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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운이 좋아서 살아남았다” 경찰·법원의 방임 지적한 가정폭력 피해자들
한국여성의전화가 29일 오전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국가의 가정폭력 대응 강력규탄'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2018.10.29.
한국여성의전화가 29일 오전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국가의 가정폭력 대응 강력규탄'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2018.10.29.ⓒ민중의소리

#1."가정폭력 피해자를 더욱 처참하게 짓밟은 것은 경찰, 검찰, 법원이었습니다"

15년 동안 가정폭력을 당한 피해여성의 말이다. 그는 결혼 생활 중 남편으로부터 상습적인 폭행으로 갈비뼈 2대 골절, 목졸림으로 인한 기절 등의 피해를 입었다. 이혼 후 전 남편은 피해자를 괴롭히며 '찢어죽이겠다'고 협박을 일삼았고, 한 번은 피해자 집까지 찾아와 도어락(Door lock)을 때려부쉈다.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은 '아줌마 좀 제대로 사세요. 남편 분이 좋으신 분인데 왜 그러고 사세요'라고 충고했고, 아무런 조치 없이 돌아갔다. 피해 여성에게 검찰은 '정신이상으로 인한 자작극'이라며 불기소 처분을 내렸다고 한다. 이어 법원은 가해자의 6가지 죄목에 대해 1·2심 모두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이라는 판결을 내려 피해자를 다시 한 번 좌절시켰다.

#2. "저는 그저 운이 좋아서 살아남았습니다"

아버지로부터 계속 구타를 당하던 딸은 고민 끝에 자신을 지키기 위해 경찰에 전화를 걸었다. 그런데 신고를 받고 도착한 경찰은 '그래도 아빠인데 경찰에 신고를 하면 어떻게 하냐' 며 되레 피해자를 나무랐다. 심지어 피해자 앞에서 가해자와 앉아 농담 따먹기를 하며 껄껄 웃기까지 했다. 이 장면을 본 피해자는 '나는 사람이 아니냐'며 울부짖었다. 그는 '제발 오늘 만이라도 아빠와 내가 다른 장소에 있게 해주면 안 되겠느냐'고 애원도 했지만, 경찰은 아무런 조치 없이 돌아갔다.

경찰이 돌아간 날, 피해자는 문을 잠그고 문 밖 소리에 온 신경을 곤두세우며 밤을 지새워야만 했다. 이후 가해자는 피해자에게 칼을 들이밀고 찔러 죽이겠다거나, 라이터를 들고 집에 불을 지르겠다고 끊임없이 협박했다. 피해자는 '몸에도 마음에도 많은 멍이 들었던 아이를, 경찰과 국가는 지켜주지 않았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가정폭력 피해자를 죽음으로 내모는 국가 대응시스템을 전면 쇄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날로 높아지고 있다. 최근 발생한 서울 강서구 가정폭력 살해사건에 분노한 시민들은, 가정폭력의 철저한 수사와 가해자 엄중 처벌을 정부에 요구했다.

한국여성의전화 등 690개 여성·시민단체가 공동주최한 '국가의 가정폭력 대응 강력 규탄 기자회견'이 29일 오전 서울 종로구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계단 앞에서 열렸다.

사회를 맡은 송란희 한국여성의 전화 사무처장은 "가정폭력 피해자들에게 주변에서는 '왜 참고 살아, 신고하면 되잖아', '화해하고 치료, 상담해서 고쳐서 살아', '그렇게 힘들면 도망쳐서 이혼해서 살아' 라고 흔히 말한다"면서, "하지만 보호받아야 할 피해 당사자들은 경찰과 검찰, 법원의 '무능력', '무대응', '무관심' 속에서 2차 가해를 입고, '내가 죽어야 폭력이라고 인정해 줄거냐'고 말한다"고 전했다.

