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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전쟁을, 목숨을, 피를 함부로 말하지 않아야 하는 이유

기자는 평소에 “목숨을 걸고서라도 이것만은 지켜야 한다”는 말에 약간 거부감을 갖는 편이다. 물론 이성적으로는 그 말을 하는 사람의 비장함을 이해한다. 때로는 우리에게 목숨을 걸고라도 지켜야 할 소중한 가치가 있는 법이다.

하지만 그게 그렇게 말처럼 쉬운가? 만약 누군가가 기자에게 “이것만큼은 목숨을 걸고 지켜라”라고 말한다면, 기자는 선뜻 목숨을 걸 자신이 없다.

윤리학에는 ‘트롤리(열차의 일종)의 딜레마’라는 것이 있다. 브레이크가 고장이 난 열차가 폭주를 하는데 선로에는 그 사실을 모른 채 다섯 명이 일을 한다. 만약 열차가 이대로 폭주한다면 다섯 명이 목숨을 잃는다.

당신은 선로 밖에서 전환기를 당겨 열차의 진행 방향을 바꿀 수 있다. 하지만 열차의 진행 방향을 바꾸면 다른 선로에 있는 한 명이 죽는다. 당신이라면 선로를 바꿔 다섯 명을 살리고 한 명을 죽일 것인가?

생각 외로 쉬운 문제다. 어차피 누군가가 죽어야 한다면 다섯 명이 죽는 것보다 한 명이 죽는 것이 더 낫기 때문이다. 실제 설문을 해보면 응답자의 89%가 기꺼이 선로를 바꿔 다섯 명을 살리고 한 명을 죽이는 것을 선택한다.

질문을 바꿔보자. 고장이 난 열차가 폭주하는 것과, 선로를 바꾸지 않으면 다섯 명이 죽는 상황은 아까와 같다. 그런데 열차를 멈추는 유일한 방법은 내 옆에 있는 사람을 선로로 밀어서 열차에 치이게 하는 것뿐이다. 사람을 친 열차는 그 저항 덕에 멈추게 된다.

이 상황이라면 나는 옆 사람을 밀어서 다섯 명을 살릴 것인가? 이론적으로는 한 사람을 희생해 다섯 명을 살리는 것이므로 첫 상황과 달라진 것이 없다. 하지만 이 선택을 쉽게 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조금 전까지 내 옆에 있던 사람을 죽여야 하기 때문이다. 내가 선로로 밀어버린 그 사람은 내 눈 앞에서 피가 튀고 살점이 잘려 목숨을 잃는다. 실제 실험에서도 이 선택을 하겠다고 답한 사람은 11%밖에 되지 않는다.

“목숨을 걸어 지키자”거나, “피로써 사수하자”거나 하는 말은 그래서 쉽게 하지 말아야 한다. 이런 말들은 멀리서 할 때에는 쉽다. 하지만 그 피를 흘려야 하는 사람이 내 친구라면, 목숨을 잃는 사람이 내 가족이라면 이야기는 완전히 달라진다. 아니, 가족이나 친구가 아니더라도 그냥 내 눈 앞에서 누군가가 피를 튀기며 죽는다면 그 선택을 쉽게 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현대의 전쟁이 무서운 이유가 이것이다. 칼과 창을 맞대고 싸울 때에는 사람이 죽는 모습을 눈앞에서 봐야 한다. 총질을 해도 사람의 뼈와 살이 튀는 모습을 본다. 그런데 현대의 전쟁은 대량살상 무기가 승패를 좌우하는 시대가 됐다. 버튼 하나 누르면 수 십 만 명이 죽는 것은 일도 아니다.

수 십 만 명이 아니라 단 한 명이라도 내 눈 앞에서 죽는 모습을 본다면 전쟁을 쉽게 선택하지 못할 사람들이, 전쟁이 게임처럼 버튼 누르는 것으로 대체되니 그걸 쉽게 생각한다. 그래서 “죽여라!” “죽여라!”를 외친다. 하지만 그 죽음이 내 눈앞에서 펼쳐진다고 생각해보라. 그게 절대 그렇게 쉬운 일이 절대 아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12일 북방한계선(NLL) 일대를 평화수역으로 만들기로 한 남북 합의에 대해 “우리 장병들이 (NLL을) 피로 지켜왔다는 것이 참으로 숭고한 일이지만 계속 피로 지킬 수는 없는 것이다. 피를 흘리지 않고도 지킬 수 있다면 그것은 더더욱 가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라고 언급했다.

이 말의 옳고 그름을 떠나 “무슨 헛소리냐? 조국을 피로 지켜야지, 이 비겁자야!”라고 떠들어댈 자들에게 꼭 한 마디 묻고 싶다. 그 피가 네 피라면, 그 피가 네 가족의 피라면, 그 피가 네 동료의 피라면, 그리고 그 피가 당시 눈앞에서 튄다면 그렇게 쉽게 이야기할 수 있겠나?

죽음으로써 평화를 지키는 길과, 그 누구도 죽지 않고 평화를 지키는 길이 있다면 우리는 너무나 당연히 후자를 선택해야 한다. 남의 죽음이라고 함부로 “목숨을 걸라”고 이야기해서도 안 되고, 남의 피라고 함부로 “흘려라”고 외쳐서는 안 되는 거다. “피를 흘리지 않고도 지킬 수 있다면 그것이 더욱 가치 있는 일”이라는 대통령의 발언에 뜨거운 지지를 보낸다.

이완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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