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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우리가 외면한 ‘또 하나의 한국인’ 혼혈인의 삶을 기록하다
빌린 박씨 92년10월 서울 장안동 _ 박근식(40세) 회원이 한국혼혈인협회 사무실 앞에서 장난스런 표정하고 하고 있다.
빌린 박씨 92년10월 서울 장안동 _ 박근식(40세) 회원이 한국혼혈인협회 사무실 앞에서 장난스런 표정하고 하고 있다.ⓒ류가헌 제공

1970년 초여름 수십 알의 수면제를 삼키고 쓰러진 한 사내가 발견됐다. 그의 주민등록상 이름은 박근식. 그러나 ‘피터’라고 더 자주 불렸다. ‘피터’의 양복 안주머니에는 대통령에게 보내는 진정서가 들어있었다. 혼혈인으로서의 삶에 대한 절규와 처우개선을 요구하는 내용이었다.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그는 이후 혼혈인들의 권리를 찾기 위해 투쟁했다.

이 사건은 우리 사회에 그동안 감춰진 혼혈인들의 문제를 수면 위로 떠올리게 한 계기가 됐다. 미군이 이 땅에 주둔하기 시작하면서 미군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 수 많은 혼혈인들이 태어났다. 그들은 우리들 사이사이에 함께 살고 있었음에도 우리는 그들을 외면했다. 마치 순수한 그 무엇을 훼손하는 존재인양 숨기기 급급했다. 나와 다르다는 이유로 차별했다. 하지만 그들은 ‘이방인’이 아니라 우리와 같은 말을 하고, 우리와 같은 나라에서 살아가는 ‘또 하나의 한국인’이다. 이런 그들의 삶을 26년 동안 사진으로 기록해온 이가 있다. 바로 이재갑 사진가다. 이재갑 사진전 ‘빌린 박씨- 혼혈인에 대한 사진 보고서’가 오는 9월11일부터 30일까지 서울 종로 류가헌에서 열린다.

이 전시의 제목이 된 ‘빌린 박씨’는 혼혈인으로서의 삶에 대한 절규와 처우개선을 요구하며 서울행 열차에서 쓰러졌던 박근식 씨가 사진가 이재갑에게 한 이야기다. 이재갑은 “지금은 고인이 된 박근식 한국혼혈인 협회회장이 어느날 나에게 ‘어디 이씨’냐고 물었다. 자연스럽게 저는 ‘경주 이가’고 익제공파 38대손이라고 했다. 그랬더니 자신은 ‘빌린 박씨’라고 했다. 언뜻 이해가 되지 않아 되물었다. 당시에는 웃으면서 그랬다. 어머니의 성(밀양박씨)을 따라 박씨 성을 따랐지만 자신은 밀양 박씨가 아니고 ‘빌린 박씨’라고 했다. 그러면서 호탕하게 웃었는데 당시의 모습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93년 6월 경기도 양평 _ 청주로 귀촌해서 소를 키웠다. 혼혈인들이 자립해서 살아갈 수 있는 ‘공동체 농장’의 꿈이 이 무렵 싹을 틔웠다.
93년 6월 경기도 양평 _ 청주로 귀촌해서 소를 키웠다. 혼혈인들이 자립해서 살아갈 수 있는 ‘공동체 농장’의 꿈이 이 무렵 싹을 틔웠다.ⓒ류가헌 제공
93년 8월 경기도 양평 _ 후배들과 함께 모임을 가지고 있다. 혼혈인들이 나이가 많아 활동이 어려워질 때를 대비해 혼혈인전문 요양원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93년 8월 경기도 양평 _ 후배들과 함께 모임을 가지고 있다. 혼혈인들이 나이가 많아 활동이 어려워질 때를 대비해 혼혈인전문 요양원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류가헌

‘빌린 박씨’를 중심으로 혼혈인에 관한 기록 작업을 이어 온 이재갑은 ‘불편한 역사를 드러내 보여주는 치열한 리얼리즘의 사진가’로 불린다. 조선인 강제징용, 경산 코발트광산의 민간인 학살 등 한국 근현대사의 아프고 불편한 기억들을 사진으로 기록해왔다. 그런 그가 가장 오랫동안 지속한 작업이, ‘혼혈인 - 내 안의 또 다른 초상(1997)’, ‘또 하나의 한국인(2005)’ 등 한국전쟁 이후 태어난 혼혈인 세대들에 대한 다큐멘터리 사진 작업이다. 혼혈이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역사와 시대의 아픔이요, 우리 사회가 함께 풀어가야 할 과제라는 소명감이 1992년부터 30여 년을 이 작업에 천착케 했다.

