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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택연의 중국과 한반도] 중국 양안관계의 근원, 두 개의 쌍십절

매년 10월 중국은 국경절 기념행사로 분위기가 한층 고조된다. 이와 동시에 중국과 대만 간의 문제로 불리는 양안(两岸)관계 역시 긴장의 분위기가 고조된다. 왜냐하면 양안관계의 두 당사자인 중화인민공화국은 10월 1일, 중화민국은 10월 10일로 양측 모두 10월에 각각의 국경절 행사를 진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10월 10일 차이잉원(蔡英文) 대만 총통은 타이베이 총통궁 앞에서 열린 ‘중화민국 건국 107주년’ 기념식 연설에서 “중국은 평화와 안정에 매우 심각한 도전이지만 절대로 굴복하는 일은 없다”고 언급했다. ‘하나의 중국’ 원칙을 국가 핵심이익 영역으로 내세우고 있는 중국과 전면으로 대치되는 발언이다.

중국은 분단국가이다. 중국 근현대사에서 10월 10일은 분단의 과거와 현재를 나타내는 날짜로 기억 할 수 있다. 중국 근현대사를 대표하는 두 개의 쌍십절인 10월 10일은 바로 1911년 10월 10일과 1945년 10월 10일이다.

쑨원(孙文)
쑨원(孙文)ⓒ자료사진

첫 번째 쌍십절, 1911년 10월 10일

1911년 10월 10일 중국 후베이성(湖北省) 우창(武昌)지역에서 발생한 봉기를 시작으로 불붙은 반청(反清) 무장투쟁은 빠른 속도로 각 지역으로 확대되기 시작했다. 우창봉기 발생 약 두 달 만인 12월 말에는 중국 지역 17개 성(省)에서 청나라 조정으로부터의 독립을 선포했다. 그리고 17개성의 대표들은 선거를 통해 쑨원(孙文)을 난징 임시정부의 임시 대총통으로 선출했고, 임시 대총통에 취임한 쑨원(孙文)은 국호를 ‘중화민국’으로 선포했다. 이것이 바로 1911년 신해(辛亥)년에 발생한 신해혁명이다.

이후 쑨원의 중화민국은 청나라 마지막 황제인 푸이(溥仪)를 퇴위시키고 청조를 무너뜨리기 위해 당시 군권을 장악하고 있던 북양 군벌 세력인 위안스카이(袁世凯)에게 실권을 위임하고 대총통직을 넘겨주었다.

중화민국의 임시대총통이 된 위안스카이는 수도를 난징에서 베이징으로 이전하고 난징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쑨원의 혁명파를 무력화시키기 위한 탄압을 시작했다. 위안스카이는 실권을 쥐고 반대파 핵심 세력 암살과 중화민국 의회를 해산시키고 독재정치를 실시했으며, 급기야 공화정을 거부하고 자신이 직접 황제로 등극하기 위한 조치들을 준비했다.

이에 쑨원은 비밀 혁명 조직인 중화혁명당을 결성하여 반위안스카이 운동을 진행하면서 위안스카이의 황제 등극을 막고 혁명세력의 확장과 중국 정치계로의 복귀를 준비했다. 위안스카이가 사망하면서 중국 대륙은 당시 지역별로 존재하고 있던 군벌 세력들의 세력 다툼으로 혼란의 시대에 빠지게 된다.

신해혁명이후 위안스카이의 탄압을 피해 일본으로 망명했던 쑨원은 위안스카이 사망후 광저우로 귀국해 다시금 혁명 세력들을 규합하고 1919년 10월 10일 상하이에서 기존의 혁명 조직이었던 ‘중화혁명당’을 ‘중국국민당’으로 개명하고 중국 근대정치의 전면에 재등장하게 된다.

중국국민당은 거듭된 세력 확장을 시도하면서 1924년 광저우에서 제1차 전국대표대회를 개최하고 민족, 민권, 민생으로 대표되는 쑨원의 삼민주의를 당의 대표 정치 강령으로 채택했다. 그리고 소련과 연합전선을 취한다는 ‘연소(联苏)’, 공산당원을 받아들인다는 ‘용공(容共)’, 농업과 공업을 함께 중요시한다는 ‘농공부조(农工扶助)’를 3대 정책으로 제시하면서 ‘중국공산당’과의 합작을 시작한다. 이것이 바로 제1차 국공합작이다.

1921년 창당한 중국공산당은 1차 국공합작 과정에서 국민당과 당대당 합작을 주장했지만, 당시 세력의 차이와 쑨원의 반대로 공산당원 개인의 자격으로 국민당에 가입하는 방식의 당내합작 방식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1차 국공합작 이듬해인 1925년 쑨원이 사망하고 장제스가 뒤를 이어 국민당 계열을 이끌게 되었다. 장제스는 국민혁명군 총사령관에 취임하면서 실권을 장악하고 여러 군벌 세력들로 난립되어 있던 북방지역에 대한 북벌을 시작한다. 북진중이던 장제스는 1927년 상하이에서 공산당 세력의 숙청을 감행하고 이후 공산당원과 좌파를 국민당내에서 강제로 축출한다.

북벌을 완료한 장제스와 중국국민당은 중화민국의 수도를 난징으로 이전하고 중국 대륙 전역에 대한 지배를 확대해 나가게 된다. 그리고 중국국민당 정부는 청나라를 무너뜨리고 중국 역사상 첫 공화정을 수립한 신해혁명의 시발점인 우창봉기 기념일인 1911년 10월 10일을 중화민국의 건국절로 기념하게 된다.

이것이 중국 근현대사에서 기억되는 첫 번째 10월 10일이다.

