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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세에 은퇴한 이웅열 vs 병상에서도 회장인 이건희와 정몽구

2015년 가을 정몽준 아산재단 이사장이 FIFA(국제축구연맹) 회장에 출마하겠다고 선언했을 때 일이다. 울산의 현대중공업을 비롯해 정 이사장이 이끄는 울산과학대학 등에서 묘한 기류가 형성됐다.

특히 민주노조를 재건한 이후 정 이사장과 날카롭게 대립각을 세웠던 노동자들 사이에서조차 “정 이사장의 FIFA 회장 출마를 도와야 하는 것 아니냐?”는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보수적 성향의 울산과학대 교수 사회에서도 “정 이사장이 꼭 FIFA 회장에 당선됐으면 좋겠다”는 말들이 나왔다.

진보적 노조와 보수적 교수 사회가 동시에 정 이사장의 출마를 반기는 어색한 상황이 벌어졌다. 이유가 뭘까? 한 노동자는 “제발 좀 정 이사장이 FIFA 회장이 돼서 한국을 떠났으면 좋겠다. 요즘 정치권에서 맡은 역할이 없다보니 이 사람이 울산에 상주하다시피 하며 경영에 간섭을 하는데, 아주 죽을 맛이다”라고 귀띔했다.

다른 노동자도 “정 이사장이 울산에 없는 게 이 회사에 제일 도움이 된다. FIFA 회장이 되면 바빠서 적어도 울산에는 안 올 것 아니냐”고 분위기를 전했다. 보직 교수들 사이에서조차 “왜 저런 최악의 직장 상사를 우리만 겪어야 되느냐? FIFA 직원들도 좀 당해볼 필요가 있다”는 농담까지 나왔다고 한다.

이 정도면 보수와 진보를 떠나 정 이사장은 그 어느 곳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리더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정 이사장은 FIFA로부터 징계를 받아 출마 자체에 실패했고, 그가 한국에서 떠나기를 열망했던 노동자들과 교수들의 소망은 이뤄지지 않았다.

이 일화에서 드러나는 사실이 하나 있다. 무능한 한국의 재벌들이 절대 모르고 있는 것 중 하나는 자신이 무능한 리더라는 사실이다. 자기 빼고 주위에서는 다 아는데, 이 사람들은 그걸 모른다. 그래서 자기가 없어지면 회사가 망하거나, 큰 위기에 빠질 것이라고 착각을 한다. 한국의 재벌들이 웬만해서는 은퇴를 하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웅렬의 은퇴와 이건희, 정몽구의 회장직 유지

지난달 말, 한국 재벌 사회에서는 좀처럼 보기 드문 신선한 일이 벌어졌다. 코오롱 그룹 이웅렬 회장이 은퇴를 선언한 것이다. 이 회장의 나이가 62세임을 감안하면 매우 이른 퇴진이다. 게다가 그는 “절대로 그룹 경영에 복귀하지 않겠다”고 선언하기까지 했다.

물론 이를 과대평가할 이유는 없다. 이 회장은 여전히 코오롱 그룹의 최대주주이고, 그의 경영권은 결국 30대인 아들에게 넘어갈 것이다. 이 회장은 “그동안 금수저를 물고 있느라 이가 다 금이 간 듯하다”면서 마치 세습 경영을 그만 둘 것처럼 폼을 잡았지만, 아들 이규호 전무는 이미 코오롱 경영의 실세로 올라섰다. 이웅렬 회장의 퇴진으로 코오롱 그룹의 4세 세습 경영이 조금 빨라졌을 뿐이다.

이웅열 코오롱그룹 회장
이웅열 코오롱그룹 회장ⓒ제공 : 코오롱그룹

하지만 이런 점을 감안하더라도 62세에 퇴진을 결심한 그의 태도는 신선하다. 대부분의 한국 재벌들이 퇴진을 극도로 싫어하는 것과 비교하면 더욱 그렇다.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은 2014년 5월 심근경색으로 쓰러졌고 그로부터 4년 반이 지났다. 그런데도 이 회장은 여전히 삼성의 회장이다. 병으로 쓰러진 이에게 매몰차게 굴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지금 그에게 그룹 회장이라는 직책이 무슨 소용이 있겠나?

현대차 그룹 정몽구 회장도 지금 병석에 누워있다는 것이 거의 정설이다. 일각에서는 정 회장이 총기를 잃은 지 오래라는 이야기도 나온다. 그런데도 정 회장은 여전히 현대차 그룹의 회장이다. 지난해 그가 받아간 연봉만도 80억 원에 이른다.

그들이 은퇴하지 않는 이유

한국의 재벌들이 극도로 은퇴를 꺼리는 이유가 몇 가지 있다. 그 중 첫째는 재벌들의 경영권이 매우 불안하기 때문이다. 한국의 재벌들은 그동안 순환출자와 상호출자, 각종 탈세와 편법 등을 이용해 경영권을 세습해 왔다. 그런 짓을 했는데도 이들의 경영권은 여전히 확고하지 않다.

