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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책]데이트 폭력, 불법촬영, 여성혐오가 넘치는 시대에 사랑은 가능할까?
김신현경의 ‘이토록 두려운 사랑
김신현경의 ‘이토록 두려운 사랑ⓒ반비

지난 8월25일 서울 종로구 서울역사박물관 앞에선 ‘그들만의 헌법 사법행정 항의집회’가 열렸다. 서울 도심에서 2주 연속으로 열린 항의집회에 수만명의 여성들이 함께했다. 지난 14일 비서 성폭행 혐의를 받아온 안희정 전 충남지사에게 1심 재판부가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피해자 김지은 씨의 진술과 검찰이 제시한 증거들이 안 전 지사에 대한 모든 공소사실을 합리적 의심 여지없이 증명한다고 보기 힘들다며 이같이 판단했다. 법정에선 피해자다움을 두고 논쟁을 하고, 정조라는 단어가 등장했다. 위력과 권력은 무시됐다. 그렇게 권력과 위력과 폭력의 구조가 빠져나간 채 권력형 성범죄는 결국 질투에 휩싸인 복수극처럼 각색되고 말았다. 여성들은 “성범죄자 무죄판결 사법부도 공범”이라며 항의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이 평등하지 않은 사회에서
남녀는 어떻게 자유롭고
평등한 사랑을 할 수 있을까?”
80년 전 나혜석이 던진
이 질문으로부터 우리는 자유로운가?

여성들이 거리로 나서게 된 이유는 단순히 이번 사건에 대한 항의 차원을 넘어선다. 우리의 일상에 자리 잡은 성폭력과 성차별의 현실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보여주는 장면이다. 하지만 포털에 올라있는 안희정 씨의 무죄 판결 기사에 달린 댓글 가운데 상당수는 김지은 씨에 대한 명예훼손에 가까운 비난이 대부분이다. 남성들이 역차별을 받는다는 주장과 페미니즘에 대한 노골적 반감을 드러낸 글들도 상당수다. 그런 댓글을 쓴 상당수가 남성들임을 생각하면 오늘의 현실을 두고 드러나는 인식의 차이가 상당함을 알 수 있다. 인터넷에는 수없이 많은 불법촬영 영상이 또 다른 경로로 유통되고 있고, 데이트 폭력 신고 건수는 매년 1000여 건 이상 증가해 2017년에는 1만 303건에 달하는 현실을 떠올려보면 이런 인식의 차이는 우리가 서로 다른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아닌지 의심해야 할 정도다. 여성들이 거리에서 “여성에게 국가는 없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것도 이런 현실 때문일 것이다.

더구나 더욱 공포스러운 것은 도처에 깔린 리벤지 포르노,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데이트 폭력은 성폭력의 현실이 삶의 가까운 부분에서 벌어지고 있으며 내게 가까이 있는 이들이 더욱 위험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여성과 남성의 친밀 관계, 특히 사랑 또는 연애가 평등하고 행복하기란 거의 불가능한 일처럼 보인다. 많은 여성들은 과연 어떤 남성을 신뢰할 수 있을지, 이 극심한 온도차를 극복하고 친밀한 관계를 맺어갈 수 있을지 절박한 고민에 휩싸여 있다. 여성학자이자 문화연구자 김신현경이 쓴 책 ‘이토록 두려운 사랑’은 왜 우리가 이런 ‘연애 불능 시대’까지 와버렸는지 그 과정과 맥락을 살펴보자고 제안하고 있다. 사랑과 연애를 향한 우리의 모순된 열망과 두려움이 형성되어온 과정을 성찰해보자는 것이다. 이 책은 한국 사회에서 연애 또는 친밀한 관계에 대한 기대가 어떻게 형성되고, 어떻게 왜곡되거나 훼손되어왔는지 세밀하고 현실적으로 파악해야만 우리가 지금 서 있는 지형을 정확히 판단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지난 8월18일 오후 서울 종로구 서울역사박물관 앞 도로에서 미투운동과함께하는 시민행동 주최로 열린 성폭력·성차별 끝장집회에서 참가자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지난 8월18일 오후 서울 종로구 서울역사박물관 앞 도로에서 미투운동과함께하는 시민행동 주최로 열린 성폭력·성차별 끝장집회에서 참가자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민중의소리

김신현경은 젠더와 섹슈얼리티를 키워드로, 한국의 대중문화 및 현상을 텍스트로 삼아 멀게는 신여성들로부터, 가깝게는 87년 민주화 이후 한국 사회의 변동과 관련해 우리의 사랑/연애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를 살펴본다. 이 책은 이런 오랜 관찰 및 한국 근현대사에 대한 깊은 이해를 토대로, 서구와는 다른 근대화 과정을 거친 ‘한국’이라는 장에서 ‘사랑’이 지녀온 다양한 의미망들을 하나하나 풀어내서 이해하려는 노력의 산물이다.