여기서의 ‘혼혈인’은 해방 이후 한국전쟁과 미군 주둔의 시대상황 속에서 외국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 외모와 피부색이 다르게 태어난 아이들을 말한다. 우리 사회는 눈에 띄는 외모의 그들을 차별의 손쉬운 표적으로 삼았다. 근거 없는 순혈주의였다. 심지어 전쟁과 미군주둔이라는 역사적 배경이나 개별적인 진실은 보려하지 않고, 혼혈인과 그의 어머니들 모두를 ‘기지촌 여성과 자녀’로 매도하며 분리했다.

처음엔 수만 명에 달했던 혼혈인들은 냉대와 무관심 속에 대부분 한국을 떠나갔다. 전쟁고아들과 함께 수많은 혼혈아동들이 해외로 입양 보내졌고, 어릴 때 입양되지 못하고 한국에서 성장한 혼혈인들도 1982년, 미국에서 특별이민법이 통과되자 미국으로 떠났다.

98년 2월 경기도 양평 _ 방송국 촬영을 위해 찾아갔다. 만난 지 6년째 되던 무렵이다. 그때 피디가 “이재갑 씨는 어떻습니까?”하고 물었다. 그때 박근식 씨는 이렇게 답을 했다. “좋아는 하지만 아직 사랑하지는 않는다”라고.
98년 2월 경기도 양평 _ 방송국 촬영을 위해 찾아갔다. 만난 지 6년째 되던 무렵이다. 그때 피디가 “이재갑 씨는 어떻습니까?”하고 물었다. 그때 박근식 씨는 이렇게 답을 했다. “좋아는 하지만 아직 사랑하지는 않는다”라고.ⓒ류가헌 제공
2006년 1월 서울 여의도 시사프로그램 출연해 혼혈인 인권 및 처우 개선에과 일상 생활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2006년 1월 서울 여의도 시사프로그램 출연해 혼혈인 인권 및 처우 개선에과 일상 생활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류가헌 제공

저마다의 사연으로 떠나지 못한 천 여 명의 혼혈인들조차, 이제 노환과 질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있다. 기차에서 자살을 기도했던 혼혈인 청년도 2009년에 지병으로 생을 마감했다. 목숨을 살라서라도 알리고자 했던 70년 초여름 그날의 일은 어느 하루의 결기가 아니었다. 자신이 미군의 강압적인 폭력에 의해 태어났듯이, 수많은 혼혈인의 어머니들도 전쟁과 시대의 희생자였음을 알리고자 했다. 정식인가조차 내주려 하지 않는 ‘한국혼혈인협회’ 회장을 역임하며 일평생을 혼혈인을 왜곡하고 문제를 축소하기에 급급했던 국가를 상대로, 혼혈인들을 부끄러운 ‘전쟁의 부산물’로 여기는 사회를 상대로 끊임없이 생을 살랐다. 자립 농장을 만들어, 사회로부터 배척 당해온 혼혈인들이 독자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공동체를 꿈꾸기도 했다. 스무 살 자살 이후의 생 40년이, 다시금 수없이 잘게 나누어 자신을 죽이는 방식으로 항거하는 삶이었던 것이다.

이재갑 사진전 ‘빌린 박씨’는 이제는 고인이 된 혼혈인 1세대 박근식 씨의 삶을 통해 이 땅에 살았던 수많은 ‘빌린 박씨’들을 소환하는 전시다. 이재갑은 “한국에서의 혼혈인 문제는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역사와 사회의 문제다.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로 시작된 형님들의 삶이 26년 이상의 만남을 지속하면서 지금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출생과 깊은 연간이 있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2009년 1월 경기도 양평 _ 간이 비닐하우스를 만들고 있다.
2009년 1월 경기도 양평 _ 간이 비닐하우스를 만들고 있다.ⓒ류가헌 제공
2009년 1월 경기도 양평 _ 생일을 맞아 혼혈인 협회 사람들과 동생들이 형님 집을 찾았다. 아무도 그때는 이것이 마지막 생일상이 될 줄은 몰랐다.
2009년 1월 경기도 양평 _ 생일을 맞아 혼혈인 협회 사람들과 동생들이 형님 집을 찾았다. 아무도 그때는 이것이 마지막 생일상이 될 줄은 몰랐다.ⓒ류가헌 제공

권종술 기자

문화와 종교 분야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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