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보기
댓글보기
[만민보] 여사원이니 과일 깎아라? 11년차 직장인이 알려주는 ‘직장 호신술’
없음

누군가 믹스커피를 타 마신 머그컵을 바득바득 닦고 있을 때였다. 수세미로 아무리 문지르고 문질러도 커피 자국은 지워지 않고 한숨만 푹푹 새어 나오던 그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마신 컵도 아닌데 왜 닦아야 해."

회사의 막내라면 누구나 한 번쯤 맞닥뜨리는 이 같은 상황에 유쾌한 해결책을 제안하는 웹툰이 있다. 바로 직장 만화 '삼우실'이다.

삼우실이란 제목은 출근길에 오늘 할 일에 대해 생각하고, 점심시간에는 오늘 뭘 먹을지 고민하고, 퇴근 시간에는 지금 퇴근할 시간인지 가늠하는 것, 이 세 가지 고민 외에 다른 감정 소비는 하지 말자는 의미다.

삼우실의 주인공인 조용히 씨는 잔뜩 쌓여있는 머그컵들을 홀로 설거지하고 있는 막내 사원에게 '3초 안에 설거지를 끝내는 방법'을 알려준다. 흐르는 수돗물에 '휘휘' 헹구고 끝. 그러고 나선 이렇게 생각한다.

"물로 헹궈준 게 어딥니까."

삼우실은 회사에 한 명쯤은 있을 법안 '꼰대'들의 갑질에 대처할 수 있는 방법들을 알려주는 웹툰이다. 나름 되바라지지 않게, 은근히 갚아주는 방법들이라 사회초년생들 사이에서 '핵사이다'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뜨거운 반응에 힘입어 웹툰 삼우실은 지난달 '함부로 대하는 사람들에게 조용히 갚아주는 법'이라는 제목의 책으로 출판되기도 했다.

삼우실의 작가 김효은 씨는 이같은 직장 만화를 구상한 배경에 대해 "제가 '고구마 답답'이 시절 당했던 것들을 모조리 녹여서 다른 사람들이 이런 시행착오를 겪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기획하게 됐습니다"라고 설명했다.

11년차 기자가 얼떨결에 작가가 된 사연은

웹툰 삼우실 중 25화 '과일' 편
웹툰 삼우실 중 25화 '과일' 편ⓒ삼우실 캡쳐

김효은 작가는 사실 10여년을 현장에서 취재하고, 기사를 써온 CBS 기자다. 그동안 사건팀에도 몸을 담았고, 법조·국회팀 등 굵직한 부서들을 한 번씩 다 거쳤다.

그러다 지난해 뉴미디어 콘텐츠 제작에 주력하는 센터가 신설되면서 부서를 옮기게 됐고, 그때 직장생활을 소재로 한 웹툰을 써보겠다고 '발제'를 했다. 스물넷에 직장생활을 시작한 김 작가는 현재 자신의 정체성을 '기자'보다는 '직장인'이라고 표현했다. 삼우실은 이렇게 탄생했다.

"저는 제 정체성을 직장인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제가 제일 잘 감정이입해서 만들 수 있는 이야기가 여성 화자인 직장인에 대한 이야기겠다고 생각했어요. 저도 직장 생활한 지 10년 정도 됐기 때문에 당한 것도 있을 테니까요. 그것을 모조리 녹여서 만들어봐야겠다고 해서 시작하게 된 거죠."

김 작가의 말처럼, 삼우실의 배경이 되는 주식회사 대팔기획에서는 회사에서 한 명쯤 있을 법한 캐릭터들이 등장한다.

겉으로는 젠틀한 '척' 하면서도 속은 능구렁이인 구 대표와 남의 말을 잘 듣지 않는 그야말로 꼰대 상사인 조 상무, 전형적인 아부왕 홍 과장까지. (물론, 잡무만 떠안는 막내 여사원 꽃잎 씨와 일이 많아 야근이 잦는 일만 씨도 있다.)

