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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파 포퓰리즘을 위하여’: 샹탈 무페와의 인터뷰
샹탈 무페. 2014
샹탈 무페. 2014ⓒColumbia GSAPP / CC BY 2.0

편집자주/세계적 정치철학자 샹탈 무페는 지난 8월 ‘좌파 포퓰리즘을 위하여’라는 짧은, 하지만 강렬한 책을 냈다. 이 시대에 포퓰리즘은 그저 지나가는 유행이 아니며, ‘신자유주의 헤게모니’가 더 이상 지속될 수 없음을 의미하는 현상이라고 무페는 말한다.

영국의 진보적 매체인 ‘레드페퍼’에 실린 마이클 캘더뱅크와 무페의 인터뷰를 일부 소개한다. 원문은 ‘For A Left Populism’:An interview with Chantal Mouffe에서 확인할 수 있다.

마이클 캘더뱅크:왜 당신은 지금이 ‘좌파 포퓰리즘을 위한(for a left populism)’ 적기라고 생각하는가?

샹탈 무페:우리는 지금 포스트-민주주의의 사회에 살고 있다. 이것은 우선 좌파와 우파의 경계선이 희미해진 것 때문인데, 이 상황은 내가 ‘포스트-정치(post-politics)’라고 지칭하는 상황이다. 이런 상황은 근본적으로 사회민주당들이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대안은 없다는 생각을 수용하였기 때문에 조성된 것이다. 중도 우파와 중도 좌파의 프로그램 사이에 어떤 근본적인 차이도 없기 때문에, 투표장에 간 시민들에게 선택지는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또한, 부유한 소수의 집단과 나머지 사람들 사이의 격차가 증가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우리 사회의 ‘과두지배(oligarchisation)’의 현상을 목도하고 있다. 민영화, 특히 긴축 때문에, 중간 계급의 빈곤화와 불안정성이 진행돼 왔다는 점은 새로운 점인데, 중간계급은 현재 신자유주의적 정책에 의해 심각한 영향을 받고 있다. 이런 상황은 가운데에서의 합의(consensus of the centre)에 대해 왜 그리도 많은 저항이 발생했는가를 설명해준다.

내가 현 시기를 ‘포퓰리즘의 적기(populist moment)’라고 말한 것은 이러한 포스트-민주주의의 상황에 대한 다양한 저항을 반영한 것이다.

그러한 저항들은 많은 다양한 방식으로 스스로를 표현하며, 반드시 진보적이지만은 않다.

그러한 저항들은 어떤 의미에서는 모두 ‘민주적 요구(democratic demands)’, 즉, 더 많은 민주주의의 요구, 사람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요구를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요구들은 외국인혐오(xenophobic)의 방식으로 표현될 수도 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는 ‘문제는 이민자들 때문이야’라고 주장하는 우파의 포퓰리즘을 목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요구들은 민주주의를 확대하며 근본적인 민주주의의 발전을 요구하는 방향으로, 즉 진보적인 방향으로 표현될 수도 있다. 이것이 내가 ‘좌파 포퓰리즘’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2015년에 출간된 ‘정치에 대하여(On the Political)’에서, 나는 포스트-정치 현상을 분석하고 ‘제3의 길’이 민주주의의 발전과는 인연이 없으며, 다양한 대안들 사이의 ‘경합적(agonistic)’ 논쟁의 결여는 우파 포퓰리즘이 발전할 수 있는 토양이 되므로 민주주의에 대한 위협이 되리라고 주장했다.

정치는 화해이고 합의라는 생각은 명백히 잘못된 생각이다.

민주정치는 당파적(partisan)이어야 한다. 민주정치는 좌파와 우파 사이의 전선을 그을 것을 요구한다. 가능한 대안에 대한 경합적 토론없이 민주주의는 있을 수 없다.

캘더뱅크:좌파 포퓰리즘의 지지층은 어떤 사람들인가, 그리고 그들을 단결시킬 수 있는 방안은 무엇인가?

