끼는 쾌락을 중요시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는 현상을 가벼이 보기 힘들다. 내가 밥블레스유를 보면서 팀 버튼 감독의 ‘찰리와 초콜릿공장’을 연상한 것은 과도한 상상일까. 중독되어 있는 사람들의 결말은 영화의 마지막까지 가면 알 수 있다. 그 마지막을 우리가 꼭 봐야 하는가.

먹방이 많은 것은 한국경제의 비정상성, 음식 자영업자가 많은 경제 상태를 또한 표증하고 있다. 건강을 걱정하여 먹방 프로그램을 규제하자는 주장도 있으나, 이것이 효과가 있을지 의문이다. 국가주의라는 자유한국당식 주장에 동의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 경제의 구조적 결함 때문이다.

먹방은 시청자 개인에게 무엇을 남기나. 소확행으로서 힐링을 전달하는가. 먹방은 재미와 정보 전달하는 수준을 넘어섰다. 먹방은 욕망이 거세된 사회에서의 대체물이며, 동시에 다른 중독을 만드는 매체가 되었다. 거세된 욕망의 자리를 허접한 중독으로 채우고 있다. 먹는 행위는 지극히 개인적 행위이면서, 사회적 행위의 기초이다. 중독된 것은 개인이지만, 먹방이 넘치는 중독 현상은 사회적 문제이다. 사회적 먹방을 벗어나, 중독도 아닌 탐욕도 아닌 다양한 소확행이 가능한 사회를 꿈꾸어 본다.

김애화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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