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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민보] “술 취해 사고친 에피소드는 많은데, 정작 술에 대해서는 아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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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명 이상이 모인 술자리에서 빠지지 않는 단골 화제, 바로 술에 취해서 '사고 친' 이야기다. 누군가는 취기를 못 이겨 행인에게 시비를 걸기도 하고, 누군가는 흥겨웠던 술자리를 아수라장으로 만들기도 한다. 이런 이들에게 "술 마신 시간만큼 술의 내면을 들여다 본 적 있느냐"라는 질문을 던지는 사람이 있다. 올해로 10년 째 '막걸리학교'를 운영 중인 술평론가 허시명 대표다.

명동 번화가 사이 골목에 위치한 막걸리학교는 건물입구부터 시큼한 향을 내뿜는다. 직접 담근 막걸리가 발효되면서 내뿜는 고유의 향이라고 한다. 허 대표는 녹색 통에서 '토도독, 토독'하는 소리를 내며 끓어오르는 막걸리 원액을 보여주며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한참을 발효통을 지켜보던 허 대표는 인터뷰 시작에 앞서 막걸리 한 잔을 차처럼 내왔다.

허시명 막걸리학교 교장
허시명 막걸리학교 교장ⓒ막걸리학교 / 한종진 제공

막걸리를 배운다는 것의 의미
"많은 사람들이 그 지역에서 나는 산물과
그 지역 사람들이 만든 술을 마셨으면"

막걸리학교는 이름 그대로, 막걸리에 대해 배우는 곳이다. 전국 800여 개의 양조장에서 만들어진 다양한 막걸리를 시음하면서 맛과 향을 평가한다. 막걸리를 통해 재현된 한국사회의 문화나 우리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수업의 주요한 주제 중 하나다. 직접 술을 빚거나 전국의 술을 맛보기 위해 '술기행'을 함께 떠나기도 한다.

"막걸리학교는 우리에게 막걸리가 무엇인지를 이야기하는 겁니다. 예를 들어 생막걸리와 살균 막걸리를 맛보고, 맛의 차이에 대해 의견을 나누는 거죠. 우리가 익숙하게 마셔왔던 막걸리지만, 그 막걸리가 무엇인지, 내가 무슨 맛인지는 알고 마시고 있는지, 이런 것들에 대한 질문을 하는 시간입니다."

퇴근 후 술 한 잔 걸치는데 굳이 이렇게 세세한 내용까지 생각해서 마셔야 하나라는 생각이 들자 머리가 지끈거린다. '술에 대해 알고 마시면 더 맛있는 것이냐'는 질문에 허 대표는 "훨씬 맛있게, 즐겁게, 배려하면서 마실수 있다"고 말했다. 질문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나온 답이었다.

"술을 모르면 그저 싼 술을 많이 마시는 쪽으로 끝나게 됩니다. 양으로 먹게 되는 것이죠. 저는 많은 사람들이 그 지역에서 나는 산물과 그 지역에서 난 사람이 만든 술을 마셨으면 좋겠다는 바람입니다."

그렇다면 술을 배운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허 대표는 술을 빚는 것과 연계해 설명했다. 단순히 완성된 것을 받아들이는 것과 달리 내 손으로 직접 만드는 것에 의미를 부여한 것이다. 내가 직접 빚는 술은 온전히 '나의 것'이 되면서 함께 나누는 기쁨도 더욱 크다는 것이 허 대표의 생각이다. 막걸리학교 수강생의 대다수도 술을 직접 빚고 싶어서 찾아오는 이들이 많다고 한다.

"술을 마시면 내 몸의 일부가 되는 것인데, 그것에 대해 이해를 하는 것이죠. 현대 사회에서는 주로 완성된 것들을 받아들이기만 하는데, 술을 배우면 내가 손수 내 몸의 일부가 되는 것을 직접 만들고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술을 빚게 되면, 물론 내가 술을 직접 만든다는 기쁨도 있지만, 내가 만든 것을 같이 나누는 기쁨을 더욱 누릴 수 있습니다."

술 가운데 막걸리는 직접 빚어서 마시는 게 가장 맛있다고 한다. 잘 숙성시켜야 제맛이 나는 술이 있는 반면, 막걸리는 속성주이기 때문에 시중에 파는 술보다 만드는 것이 더 좋은 맛을 낼 수 있다. 허 대표는 술을 빚는 것도 쉬운 일일 뿐더러, 술 중에서 가장 빚기 쉬운 술이 막걸리라고 단언했다.

"막걸리를 만드려면 보통 열흘에서 2주 정도 걸리는데요. 막걸리는 속성주기 때문에, 술 중에서 가장 빚기 쉬운 게 막걸리가 아닐까 쉽네요. 고두밥만 찌고요, 함지, 스테인볼, 누룩만 있으면 됩니다. 요즘은 누룩도 인터넷에서 구하기가 수월한데요. 아주 쉽게 말하면, 밥만 찌면 누구나 막걸리를 만들 수 있는거죠. 나머지는 기다리기만 하면 됩니다."