코오롱의 이웅렬 회장이 호기롭게 은퇴를 선언할 수 있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 회장은 재벌들 중 보기 드물게 그룹 지배력이 강한 사람이다. 이 회장은 지주회사인 코오롱을 통해 그룹을 지배해 왔는데 그의 코오롱 지분율은 무려 48.5%에 이른다. 은퇴를 선언해도 이 회장의 지배력은 절대 약해지지 않는다. 그러니 은퇴를 선언할 수 있다.

반면 이건희 회장이나 정몽구 회장은 사정이 전혀 다르다. 이건희 회장의 삼성전자 지분율은 4%에도 못 미친다. 그룹 지주회사격인 삼성물산 지분도 2.85%밖에 없다. 정몽구 회장도 마찬가지다. 그 역시 현대모비스 지분 6.9%, 현대차 지분 5.3%를 갖고 있을 뿐이다. 기아차 지분은 한 주도 없다. 이러니 은퇴가 불안할 수밖에 없다.

또 이 회장이나 정 회장 모두 형제들과 치열한 다툼을 벌인 경험이 있다. 정몽구 회장은 그 유명한 현대그룹 왕자의 난에서 동생 정몽헌 회장에게 패한 경험이 있고, 3남인 이 회장은 장남인 이맹희 제일비료 회장을 제치고 그룹 회장에 오른 인물이다. 경영권에 대한 불안감이 남다를 수밖에 없다.

재벌들이 은퇴를 꺼리는 두 번째 이유는 과도한 자존감 탓이다. 재벌들은 자신의 경영능력을 매우 과대평가한다. 그래서 주변에서는 이들이 빨리 퇴진하기를 원하는데, 정작 자신은 자기가 없으면 회사가 망할 것이라고 착각한다.

2015년 <조선일보>는 정몽구 회장의 헬기 경영에 대해 다룬 적이 있다. 정 회장의 특기가 시도 때도 없이 헬기를 타고 현장을 방문하는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그 기사에 이런 대목이 있다.

[ 그가 탄 헬기가 뜨면 현대차 직원들은 긴장한다. … 반대로 정 회장의 헬기가 떠나는 소리가 들리면 임직원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한 현대차 그룹 임원은 “헬기 소리가 크고, 주로 회장이 이용하기 때문에 헬기 소리가 멀어지면 마음이 편해진다는 임원들이 많다”고 말했다. ]

회장님이 멀어지셔야 임직원들 마음이 편해진단다. 이게 정몽준의 FIFA 회장 당선을 염원하던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의 마음과 일치한다. 그런데 남들이 다 아는 사실을 재벌들만 모른다. 지나친 자존감이 이들의 판단을 흐린다.

시스템의 오작동

그런데 이들의 은퇴가 늦어지는 보다 중요한 이유가 있다. 경영자의 자질과 경영성과를 판단하고 책임을 물릴 시스템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코오롱 이웅렬 회장은 자신의 은퇴 이유를 “경영이 정체돼 있어서”라고 설명했다. 뭐, 좋은 반성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원래 기업 경영이라는 것은, 경영이 정체됐을 때 이사회를 통해 경영자에게 그 책임을 묻는 것이 정석이다. 이게 바로 주식회사의 시스템이다. 세계 최대 차량공유업체인 우버의 창업자 트래비스 칼라닉은 2017년 회사 경영에서 손을 뗐다. 이사회가 창업자인 그에게 해임 권고를 내렸기 때문이었다.

칼라닉은 우버의 상징이었지만, 그는 운전기사와 말싸움을 벌였고 여직원 성추행 의혹도 불거졌다. 심지어 이사회가 문제 삼은 대목 중에는 “2014년 칼라닉이 한국을 방문했을 때 룸살롱에서 놀았다”는 대목도 있었다. 여기에 경영 실적까지 나빠지자 이사회는 주저 없이 그를 해임시켰다. 칼라닉 자신도 이사회에 참여해 자신의 퇴진에 한 표를 던졌다.

파파존스 피자의 창업주 존 슈내터도 7월 11일 이사회에서 해임됐다. 파파존스의 ‘존스’는 존 슈내터의 이름이다. 그 정도로 존 슈내터는 이 회사의 상징이었다. 하지만 존 슈내터가 흑인들을 “깜둥이”라고 부른 것이 알려지자 이사회는 주저하지 않고 회사의 상징을 해임시켜 버렸다.

물러날 생각이 없다면 물러나는 시스템이 마련돼야 한다. 룸살롱이 아니라 성매매를 해도, 인종차별이 아니라 사람을 패도, 여직원들에게 “너는 왜 나 안 안아주냐?”라며 질척대도 여전히 회장님으로 살아남는 한국의 시스템으로는 그들과의 경쟁에서 이길 수 없다. 코오롱 이웅렬 회장의 조기 퇴진이 우리에게 남긴 교훈은, 제발 좀 정상적으로 경영자를 평가하는 시스템이 구축돼야 한다는 사실이다.

이완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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