중국군 사열을 받고 있는 마오쩌둥
중국군 사열을 받고 있는 마오쩌둥ⓒ자료사진

두 번째 쌍십절, 1945년 10월 10일

제1차 국공합작으로 세력을 확대해 나가던 국민당과 장제스는 1927년 상하이에서 공산당 세력의 숙청을 감행하고 이후 공산당원과 좌파를 국민당내에서 강제로 축출한다. 이에 중국공산당 역시 1927년 7월 13일 대시국 선언을 통해 공식적으로 제1차 국공합작이 결렬되었음을 선포하고 국공 내전에 돌입하게 된다. 그리고 1927년 8월 1일 중국 장시성(江西省) 난창(南昌)에서 저우언라이(周恩来) 등이 주도한 공산당원들의 무장봉기로 난창시를 점령하게 된다. 이것이 중국 공산당과 국민당 사이에 벌어진 최초의 무장전투이다.

이후 무장 수준과 세력에서 월등했던 국민당 세력의 무차별적인 공격이 거듭 되었고, 중국공산당은 후퇴를 거듭한 끝에 역사에 남을 ‘장정’을 결정하고 훗날을 도모하게 된다.

같은 시기 중국 대륙에서 장제스의 국민당 정부군이 공산당 토벌과 세력 확장에 집중하고 있는 동안 일본의 대륙 침략이 빠른 속도로 확대되어 가고 있었다. 이에 공산당은 국민당에 내전 중지와 항일을 위한 합작을 제안한다. 그러나 장제스는 이를 거부하고 공산당 토벌에 집중하기로 했다. 이에 당시 동북군 사령관이었던 장쉐량(张学良)이 장제스를 강금하는 시안(西安)사건이 발생하고 국민당과 공산당 간의 내전은 일시 중단되었다. 그리고 1937년 7월 7일 노구교 사건으로 중일전쟁이 본격적으로 발발하자 공식적인 제2차 국공합작이 성립되었으며 이것은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패전까지 이어지게 된다.

제2차 국공합작으로 잠잠했던 국민당과 공산당 사이의 갈등은 일본의 패전과 함께 다시 불거지기 시작했다. 양당은 주요 거점들에 대한 관할권과 정국 주도권을 두고 치열한 경쟁을 하기 시작했고 곳곳에서는 산발적인 전투들이 다시 불붙기 시작했다. 그러나 중국 인민들은 긴 국공내전과 중일전쟁의 상처로 인해 평화를 바라고 있었고, 일부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양당의 평화협상을 촉구하는 사설들이 발표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당시 주중 미국 대사였던 패트릭 헐리의 중재로 협상자리가 마련되었다. 일본의 항복 직후인 8월 29일부터 시작된 협상은 43일간의 마라톤 협상 끝에 신해혁명 기념일인 10월 10일 총칭(重庆)에서 국민당 정부 대표인 장제스와 공산당 대표인 마오쩌둥은 ‘쌍십협정’을 체결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중국 근현대사에서 기억되는 두 번째 10월 10일이다.

쌍십협정은 총론에서 “평화, 민주, 단결, 통일을 기초로 협력하여 내전을 피하도록 힘쓰고 독립과 자유, 부강한 신중국을 건설한다”고 천명하면서, 평화국가에 관한 기본 정책, 정치 민주화 문제, 국회 문제 등 총 12개 항목에 대한 합의문의 형식을 띄고 있다.

그러나 이 협정이 체결되고 있던 시기에도 양당은 산발적인 전투를 벌이고 있었고, 서로에 대한 불신과 지배권 경쟁으로 중국의 평화체제는 오래 가지 못했다. 이듬해인 1946년 7월 장제스는 공산당 토벌을 위한 총공세를 펼치기 시작했고 양 세력은 3년 간의 내전에 휩싸이게 된다. 그리고 그 결과 내전에서 승리한 마오쩌둥의 공산당은 중화인민공화국을 건국하였고, 장제스의 국민당 정부는 타이완섬으로 중화민국 정부를 이전하게 된다.

이렇게 중국의 분단이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지금까지 첨예한 문제가 되고 있는 중국 양안관계의 근원이며, 매년 10월 중국 동남쪽의 작은섬과 대륙에서는 69년째 서로 다른 불꽃놀이가 진행되고 있다.

그런데 2018년 10월 중국 양안관계의 역사를 돌이켜 보는데 문득 한반도 분단의 역사가 함께 오버랩 되는 이유는 왜 일까?

중국의 양안에서 좀 더 동쪽으로 이동을 하면 바로 한반도를 만날 수 있다. 양안관계로 표현되는 중화인민공화국과 중화민국의 관계는 한반도와 유사한 점이 많다.

전쟁으로 인해 분단이 되었고, 분단 이후 사회주의와 자본주의로 대표되는 정치체제가 집정을 해왔으며, 전후 미국의 지원을 바탕으로 한쪽 체제가 발전을 해왔다. 또한 양쪽 모두 서로를 부정하는 가운데 평화와 통일을 목표로 한 정치협상이 진행된 경험이 있으며 아직까지 그 분단체제가 유지되고 있다는 점이다. 겉모습으로 보면 중국의 양안관계와 한반도의 남북관계는 매우 유사한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지금 한반도에서는 한반도판 ‘국공합작’이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현재 진행되고 있는 한반도판 ‘국공합작’의 결과는 중국의 그것과는 전혀 다른 양상으로 발전해 나가고 있는 듯하다. 내년 10월 이맘때에는 중국 양안관계 해결의 해법을 한반도에서 찾아보는 것은 어떨지 중국측에 제안을 해보고 싶다.

김택연 중국사회과학원 아태글로벌전략연구원 국제정치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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