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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지옥④] 프랑스 최대 통신사 CEO와 경영진, 무더기로 형사재판 받은 이유
프랑스 최대 통신사 '오랑주' 로고 (자료사진)
프랑스 최대 통신사 '오랑주' 로고 (자료사진)ⓒ기타

올해 6월 프랑스에서 놀라운 소식 하나가 전해졌다. 프랑스 최대 통신사 오랑주(Orange)의 전 최고경영자(CEO)와 전직 간부들이 무더기로 형사재판에 회부됐다는 내용이었다. 이들이 재판을 받게 된 이유는 직장 내에서 벌어지는 정신적 괴롭힘을 조장하거나 방조했기 때문이었다. 오랑주 전 관리자들은 민영화 이후 대규모 기업개편 과정에서 해고 대상 직원들의 직무를 수시로 바꾸거나, 모욕감을 주고 따돌림을 조장한 혐의를 받고 있다.

직장에서 발생한 정신적 괴롭힘 때문에 법적인 처벌을 받을 수 있다는 것도 우리나라에선 생소하다. 그런데, 그 책임을 직접적 가해자가 아니라 ‘최고경영자’에게 물을 수 있다는 것은 더욱 놀라운 소식이었다.

■프랑스선 사용자가 노동자의 ‘정신적 건강’도 책임진다

프랑스 노동법전과 재판기록을 살펴보면 프랑스에서 경영자에게 ‘직장 내 괴롭힘’ 문제에 대한 책임을 묻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프랑스 노동법전 L.1152-1:모든 노동자는 자신의 권리와 존엄, 신체적·정신적 건강, 직업적 장래를 위태롭게 할 수 있는 반복적인 정신적 괴롭힘을 겪어선 안 된다.

□프랑스 노동법전 L.1152-4:사용자는 직장 내 괴롭힘을 예방하기 위한 필요한 모든 조치를 취해야 한다.

프랑스에서는 노동자의 신체적인 건강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건강’도 매우 중시하며, 이를 사용자의 책임으로 노동법에 규정하고 있다. 심지어 직장 내 정신적 괴롭힘을 예방해야 할 책임까지 사용자에게 묻고 있다.

프랑스 노동법이 규정하고자 하는 바는 분명했다. 사용자라면, 열악한 노동환경을 방치해선 안 된다는 것이다. 직원이 스스로 목숨을 끊을 때까지 이런 상황을 방치했으면, 그에 걸맞은 책임을 져야한다는 게 프랑스 노동법의 골자다.

오랑주 전 최고경영자는 설치기사 등 직원 19명이 압박감에 시달리다 스스로 목숨을 끊을 때까지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은 것으로 조사됐다. 게다가 12명의 직원은 자살기도를 했으며, 8명은 심각한 우울증을 앓다 결국 직장을 떠났다. 사실상 오랑주 경영진은 이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노동환경을 조성한 셈이다.

오랑주 사태는 2008년에서 2010년 사이에 발생한 일이었지만 2018년 프랑스 사회는 분노로 들끓었다. 이것이 사법당국이 대기업 최고경영자를 기소하게 된 배경이다.

한국에도 비슷한 사례가 심심치 않게 보도된다. 뉴스에 나오지 않는 사례도 많다. 해고를 위해 ‘직장 내 괴롭힘’을 방치하거나 조장하는 국내 기업들은 오랑주 사태를 어떻게 봤을까.

안타깝게도 한국에선 비슷한 일이 일어나도, 경영자에게 책임을 묻기 힘든 구조다. 관련법은 물론이고, ‘직장 내 괴롭힘’에 대한 개념조차 제대로 정립돼 있지 않은 실정이기 때문이다. 직장 내에서 괴롭힘이 발생해도, 피해자나 가해자를 별종으로 취급해버리는 경향까지 나타난다. 회사가 이들을 반목시키기 때문이다. 이렇다보니, 사건이 알려지기도 전에 쉽게 묻히기 십상이다.

■프랑스서 관련법이 제정된 배경:논란이 된 ‘이리고옝’의 저서

이리고옝은 '정신적 괴롭힘'이란 주제로 2차례 쓴 책이 프랑스에서 대중적으로 많이 읽혔다고 한다.
이리고옝은 '정신적 괴롭힘'이란 주제로 2차례 쓴 책이 프랑스에서 대중적으로 많이 읽혔다고 한다.ⓒ기타

국내에 소개된 연구자료에 따르면, 프랑스에서 ‘직장 내 괴롭힘’ 관련 법 조항이 제정될 수 있었던 데에는 정신의학자 ‘마리 프랑스 이리고옝’(Marie-France Hirigouen)의 역할이 컸다고 한다.