“사랑과 연애는 오늘날 우리가 원하는 자유와 평등이 가장 첨예하게 각축을 벌이는 장이 되었고, 이런 긴장과 갈등은 섹슈얼리티를 통해 표출되며, 경제와 결혼 그리고 가족은 예전보다 더욱 복잡하게 얽혀 사랑에 대한 우리의 기대에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사실들이 바로 사랑과 연애에 대한 우리의 기대를 설렘보다는 혼란 또는 두려움으로 채색하고 있는 원인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이 평등하지 않은 사회에서 남녀는 어떻게 자유롭고 평등한 사랑을 할 수 있을까?” 이 책은 현재의 ‘연애 불능 시대’를 진단하기 위해 먼저 80여 년 전 나혜석이 ‘이혼 고백장’에서 제기한 질문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신여성들이 주장했던 ‘자유연애’는 타고난 신분에 얽매이지 않는 개인들 간의 만남이었음을 지적하며, 신여성들의 문제의식이 지금 여기 우리가 던지고 있는 질문과 크게 다르지않음을 환기시키는 것이다. 같은 문제의식은 ‘연애의 시대’ 90년대에 이르러 다시 한 번 폭발적으로 터져 나왔다. 한국의 맥락에서는 87년 민주화 이후 개인의 인권과 자유라는 개념이 지배 담론으로 대두되고, 전 세계적 맥락에서는 냉전 이데올로기에서 자유로워진 시기다. 이 책은 당시 영 페미니스트 운동에서도, 그리고 대중적으로도 ‘연애’가 다른 어떤 존재로도 환원되지 않는 ‘개인’의 고유한 개성을 드러내는 장이자, 자유롭고 평등한 개인 간의 만남을 위해 변화가 일어나야 하는 핵심적인 장으로 등장했음을 짚어낸다.

“사랑 이야기가 사랑으로만
이루어져 있지 않고,
권력의 차이와 폭력을 뼈대로 하고
있다는 걸 알아챈 당신이라면
꼭 한번 읽어볼 만하다.”

점점 더 열악해지는 경제적 상황, 막 싹을 틔우려다 중단된 인권 담론, 생존부터 친밀성까지 모든 것을 개인이 해결해야 할 문제로 강제해온 경제위기 이후의 2000년대를 거슬러 살펴본 뒤, 저자는 그렇다면 여성들과 남성들의 연애에 대한 각기 다른 기대는 어떻게 지금과 같은 형태에 도달했는지를 짚는다. 먼저 미디어에서 여성이 욕망하는 대상으로 제시되어온 ‘나쁜 남자’의 형상 변화를 통해, 성적 욕망의 주체가 되고 싶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대상화를 피할 수 없는 여성들이 처한 곤경과 모순을 읽는다. 이어서 한국 특유의 가족 형태로부터 형성되어온 한국의 남성성과 그 변화를 군사독재시기부터 디지털 세대까지 분석한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자기계발의 첨병으로 살아온 여성 주인공과 판타지적 남성상을 등장시켜 사랑이란 무엇인지를 묻는 드라마 ‘밀회’를 통해, 책 전반을 통해 해온 다소 어두운 현실 진단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왜 사랑 또는 친밀성을 이야기해야 하는지 그 실마리를 제공한다. 페미니즘 문화연구자로서 저자의 새롭고도 고유한 해석들은 우리가 현재 발 딛고 서 있는 지형이 어디인지를 파악하게 해주는 동시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폭력과 공포를 넘어선 새로운 사랑 이야기가 가능할 것인지 고민하도록 돕는다.

소설가 정세랑은 “사랑 이야기가 사랑으로만 이루어져 있지 않고, 권력의 차이와 폭력을 뼈대로 하고 있다는 걸 알아챈 당신이라면 꼭 한번 읽어볼 만하다. 이 책의 정교한 질문들은 결국 하나로 모여, 우리를 순응하고 안주하게 만들지 않을 새로운 사랑 이야기가 가능할 것인지 묻는다”며 ‘이토록 두려운 사랑’을 추천했다.

김은실 이화여대 여성학과 교수는 “사랑과 연애는 누구와 행복하게 살 것인가와 관련해 모두가 관심을 갖는 이슈다. 이 책은 대중문화 속의 변화하고 있는 사랑과 연애를 사회적 맥락과 연관 지어 해석하는 좋은 여성학 입문서다. 한국 사회와 대중문화 텍스트를 분석하는 저자의 여성학적 시각, 문화연구자로서의 비판의식, 그리고 텍스트에 대한 고유한 해석이 돋보인다. 우리 사회 사랑과 연애의 급격한 변화를 이해하고 싶은 독자들에게 일독을 권한다”고 말했다.

권종술 기자

문화와 종교 분야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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