기자에서 막걸리학교 대표로
"술에 취했는지 오다보니 여기까지, 술판이 커졌다"

막걸리학교 수업이 진행되는 모습
막걸리학교 수업이 진행되는 모습ⓒ막걸리학교 홈페이지

허 대표도 처음부터 막걸리에 심취했던 건 아니었다. '샘이 깊은 물'이라는 인문·사회교양지에서 취재기자로 5년동안 근무했던 허 대표는 노조위원장을 맡던 중 사측과 의견이 맞지 않자 사표를 던졌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행복한 시간이었다"고 표현한다.

"1980년대 후반, 언론노조가 생겨나고 우리도 서로 (사내에서) 수평적인 의견을 모아보자는 차원에서 노조를 만들었죠. 그걸 발행인한테 전달하면 좋아하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결과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발행인이 많이 힘들어하더라고요. 5년 정도 직장생활을 했으면 이제는 나의 힘으로 세상을 날아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서 그만두게 된 겁니다."

허 대표는 퇴사 후 여행 작가로 프리랜서 생활을 시작했다. 전국에 산 좋고, 물 좋은 곳을 찾다보니 자연스레 술 맛이 좋은 곳들로 이끌리게 됐다.

"전국 각지를 여행다니다 보면 자연 환경이 좋은 곳을 많이 가는데요, 대개 물이 좋은 곳이고, 물이 좋은 곳은 곧 술 맛이 좋은 곳이거든요. 전국의 양조장을 가서 술을 맛보면서 그 지역과 술에 대해 진술하는 것을 컨셉으로 책도 펴냈습니다."

물론 막걸리학교를 처음 구상할 때에는 차가운 시선도 있었다고 한다. '내가 막걸리를 제일 잘 아는데 누가 막걸리를 논하냐', '전 국민이 다 아는 게 막걸리 맛 아니냐'는 냉소섞인 반응들이 주를 이뤘다.

그러나 안주하는 삶보다는 새로운 도전을 즐기다는 그는 막걸리학교에 대한 회의적인 반응에 대해 오히려 너스레를 떨며 답했다.

"전 새로운 것에 대해 즐깁니다. 좀 더 낯선 곳으로 나아가는 것이요. 막걸리학교도 그런 셈입니다. 술에 취했는지 오다보니 여기까지 온 것 같은데요. 술 판이 커진 셈이죠. 그런데 막걸리 양조장이 전국에 800여개 쯤 되는데, 사람들은 주로 자신이 마시는 막걸리 맛으로만 이야기하잖아요. 조금 더 다양한 막걸리를 가지고 논의할 수 있는 게 중요한 것 같습니다."

가을에는 어떤 술을 마셔야 좋을까
운치 있는 국화주가 제격

허시명 막걸리학교 교장
허시명 막걸리학교 교장ⓒ막걸리학교 / 박규민 제공

허 대표는 우리나라의 술 문화도 이제는 바꿔야 한다고 주장한다. 많이 마시는 것이 아니라 잘 마시는 법을 '배워야한다'는 것이다. 그는 과음에 대해서도 "술로 나를 폭행하는 것"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많은 사람들이 술을 마신 시간만큼 술의 내면에 대해 들여다 봤으면 술 전문가가 되고도 남았을텐데요. 술 자체에 대해 아는 시간들이 많았으면 좋겠어요. 저는 우리가 노동하면서 받았던 핍박과 피해를 술로 보상받으려는 것은 맞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술은 기쁠 때 마시는 게 좋고요, 위로가 필요할 때에는 술보다는 다른 식의 처방이 필요한 것 같아요. 어떤 술을, 어떻게 마셔야 우리 사회가 좀 더 건강해지는지 생각하며 술을 마시는 것이죠."

술 내음 가득 났던 그 곳에서 일어서기 전, 허 대표에게 마지막으로 질문을 던졌다. 가을에 어떤 술이 어울리겠느냐고. 어떤 질문에도 막힘없이 술술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하던 모습과는 달리 이 질문에서는 유독 숨을 골랐다. 그렇게 한참을 생각하다 천천히 입을 뗐다.

"계절마다 맛있는 술이 있죠. 보통은 세시주, 절기주라고도 하는데요. 아무래도 가을 술하면 가장 대표적인 게 국화주죠. 국화차를 끓이듯 꽃을 넣어서 술을 만들면 향이 너무 강해서 자칫하면 비릴 수도 있습니다. 술독에 국화 주머니를 만들어서 매달아만 놓아도 술에 충분히 국화향이 뱁니다. 이런 술이면 가을에 마시기 정말 운치가 있겠네요. 국화주를 한번 빚어봐야겠어요."

남소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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