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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미야의 사람과 현장] 그때는 ‘퇴진’이고 지금은 아니다?

얼마 전 필자가 사는 아파트에 현수막 다섯 개가 걸렸다.

“박순자 의원님의 국토위원장 당선을 축하드림(립)니다”

현수막을 건 곳은 아파트 입주자대표회의였다. 박순자는 내가 사는 동네에서 3선을 한 자유한국당 국회의원이다. 새누리당으로 처음 당선돼 박근혜 탄핵 직후 바른미래당으로 당적을 옮겼다가 다시 은근슬쩍 자유한국당으로 돌아온 인물이다.

이 아파트에 15년을 사는 동안 특정 정치인을 지지하거나 무엇을 축하한다는 현수막을 본 것은 처음이었다. 그것도 감옥에 있는 박근혜와 괘를 함께 해 온 정치인이 국회 국토위원장이 된 것을 축하한다니.

아파트 입주자대표회의 명의로 내걸린 자유한국당 박순자 의원 국회 국토교통위원장 당선 축하 현수막
아파트 입주자대표회의 명의로 내걸린 자유한국당 박순자 의원 국회 국토교통위원장 당선 축하 현수막ⓒ필자 제공

더욱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그 현수막을 내 건 입주자대표회장이 내가 잘 아는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작년 아파트 주민들의 직접투표로 당선된 그는 민주노총 소속 사업장 위원장을 몇 차례 지낸 사람이었다. 그리고 나는 2016년 겨울, 그가 소속된 노동조합 깃발과 그를 광화문에 여러 번 본 기억이 있다.

관리사무소를 찾아갔다. 부적절한 현수막을 떼어 달라는 민원을 넣었다. 그러자 그가 나에게 전화를 했다. 그가 한 말의 요지는 이러했다.

“나도 노동조합을 했으니 잘 안다. 하지만 박순자 의원이 우리 동네를 위해 힘써준 것도 있고, 앞으로 도움 받을 일도 있어서...(중략)... 여기서는 또 이렇게 해야 한다. 동네라는 데가 그렇다. 이해해 달라.”

이해 못하겠다, 고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현수막을 철거하지 않으면 내용증명을 보내겠다는 말에 그도 격앙됐는지, 마음대로 하라며 응수했다.

자유한국당 의원 축하 현수막과 세월호 혐오 뉴스
노동조합은 무엇을 했나, 자괴감이...

또 이런 일도 있었다.

지난 6.13 지방선거 당시 4.16 안전공원에 대한 혐오, 반대여론이 극에 달하던 때였다. 인터넷 여론이 썩 좋지 않았는데 그 중 명백한 가짜뉴스, 혐오뉴스를 올린 사람이 있었다. 그런데 그를 찾고 보니 모 노동조합의 조합원이었다.

놀랍고 당황스러웠지만 무엇보다 부끄럽고 자괴감이 들었다. 노동조합은, 민주노총은 그 유구한 역사 속에서, 치열한 투쟁을 하면서 도대체 무슨 일을 한 것일까. 그토록 부정하고 싶었는데, 노동조합은 정말 임금만 올리는 ‘이익집단’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인가.

지난 4월 24일 자유한국당 정태옥(왼쪽) 당시 대변인과 박순자 의원이 경기 파주시 느릅나무 출판사 앞에서 열린 비상 의원총회에서 드루킹 댓글조작 사건의 특검과 국정조사를 촉구하느 손피켓을 들고 있다.
지난 4월 24일 자유한국당 정태옥(왼쪽) 당시 대변인과 박순자 의원이 경기 파주시 느릅나무 출판사 앞에서 열린 비상 의원총회에서 드루킹 댓글조작 사건의 특검과 국정조사를 촉구하느 손피켓을 들고 있다.ⓒ정의철 기자

민주노총 이력을 달고 그가 입주자대표자회의 회장으로 출마했을 때 그의 생각은 이런 게 아니었을 텐데. 광화문에서 박근혜 탄핵과 새누리당 해체를 외칠 때 그의 생각은 이런 게 아니었을 텐데, 노동조합의 위원장을 하면서 노동자의 임금과 처우를 올리기 위해 앞장 서 싸우던 그와 자유한국당의 박순자 의원을 축하하는 그가 도저히 동일인물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일터 안에서는 자신의 권리를 위해 자본에 대항해 싸우는 노동자이지만, 삶터로 돌아와서는 내 집 값 생각에 4.16 안전공원을 반대하며 민주노총을 비난하는 댓글을 쓸 수 있는 한 개인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그런데 사실 조금 더 생각해보니 우리 안에 그런 일들이 얼마나 넘쳐나는지.

현장에서는 힘없는 을의 위치지만, 그래서 나의 권리를 찾고 싶지만, 살고 있는 아파트 경비아저씨의 인건비를 줄이겠다는 것에 나는 경비노동자의 노동권을 생각하는 조합원인가, 관리비를 줄이고픈 아파트 주민인가.

식당에 가서 서비스하는 직원들을 대하는 나의 태도는 같은 노동자의 입장인가, 비용을 지불했다는 이유로 하대와 반말을 일삼는 고객인가. 콜센터 직원과 전화문의를 할 때 나의 태도는 감정노동자를 배려하는 민주시민인가, 아니면 갑질하는 소비자인가.

시시때때로 바뀌는 갑과 을의 관계에서 노동조합에서 ‘민주’와 ‘진보’를 배우고 경험한 우리는 현장 밖에서도 같은 태도를 유지하고 있는가. 그렇지 못하다면 노동조합을 향해 누군가가 ‘이기적 집단’이라고 비난할 때 어떻게 해명 할 수 있을까.

진보적 시민을 훈련해야 하는 노동조합,
일터를 뛰어넘지 못하면 생명력 없다

노동조합은 전인격적으로 진보적인 시민을 만들어내야 한다. 노동조합이 하는 일의 대부분은 사실 이들 한 사람 한 사람이 조끼를 벗는 그 순간에도 진보적 노동자로서의 정체성이 혼란스럽지 않도록 더 나은 시민으로 훈련시키는 일이어야 한다. 임단협 시즌에만 반짝 투쟁하는 노동조합, 진보적 사고가 일터를 뛰어넘지 못하는 노동조합은 생명력이 없다. 사회적으로 가치 있는 조직이 아니다. 이기적 조직이라 손가락질 받아도 사실 할 말이 없다.

집회에서는 세상에서 제일 혁명적인 구호를 외치다가 집으로 돌아와서는 TV조선을 시청하고, 보수정당을 지지하는 이중성을 어떻게 하면 극복할 수 있을까 늘 궁리해야 한다.

이런 현장 안과 밖에서 일어나는 ‘배신’의 현상이 대공장 노조만의 문제인가? 우리는 그런 ‘귀족노동자’가 아니라고? 아니다. 크고 작은 현장을 떠나 어디서든 이러한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우리는 현장 밖을 나서면 우리가 노동자라는 사실을 자꾸 잊는다. 우리가 동네에서 박순자를 지지하면 노동자가 점점 살기 어려워 질 거라는 사실을 자꾸 잊는다.

노동조합 조끼만 벗어던지면 박순자를 지지해도, 댓글로 일간베스트에서나 볼 수 있다는 행동을 해도 아무런 거리낌이 없는, 아무런 양심의 흔들림이 없는, 아! 조끼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이여.

노조란 무엇인가. 또 민주노총 조합원이란 무엇인가.

엄미야 금속노조 조합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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