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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법농단 수사 맞서 ‘법원 가족들이여, 단결하자’는 꼰대판사들
대법원
대법원ⓒ양지웅 기자

“아니 우리가 법관을 상대로 수사하는데 절차를 안 지키겠나? 그렇다고 강압 수사를 하겠나? 위법 수사를 했다는데, 솔직히 다 알만한 사람들이 그런 말 하면 안 되지.”

지난 30일 사법농단 사건과 관련한 검찰의 이메일 압수수색이 위법했다는 김시철 서울고법 부장판사의 주장을 두고 수사팀에 있는 모 검사가 한 말이다. 대화를 나누는 20여분 내내 황당해하는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김 부장판사가 쓴 문제의 글은 ▲영장에 적시된 피의사실과 관련성이 없는 이메일을 압수했다는 점 ▲영장 범위를 벗어나 법원 구성원 전체 이메일을 들여다봤다는 점 ▲이미 집행해 효력이 사라진 영장으로 재차 압수수색을 시도한 점에서 위법하다는 주장을 담았다. 고작 저 주장을 위해 A4 23페이지에 달하는 분량을 할애하는 바람에 읽는 이들은 혼돈에 빠졌다.

검사가 황당해 한 데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얼핏 보면 검찰이 뭔가 큰 실수를 한 것처럼 비춰질 수 있지만, 김 부장판사의 주장이 너무나도 터무니없었기 때문이다.

우선 ‘피의사실과 관련이 없는 이메일 자료를 가져갔다’는 건 김 부장판사의 주장에 불과했다. ‘피의사실과의 관련성’ 여부는 다툼의 소지가 있으므로, 법정에서 해당 자료의 증거능력을 다투면 된다. 물론 수사 단계에서 수사 대상이 주장할 수는 있는 부분이다. 또한 ‘법원 구성원 전체 이메일을 들여다봤다’는 주장도 거짓이었다. 이는 ‘전체 이메일 백업 데이터’ 추출 작업을 두고 한 말인데, 추출하는 동안 검찰은 그 작업을 하는 ‘기계’를 볼 수 있을 뿐이다. 추출 이후 선별 작업을 할 때엔 김 부장판사가 참여했다. 그래서 혹여 검찰이 선별 과정에서 다른 이메일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수는 있었을지 몰라도 두 눈 뜨고 보고 있는 김 부장판사 앞에서 엄두조차 낼 수 있었을까? 같은 영장으로 두 번 압수수색을 시도했다는 주장도 앞뒤가 맞지 않다. 백업 데이터를 복구하는 방식의 이메일 압수수색은 하루 만에 끝날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다. 그래서 수일간의 추출 작업과 선별 작업이 모두 끝나야 영장 집행이 마무리되는 것이다. 그래서 보통 영장 유효 기간을 여유있게 잡거나, 추가로 기간을 연장해서 영장 집행을 하는 경우도 많다.

김 부장판사가 정말 저런 사실관계를 전혀 모른 채 엉뚱한 주장을 했을까? 사실관계를 바탕으로 재판에서 판단하는 것을 업으로 하는 사람이 한 말이라 더욱 심각하다.

꼰대들이 원하는 것

검찰이 판사를 상대로 강제수사까지 하는 상황에 대해 꽤 많은 고참 판사들이 기분 나빠하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또 다른 꽤 많은 판사들은 하루 수십 건의 재판을 처리하는 데 정신이 없다. 나머지 판사들은 소극적으로나마 적폐청산과 개혁을 외치고 있다. 각급 판사회의에서 터져나오는 이 사람들의 목소리는 결코 작지 않다.

김 부장판사는 가장 앞서 언급한 ‘검찰 수사에 기분 나빠하는’ 그룹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이 사람들에게 ‘재판 처리에 몰두하는’ 판사들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대신 판사회의에서 목소리를 내는 소장 판사들이나 일부 중견 판사들은 골칫거리로 여겨질 수 있다. 이들의 비중은 점차 확산될 수도 있다. 고참 판사들은 그 확산을 경계할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대놓고 그들에게 ‘쓸데없는 소리 말고 재판이나 열심히 하라’는 식의 노골적인 주문을 하는 건 위험 부담이 크다.

그래서 사실관계를 왜곡해서라도 조직 내부에 새로운 논쟁거리를 던지고 있는 것이다. 김 부장판사가 내부망에 올린 주장 글이 바로 그런 성격이다.

검찰이 법원을 상대로 무리한 수사를 하고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는 것 자체가 법원 안팎에 미치는 효과를 무시할 수 없다. 사법농단에 맞춰져 있던 이 사안의 초점이 검찰 수사 방식의 문제로까지 번질 수 있기 때문이다. 내부적으로는 ‘아무리 우리가 잘못했다고 해도 검찰이 이렇게까지 하면 안 되지’라는 여론도 자연스럽게 형성될 것이다. 이런 양상은 결국 조직 대 조직의 대치 문제로 이어진다. 여기까지 간다면 일단 법원 내 수사 반대론자들의 작전은 성공하는 것이 된다.

그렇다면 그들에게 중요한 건 조직력이다. 그 조직력은 구성원들의 일치된 목표와 ‘우리는 하나’라는 인식을 바탕으로 강해진다. 그런 측면에서 김 부장판사가 문제의 글에서 무려 11번이나 쓴 ‘법원 가족’이라는 표현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불법적인 수사로 ‘법원 가족’ 전체의 이메일 자료가 합법적 근거 없이 검찰의 수색 대상이 됐다”, “나 개인의 문제가 아닌, 법원 가족 전체에 대해 심각한 문제를 야기할 수 있는 상황” 등의 표현이다. 이는 곧 ‘우리 전체가 피해자다. 그렇기 때문에 이대로 당하고 있으면 안 된다’는 메시지다.

앞서 조국 청와대 민정수석비서관이 지적해 더 화제가 됐던 강민구 서울고법 부장판사의 주장 역시 같은 맥락이다.

그는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이 밤샘조사를 하고 나온 직후, 검찰의 밤샘조사 관행에 위법 소지가 있다고 지적하면서 “이런 관행이 비록 당사자나 변호인의 자발적 동의가 있다 해도 위법이라고 외칠 때가 지났다고 생각한다”고 판사들에게 단결을 주문했다.

그러면서 한 말이 더 가관이다. “이런 조서의 증거능력을 배척하면 단박에 고칠 수 있고, 형사재판 법관 한 명의 결단만 남았다. 검사를 욕할 게 아니라 판사가 불승인하면 하라 해도 안할 터이다. 즉 법원이 변하면 다 변한다.”

법정에서 검찰이 야간 조사를 해서 낸 피의자 진술조서를 증거로 인정하지 말라는 일종의 ‘지침’까지 제시해 준 것이다.

믿고 싶지 않지만, 우리 국민들은 그동안 이런 약은 판사들한테 재판을 받아왔다.

강경훈 기자

법조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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