강서 주차장 전 부인 살인사건 피의자 김 모(48)씨가 25일 오전 서울 양천구 서울남부지방법원에서 열린 영장실질심사(구속 전 피의자 심문)에 출석하고 있다. 2018.10.25.
강서 주차장 전 부인 살인사건 피의자 김 모(48)씨가 25일 오전 서울 양천구 서울남부지방법원에서 열린 영장실질심사(구속 전 피의자 심문)에 출석하고 있다. 2018.10.25.ⓒ뉴시스

지난 10월 22일 서울 강서구 등촌동 아파트 주자창에서 이혼한 전 남편이 휘두른 흉기에 한 여성이 살해당했다. 해당 여성은 25년 간 가해자로부터 상습적인 가정폭력을 당했고, 가해자는 이혼 후에도 살해 협박을 계속했다. 가해자가 상해 죄로 검거됐지만 격리나 처벌은 이뤄지지 않았다. 결국 가해자를 피해 도망다니던 피해자는, 휴대전화번호를 10여 차례 바꾸고 거주지를 6차례 옮기고 개명까지 해야만 했다.

법원은 가해자에게 접근금지명령을 내렸지만, 피해자를 보호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가해자는 자녀를 미행 추적하고 피해자의 집과 회사, 친적 집 등을 수시로 찾아와 살해 위협을 가했다. 가해자는 "너를 죽여도 심신미약으로 6개월이면 감옥에서 나올 수 있다"는 말을 대놓고 했다. 그는 치밀하게 계획적으로 살해 계획을 세웠다.

허순임 전국가정폭력피해자보호시설협의회 상임대표는 해당 사건을 언급하며 "가정폭력 피해자는 폭력에서 탈출해도 이혼해도 (고통이) 끝나지 않는다. 죽어야 끝이 난다"면서, "사람이 죽어나가는 동안 국가는, 법은, 경찰은 가정폭력에 개입할 수도 끊을 수도 피해자를 보호할 수도 있으나, 오히려 피해자에게 가정을 보호하고 유지하라고 강요하며 2차 가해를 한다"고 주장했다.

허 상임대표는 "가정폭력 피해자의 인권과 생명을 보호하고, 안전을 보장할 수 있는 가정폭력 피해자 지원체계를 다시 만들어야 한다"면서, "가해자가 제대로 처벌 받을 수 있는 시스템을 반드시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날 기자회견에는 '강서 주차장 살인사건' 피해자의 지인도 참석했다. 그는 "결혼 생활 중에 가정폭력에 시달리고, 이혼 후에도 협박을 받으며 두려움과 공포 속에서 생활하는 것을 누구보다 가까운 곳에서 지켜봤지만 해줄 수 있는 게 없었다. 숨어 다니라는 말밖에……."라며 울먹였다.

또 그는 "앞으로 다시 발생해서는 안되는 끔찍한 살인 사건의 가해자, 악마가 두 번 다시 세상 빛을 못 보게 사법부의 최고형량인 사형이 선고되도록 이번 기회에 시민 여러분이 도와달라"고 호소했다. 이어 "가해자가 약한 처벌을 받고 세월이 흘러 출소하면, (죽은) 친구의 식구들은 그 무서웠던 고통 속으로 되돌아갈 것이다. 세월이 흘러 친구가 또다시 (가족들에게) 미안해 하지 않도록, 한을 풀고 편안하게 지낼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말했다.

한국여성의 전화가 29일 오전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국가의 가정폭력 대응 강력규탄'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2018.10.29.
한국여성의 전화가 29일 오전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국가의 가정폭력 대응 강력규탄'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2018.10.29.ⓒ뉴시스

이들은 경찰이 가정폭력 범죄를 무대응 혹은 방조하고 있다고 규탄했다. 가정폭력 사건에 출동한 경찰은 재범의 위험성을 고려해 접근금지 등 피해자로부터 가해자를 분리하는 조치를 해야한다. 실제 응급조치, 임시조치 등 피해자 안전을 확보하기 위한 제도가 있지만, 경찰이 가정폭력을 '부부싸움', '집안 일'로 치부해 해당 제도가 실질적으로 작동하지 않고 있다.

고미경 한국여성의전화 상임대표는 "2013년 경찰청 자료에 의하면, 가정폭력 사건은 가정 안에서 해결해야 하는 것이 '우선'이라는 비율이 57.9%, 경찰이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다는 비율이 35%"라고 짚었다. 그는 "이러한 인식 하에서 가정폭력 피해자들이 만나는 최초의 공권력인 경찰이 가정폭력을 외면하거나 방관하는 사이, 피해자들은 가해자의 폭력으로 죽어가고 있다"고 울분을 터뜨렸다.