무페:현재 사회의 더 많은 부분들이 이전 어느 때보다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와 자본주의의 새로운 통제 방식의 영향을 받고 있다. 포드식 자본주의의 시대에는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만이 영향권 내에 있었다. 그러나 금융자본주의의 발전, 그리고 (무한경쟁의 환경을 만듦으로써 사람들을 경쟁에 몰두하게 만들어 결국 그들의 삶을 통제하는)소위 ‘생명관리정치(biopolitics)’는, 우리의 삶의 모든 양상들을 자본주의의 통제 하에 있게 함으로써, 우리 모두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것은 물론 부정적인 측면이지만, 근본적인 민주주의의 발전을 위한 프로젝트에 참여할 사람의 수가 더 많아진다는 것을 의미하므로 또한 기회이기도 하다. 단지 노동계급이 아니라 우리가 전취할 수 있는 중간 계급의 많은 중요한 부문들이 존재하게 됐다.

전통적인 좌파의 정치적 전선은 계급에 기초하여 그어졌다. 노동계급, 즉 프롤레타리아 대 부르주아의 전선이 그어졌다. 오늘날에는, 사회의 발전을 고려해 볼 때, 그런 방식으로 정치적 전선을 그어서는 안된다.

계급의 관점에서 정식화될 수 없는 일련의 민주적 요구들이 존재한다.

예를 들자면, 페미니즘, 반 인종주의, 동성애 운동, 환경운동 같은 요구들을 고려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이런 요구들은 노동계급과 부르주아 사이의 전통적인 대립과는 결이 다른 요구들이다. 우리는 포퓰리즘의 방식으로 전선을 만들어야 한다. 그 전선은 ‘인민(the people)’과 ‘과두지배자들(the oligarchy)’ 사이에 그어지는 전선이라는 점에서 훨씬 더 포괄범위가 넓다.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프로젝트를 위해 전취할 수 있는 많은 부문들이 존재하며 단일한 ‘인민’을 구축함으로써 그들을 결합시키는 것이 필요하다. 정치적 전선은 계급만으로는 구축될 수 없다. 노동계급의 요구가 버려져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노동계급의 요구들은 다른 민주적인 요구들과 함께 표현돼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좌파 포퓰리즘의 주요한 특징이고, 계급적 관점에서 전선을 구축하는 것과의 주요한 차이다.

‘인민’을 구축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사람들을 행동하게 하는가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면, 왜 사람들은 특정한 유형의 예속에 저항하는가? 왜 그들은 부당하다고 주장하는가? 나는 평등의 이념, 사회정의의 이념, 그리고 주권재민의 이념이 민주적인 사회에 대해 사람들이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는 근본 가치라고 생각한다.

민주사회의 시민들은 그런 근본 가치에 의해 정치적으로 구축되고 사회화 된다. 그러므로 그들이 그러한 가치를 박탈당했다고 느낄 때, 그들은 다양한 형태로 저항한다. 내가 보기에 정치영역에서 사람들을 행동하게 만드는 것은 평등과 민주주의에 대한 요구다. 바로 이런 이유로 우리는 지금 포스트-민주주의에 대한 많은 저항들을 목도하게 된 것이다.

2010년 봄 스페인의 시위에서 젊은이들은 ‘우리는 투표하지만 우리의 목소리는 어디에도 없다’고 외쳤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자기의 목소리를 박탈당했다고 느낀다. 이것이 ‘포퓰리즘 운동’의 핵심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저항들의 근원에 있는 요구들에 대한 진보적 해답을 제시하는 것은 몹시 중요하다.

우리는 우파의 포퓰리즘을 그저 인종차별주의적이며 성차별주의적인 요구의 표현으로 간주하지 말고, 그 요구들이 사실상 민주주의에 대한 요구, 즉 자기의 목소리를 내겠다는 요구의 표현이라고 생각할 필요가 있다.

