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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책]신념을 거짓과 바꿀 수 없었던 ‘비전향장기수’ 19인의 생존기
정지윤 사진집 ‘바꿀수없는’
정지윤 사진집 ‘바꿀수없는’ⓒh2

지난 2000년 9월2일 비전향 장기수 63명이 북한으로 송환됐다. 하지만 아직도 남쪽에는 고향으로 돌아기지 못한 장기수들이 남아있다. 당시 자발적으로 이곳에 남기를 희망한 이들도 있지만, 북으로 가고 싶어도 가지 못한 장기수들도 30여명에 이르렀다. 그들이 북한으로 가지 못한 것은 ‘종이 한장’ 때문이었다. 남쪽 정부의 강압에 의해 작성한 사상전향서는 그들에게 ‘주홍 글씨’로 남았고, 고향땅을 밟지 못하게 했다. 남쪽에 남은 장기수들은 지난 2001년 2월 “강압에 의한 사상전향서 작성은 무효”임을 공개 선언했다. “인도적 차원에서 우리를 북으로 보내 달라”며 정부에 2차 송환을 꾸준히 촉구해왔으나 간절한 목소리는 아직 이뤄지지 않고 있다. 세월이 흐르면서 한분 두분 세상을 떠나고 있다. 올 여름, 고향으로 돌아가겠다는 일념으로 병마와 싸우던 김동수 선생이 세상을 떠나면서 이제 2차 송환을 희망하는 비전향장기수는 18명만 생존해 있다.

2018년 한반도는 북핵과 통일의 열기로 뜨겁다. 4월 27일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판문점에서 만나며 계의 이목이 집중됐다. 두 정상은 ‘판문점선언’을 통해 70년 비극적 분단으로 인한 문제를 해결하기로 약속하며 두 손을 맞잡았다. 이를 지켜본 19인의 ‘비전향장기수’들은 낮은 탄식으로 화답했다. 선언문에 그들의 송환이 구체적으로 언급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들에겐 너무 시간이 없다. 전국에 흩어져 살고 있는 비전향장기수들을 만나 그들의 구술을 기록하고 초상과 일상을 사진에 담아온 경향신문 사진기자 정지윤이 사진집 ‘바꿀수없는’을 출간했다. 이 책은 저자의 기획기사 ‘빨갱이 나를 소환하라’ 그리고 사진전 ‘비전향장기수 19인의 초상-귀향’과 함께 ‘비전향장기수’ 2차 송환을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출간됐다. 책에는 북으로 돌아가야 할 ‘비전향장기수’ 19인의 초상과 일상을 담은 사진들과 그들의 육성 인터뷰가 담겨 있다.

정지윤 _ 귀향(歸向)
정지윤 _ 귀향(歸向)ⓒ갤러리 류가헌 제공

1933년 일제에 의해 시행된 ‘사상전향제도’는 일본과 우리나라에만 존재했다. ‘전향’이란 단어조차 일제의 사상검사들에 의해 만들어졌다. ‘변절’, ‘투항’, ‘굴복’ 등과 같은 자존심을 거스르는 말을 대신하여 당시 일제에 저항하던 사회주의 혹은 공산주의 사상가들을 회유하기 위해 만든 정치적인 용어였다. 패전이후 ‘사상전향제도’는 원조였던 일본에서 폐지된다. 그러나 남한에는 남았다. 이승만, 박정희를 거치며 오히려 ‘강제전향’의 폭압은 절정에 달한다. 자신이 단순한 전향자가 아닌 동지를 팔아 살아남은 변절자였던 박정희는 형기를 마친 좌익수들이 사회로 나가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었다. 박정희 정권은 ‘사회안전법’을 만들어 전향을 거부한 이들을 재판도 없이 구금하고 무자비한 고문과 폭력으로 ‘전향서’를 받았다. 이를 견디지 못한 수백명의 좌익수가 도장을 찍었고 끝내 거부한 94명은 ‘비전향장기수’라는 이름을 얻었다.

류기진, 김동섭, 문일승, 김교영, 이두화, 서옥렬, 허찬형, 양원진, 최일헌, 박정덕, 박순자, 오기태, 박종린, 김영식, 강담, 박희성, 양희철, 이광근, 그리고 얼마전 세상을 떠난 김동수 선생까지 모두 19명의 사진과 목소리가 이 책에 담겼다. 이들의 평균 나이는 87세. 짧게는 3년에서 길게는 37년까지 감옥에 갇혔다. 19명의 복역기간을 모두 합치면 384년이나 된다.

정지윤 _ 귀향(歸向)
정지윤 _ 귀향(歸向)ⓒ갤러리 류가헌 제공

28살 늦깎이 대학생은 10분의 전향 연설을 거부해 37년을 감옥에서 살았고 꽃다웠던 빨치산 여전사는 하얗게 머리가 센 노인이 되었다. 출소 후에도 ‘보안관찰법’의 감시는 계속되었다. 세상은 창살 없는 감옥이었다. ‘빨갱이’ 중에서도 ‘골수 빨갱이’로 낙인찍힌 이들이 연고 없는 타향에 정착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전국을 떠돌았다. 제대로 된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궁핍한 생활의 연속이었다. 지금도 대부분이 생계급여에 의존하고 있다.

이 책은 역사의 수레바퀴에 짓이겨질지언정 자신의 신념을 거짓과 바꿀 수 없었던 ‘비전향장기수’ 19인의 생존기다. 저자는 “그들은 역경을 이겨낸 만큼 강했다. 그리고 풍파를 겪고도 순수한 마음을 잃지 않고 있었다. 담담하게 전해준 그들의 증언은 화석에 피가 통하고 숨결이 이는 듯 생생했다."고 말한다. 어떤 이는 지금도 집요한 전향 공작을 이기지 못해 쓴 ‘전향서’가 뼈아픈 실수라며 자책했고, 어떤 이는 옆에 앉은 남한의 아내 앞에서 북한 아내를 그리워했다. 그리고 북에 두고 온 코흘리개였던 아들이 환갑이 넘었을 것이다. 한 번이라도 보고 싶다고 했다.

이들의 평균나이는 87세, 대부분 오랜 감옥살이와 고문의 후유증으로 병마와 싸우고 있어 언제 세상을 등질지 알 수 없다. 이제 18인이 되어버린, ‘비전향장기수’ 19인의 마지막 소망은 모두 같았다. 북녘의 고향으로 돌아가는 ‘송환’이었다.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는 “북으로 가기를 원하는 분들을 돌려보내는 것은 우리 사회가 강제전향제도의 악령을 떨쳐버리는 중요한 한 걸음이 될 것”이라고 했다.

권종술 기자

문화와 종교 분야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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