고 상임대표는 "작년 가정폭력 가해자가 쉼터에 침입했을 때, 경찰은 '집 나간 엄마와 아들을 찾는 아버지'로 문제를 규정하며, 가정폭력 가해자의 입장을 대변하지 않았냐"면서 "직무를 방기하며 무성의·무조치·무대응으로 일관한, 사건 당시 경찰을 찾아내어 제대로 징계하고 시스템을 똑바로 세워야 한다"고 목소리 높였다.

피해자들이 가정폭력으로부터 탈출하기 위해 이혼 소송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가해자에 의해 살해되거나 생명을 위협받는 사건이 종종 발생하고 있다. 가정폭력 피해자가 가사재판, 가사조정 및 협의이혼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법원이 가정폭력의 특성을 면밀히 고려하지 않아, 피해자가 폭력 위험에 내몰리는 과정이 반복되고 있다고 시민단체들은 지적했다.

원민경 변호사(법무법인 원)는 "14개 법원에서 실시하고 있는 협의이혼 시 의무면담 제도는 대표적으로 가정폭력의 특수성을 도외시하는 제도"라고 문제점을 지적했다. 이어 "가정폭력 피해자가 어렵게 가해자와 협의가 이뤄져 이혼신청을 하게 된 경우에도, 법원은 예외없이 의무 면담을 실시하고, 혼인 회복을 위한 부부상담을 적극적으로 권유해 부부상담을 거절하는 피해자를 가해자가 비난하게 하거나 혼인 파탄의 책임을 전가하는 것을 방조하고 있다"며 "가정폭력을 이유로 협의 이혼 신청이 이루어진 부부의 의무면담 제도를 즉각 중단하라"고 촉구했다.

이혼소송 절차에 들어가서도 가정폭력 피해자들은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었다. 원 변호사는 "(이혼소송에 들어간) 피해자들은 '제 진단서와 가해자에게 맞은 사진을 재판부가 과연 보았을까요?'라고 저에게 묻는다. 그런데 저도 잘 모르겠다"라고 법원의 이혼소송 과정에 대한 의구심을 나타냈다.

원 변호사는 "법원은 가정폭력의 특수성을 고려하지 않고, 가해자에게 자녀의 폭넓은 사전 사후 면접교섭권을 인정함으로써 면접교섭권 과정에서 피해자와 자녀가 위험에 노출되는 경우를 저희는 많이 보고 있다"면서 "법원은 가정폭력이 이혼사유가 된 경우에는 복수의 전문기관 의견을 통해, 가해자와 자녀의 면접이 안전한 것으로 확인된 경우에만 면접교섭권을 인정해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가정폭력 (자료사진)
가정폭력 (자료사진)ⓒ기타

여성들은 법률상 가정폭력이 형사처벌이 가능한 범죄이지만, 사실상 처벌되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2016년 가정폭력 실태조사에 따르면, 배우자 폭력 피해자 중 경찰에 도움을 요청한 비율은 1.7%에 불과하다. 2017년 기준으로 경찰 검거율은 14%에도 못미치고, 검찰의 기소율은 9.6%, 구속율은 0.8%다.

이들은 이러한 결과가 현행 가정폭력처벌법이 '가정 보호와 유지'를 주된 목적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가정폭력범에게 형사처벌을 대신 교정을 위한 보호처분을 하는 방식으로 운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검찰은 가정폭력 가해자들을 기소하지 않고, 약 40%(2017년 기준)에게 상담이나 교육을 조건으로 기소유예하거나 가정보호사건으로 송치한다"며 "가정보호사건을 심리하는 법원 역시 약 45%(2016년 기준)에 대해 아무런 처분도 내리지 않고, 보호처분을 해도 상담이나 교육, 사회봉사 명령을 내리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설명했다. 특히 "피해자의 안전 확보에 기여할 수 있는 접근행위금지, 전기통신 이용 접근행위금지, 친권행사제한 등의 처분은 극히 드물다"고 지적했다.

양아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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