영국의 브렉시트 투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말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은 외국인혐오주의자여서가 아니라, 기성정치세력이 그들의 우려사항들에 대해 아무 관심이 없다고 느꼈기 때문에 브렉시트에 찬성했다.

이것은 민주주의에 대한 요구지만, 그 요구들은 민주주의를 제약하는 방식으로, 즉 오직 자국민이라는 소수의 집단만을 위한 민주주의를 회복하는 방식으로 표출될 수 있다. 혹은 그 요구들은, 어려운 문제이긴 하지만, 민주주의를 심화시키고 근본적인 민주주의를 발전시키는 방향으로 정립될 수도 있다.

나에게 있어 긴박한 문제는 어떤 종류의 포퓰리즘이 헤게모니를 잡아 그런 요구들에 답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다.

나는 우파의 포퓰리즘에 대항해 싸우는 유일한 방법은 좌파의 포퓰리즘을 발전시키는 것뿐이라고 확신하고 있다. 다시 말해, 포스트-민주주의에 대한 다양한 저항들을 염두에 두고, 민주주의의 가치를 재확인하고 확장하는데 도움이 되는 저항의 방식을 만들어 내는, 그런 포퓰리즘이 필요하다.

프랑스에는 ‘르펜에게 투표한 사람들과는 말도 하지 말아야 한다. 그들은 기본적으로 파시스트이고 교정이 불가능하다’라고 말하는 좌파에 속한 사람들이 있다. 나는 그런 입장에 절대 동의할 수 없다. 르펜에게 투표한 사람들 중 많은 사람들이 과거에는 공산당에 투표했던 사람들이라는 점은 프랑스에서는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들은 사회민주주의자들에 의해 버려졌는데, 르펜은 그들에게 ‘나는 당신의 우려를 잘 알고 있다’고 (그러나 ‘당신의 지금의 상황은 이민자들 때문이다,’라고 덧붙이면서) 말했다. 다행히도, 장뤽 멜랑숑이 이끄는 (종종 좌파 포퓰리스트라고 불리는) ‘굴복하지 않는 프랑스(La France Insoumise )’가 르펜에게 투표한 유권자들과 대화하기 위해 그들에게 접근하는 일을 포기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상황은 변화하기 시작했다.

흥미롭게도 지난번 선거에서는 몇몇 중요한 지역에서, 예를 들면 마르세유에서 멜랑숑이 이전에는 르펜에게 투표했던 선거구들에서 1위를 차지했다. 똑같은 일이 아미엥에서도 일어났는데, 거기에서는 프랑수아 뤼팽이 이전에는 국민전선의 아성이었던 지역에서 당선됐다. 그러므로 ‘르펜에게 투표한 사람들은 결코 멜랑숑에게 투표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틀렸다. 내가 듣기로는 영국에서 전에 (극우 성향의) 영국독립당에 투표했던 사람의 16퍼센트가 지난 선거에서는 코빈에게 투표했다.

이와 같은 사례들을 볼 때, 노동계급의 요구들이 진보적인 방향으로 나갈 것인가, 혹은 외국인혐오의 방향으로 나갈 것인가는 미리 정해져 있지 않다. 그것은 그 요구들이 결합되는 방식(how they are articulated)에 의해 결정된다. 그 요구들은 우파 포퓰리스트들에 의해서 외국인혐오의 방식으로 표현될 수도 있다.

좌파 포퓰리즘에게 제기되는 문제는 그러한 요구들을 다른 방법으로 결합(articulation)하는 것이다.

캘더뱅크: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더 이상 좌파에게 공감하지 못한다. 그런데 왜 ‘좌파’ 포퓰리즘을 주장하는가?

무페:먼저 분명히 할 것은, 내가 ‘좌파 포퓰리즘’이라고 할 때, 이 용어는 분석적 범주라는 사실이다. 내가 당신에게 밖으로 나가서 ‘우리는 좌파 포퓰리스트다’라고 외치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멜랑숑이나 혹은 코빈, 또는 포데모스에게 ‘좌파 포퓰리즘’의 범주를 적용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말할 때 내가 말하려고 하는 것은, 그러한 정당들의 정치적 전략이 좌파 포퓰리즘의 전략으로 정의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그들이 전선을 구축하는 방식이다.