1998년경 이리고옝은 ‘정신적 괴롭힘’이란 주제로 책을 냈는데, 이 책이 40만부 이상 팔리면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그런데 지난 29일(현지시간) 프랑스 노동총동맹(Confederation Generale du Travail, 줄여서 CGT) 관계자의 소개로 프랑스 몽트레에 CGT 사무실에서 만난 전문가들의 기억은 조금 달랐다.

CGT ‘직장 건강’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는 철도노조 고문 토니 프라켈리(Tony FRAQUELLI) 등에 따르면, 이리고옝의 첫 번째 책은 문제가 많았다. ‘직장 내 괴롭힘’의 문제를 괴롭힘 가해자 개인의 인성 또는 자질문제에 국한시켜 다룬 것이다. 토니는 “이리고옝의 첫 번째 책은 직장에서의 ‘정신적 괴롭힘’이 단순 개인의 문제로만 비춰질 수 있는 내용이었다”면서 “노조 내부에서도 이건 아니라는 인식이 컸다”고 지적했다.

비판이 쏟아진 뒤, 이리고옝은 2001년경 두 번째 책을 냈다. 이 책은 첫 번째 책에서 지적된 부분을 개선하는 내용이었다. 토니는 “첫 번째 책을 읽고 화가 나서 두 번째 책을 읽진 않았지만, 내용은 알고 있다. 두 번째 책에선 구조적인 문제를 다루면서 대중의 지지를 얻었다”고 설명했다.

이같은 논란 속에서 프랑스의 노동자들이 겪어온 현상에 대중이 관심을 보였고, 법 제정 및 시행으로 이어졌다.

프랑스 대표 노동조합 CGT 주소가 적인 안내문.
프랑스 대표 노동조합 CGT 주소가 적인 안내문.ⓒ민중의소리

■부끄러운 한국기업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프랑스서 ‘직장 내 괴롭힘’ 관련법이 제정되는데 한국 기업의 역할도 있었다고 한다. 프랑스 로렌지방에 있던 대우 공장에서 출산휴가나 병가를 사용한 노동자를 종일 독실에 가두거나, 이들에게 마땅한 일을 주지 않고, 담배꽁초 줍기 등의 굴욕적인 일까지 시켰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노동쟁의가 발생했고, 프랑스 공산당이 괴롭힘 관련 법안을 제출하는 계기가 됐다고 한다.

프랑스 기업들은 원래부터 이런 문제에 민감했을까?

관련법이 제정되면서 다양한 루트로 문제제기를 할 수 있는 경로가 마련됐다. 강력한 노조가 현장을 감시하고 있다. 때문에 기업들은 ‘적어도’ 프랑스 안에서는 조심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프랑스를 벗어나면 상황이 달라진다.

“한국에선 그래도 돼.”

유명 웹툰 ‘송곳’의 명대사 중 하나다. 프랑스계 유통회사를 배경으로 노동현장의 현실을 제대로 그린 이 웹툰에서 처럼, 프랑스계 회사라고 한국에서 프랑스법을 따르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기업들이 현지의 상황을 이용해 편하게 장사를 하려는 행태를 보인다. 앞서 ‘민중의소리’가 소개한 프랑스계 회사인 ‘에어리퀴드 코리아’가 한 예다. ([직장지옥①]화장실 간 횟수까지 묻는 상사..나는 두 번 쓰러졌다)

법과 제도, 감시와 제보 시스템이 제대로 구축되지 않으면 문제는 언제든, 어디서든 발생한다. 직장 내 괴롭힘 문제를 해결하는 모범 기업으로 꼽히는 프랑스 회사가 한국에서는 다른 기업과 별반 다르지 않은 행태를 보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직장 내 괴롭힘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피해자들의 호소가 곳곳에서 터져 나옵니다. 이제 정부와 정치권에서도 관심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외국에서는 20여 년 전부터 직장 내 괴롭힘의 개념을 규정하고 관련 법제도를 만들어 가해자를 처벌하고 피해자를 보호하기 위한 노력을 시작했습니다. ‘직장 내 괴롭힘’의 사례와 개념을 정리하고 법 제도적 기준을 세우기 위해 민중의소리는 한국언론진흥재단의 지원을 받아 국내외 사례들과 통계자료, 연구를 분석했습니다. 총 10편의 기사와 인터랙티브 콘텐츠, 동영상 콘텐츠를 선보일 예정입니다./편집자주

[직장지옥①]화장실 간 횟수까지 묻는 상사..나는 두 번 쓰러졌다
[직장지옥②]“무서운 일터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 ‘직장 따돌림’ 당한 아내가 남긴 유서
[직장지옥③] 일과 회사를 너무 사랑했던 아버지가 당한 두 번의 해고

이승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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