그들은 ‘과두지배’에 반대하는 하나의 ‘인민’의 전선을 구축함으로써 대중운동을 불러일으키고 싶어 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자신을 ‘좌파 포퓰리스트’라고 불러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면 멜랑숑의 ‘굴복하지 않는 프랑스’는 내가 보기에 많은 투쟁들을 결속시킬 수 있는 훌륭한 명칭이다.

많은 사람들에게 ‘좌파’라는 용어가 현재 부정적인 함의를 갖는 것은 사실이다. 예를 들면 스페인에서는 좌파라는 말이 사회민주주의의 배신자를 연상시키기 때문에, 사람들은 좌파라는 말만 들으면 신물이 난다고 한다. 프랑스도 상황은 유사한데, 많은 사람들은 좌파라는 말을 들으면 프랑수아 올랑드를 떠올리기 때문에 그 용어에 대한 거부감을 갖고 있다.

이 용어를 포기해야 하는 또 다른 이유는 그 용어가 포퓰리스트 전략이 갖는 포괄적 성격에 적합하지 않다는 점이다. 포데모스의 당원들은 ‘우리는 자신을 좌파라고 여기지 않는 사람들과 대화하고 싶다,’고 말한다. 나는 이런 우려를 이해하며,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나는 전통적인 좌와 우가 대결하는 방식의 전선을 구상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좌파의 다른 의미도 있는데, 그것은 보다 가치에 주안점을 둔 의미(axiological)다. 좌파는 사회정의, 인민주권, 평등 같은 특정한 가치를 지향한다. 나는 그런 가치는 옹호돼야 한다고 생각하며, 내가 ‘좌파’ 포퓰리즘이라고 말한 것은 바로 그런 의미에서다.

내 생각에 ‘진보적 포퓰리즘’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프랑스에서는 마크롱이 ‘진보적’이라는 용어를 완전히 독차지해 버렸다.

‘민주적 포퓰리즘’도 적절치 않다.
우리는 보다 선명하게 전선을 그을 수 있는 용어, 보다 당파적인 용어가 필요하다. 나는 ‘좌파 포퓰리즘’이라고 말하는 것이 좌파와 우파의 경합적 투쟁을, 그러나 (과거와는 다른) 포퓰리스트의 방식으로, 재정립하게 해준다고 생각한다.

캘더뱅크:코빈의 노동당이 유럽의 사회민주주의가 퇴조하여 포스트-민주주의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을 막는데 성공한 비결은 무엇인가?

무페:코빈의 노동당은 좌파 포퓰리즘 전략을 수용함으로써 자신을 변화시키는 과정에 있는 사회민주주의정당이다. 이것이 사회민주주의의 전반적인 쇠락을 막는데 성공을 거둔 비결이다. 물론 사회민주주의가 갑자기 회복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코빈의 당은 블레어의 당과는 다르다. ‘신노동당’의 포스트-정치와 단절하려는 분명한 시도가 있다.

영국의 경우에 중요한 것은 코빈과 모멘텀(Momentum, 노동당의 외곽조직)이 노동당을 대중운동 속으로 들어가도록 변모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좌파 포퓰리즘의 전략은 전선(frontier)을 정립할 것을 요구하는데, 최근의 노동당의 ‘소수가 아니라 다수를 위하여’라는 슬로건은 바로 이 전략을 실천하고 있다.

흥미롭게도 블레어도 사회주의에 대해 말하는 것을 회피하기 위해 그런 슬로건을 사용했었다. 코빈의 노동당은 그 슬로건을 회수하여 ‘소수’와 ‘다수’ 사이의 전선, 과두지배자들과 인민 사이의 경합적 전선을 긋는데 사용했다. (하략)

Voice of the World / 편집 : 이정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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