주인공 '조용히' 씨는 이런 상사들에게 당하고만 있지 않고 맞서서 자신을 지키는 인물이다. 김 작가가 삼우실에 대해 '인생 호신술', '직장생활 호신술'이라고 자평한 이유도 이 때문이다. 조용히란 평범하지 않은 이름 역시 "조용히 입닫게 만드는 사회 분위기에 저항하는 의미에서, 반어적인 의미에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김 작가는 설명한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퇴근하려는 조용히 씨에게 아부왕 홍 과장은 "매일 칼퇴하네?"라며 비아냥거린다. 조용히 씨는 정색하고 "(칼퇴 아니고) 정시 퇴근인데요."라고 맞받아친다. 이에 더해 김 작가는 "칼출(칼출근)이라는 말은 안 쓰잖아. 그러니 '정시 출근', '정시 퇴근'이 맞지. 올바른 단어를 사용해주십시오."라고 덧붙인다.

또 다른 장면.

거래처에서 과일을 보내왔다. 자연스럽게 '막내 여사원'인 꽃잎 씨가 과일을 깎아야 한다고 몰아가는 꼰대 상사 조 상무. "과일은 자고로 여자가 깎아야 맛있지"라는 어이없는 발언까지 보탠다.

이때 조용히 씨가 나서서 과일을 깎아온다. 만화 맨 마지막 컷에 첨부된 사진에는 예쁜 모양은 고사하고 껍질과 씨도 제대로 발라지지 않은 사과가 놓여 있었다. 김 작가는 "과일은 먹고 싶은 사람이 스스로 깎아 먹으면 안 될까. 이 단순명료한 이치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행동으로 보여주는 수밖에"라는 설명을 달았다.

김효은 작가가 전하는
느닷없는 얼평에 대처하는 법

김효은 작가
김효은 작가ⓒ김효은 작가 제공

아직도 이런 회사가 있을까? 불행히도 생각보다 많다. 삼우실의 배경이 되는 회사와 인물들은 물론 가상의 인물들이다. 하지만 소재가 되는 이야기들은 김 작가도 겪고,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도 겪은, 그야말로 나와 너가 함께 겪은 '실화'들이다. 특히 40회 이후부터는 독자들의 제보를 많이 활용했다고 한다.

"제보들이 많이 들어와요. 양진호 사건 이후에 '저도 이런 갑질 많이 당해봤다'고 메시지를 많이 보내주시더라고요. 답장을 일일이 다 못 드릴 정도였죠. 그런데 독자들이 사연을 주면 (웹툰처럼) 사이다 결말인 경우는 거의 없어요. (그럴 때) 실제로 제가 (사이다 행동을) 했던 경험들이나 (사이다 행동을) 해본 사람들의 이야기를 참고해서 이야기를 짜는 편입니다."

김 작가도 물론 조용히 씨가 아닌 꽃잎 씨와 같이 속으로 참고 넘어가던 시절이 있었다. 취재원과의 관계 때문에, 혹은 '이렇게 해도 될까'라는 괜한 걱정 때문에.

국회에 출입할 당시 김 작가가 겪었던 한 일화다. 이른바 '의원실 마와리'(처음 국회로 발령받았을 때 국회 의원회관에 있는 의원실을 일일이 찾아 보좌진 등 취재원들과 인사하는 것)를 돌고 있을 당시, 한 보좌진이 같은 매체 여기자들을 잘 안다며 "거기 여기자들은 외모를 보고 뽑나 봐"라는 이야기를 했다. 취재를 잘한다거나, 기사를 잘 쓴다는 등 일에 대한 평가가 아닌 느닷없는 얼평(얼굴평가)에 김 작가는 기분이 불쾌했지만 웃으며 넘겼다고 한다.

"그때는 그 불쾌함을 표현하지 못했죠. 그냥 '아하하, 네'라고 하면서. 왜냐하면 그땐 (취재원인) 이 사람이랑 친해져야 했으니까요.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는데 (그 생활을) 2년 동안 계속했네요."

이제 김 작가는 낯선 사람이 느닷없이 외모 평가를 할 때 대꾸하는 방법을 알려준다. 다음은 김 작가가 전하는 팁.

"요새는 초면에 외모 칭찬하면 예의 없는 거라던데, 하하하."

"가만히 있으면 아무것도 안 바뀐다
다만, 자책하지 않았으면"

웹툰 삼우실 15화 카독 편
웹툰 삼우실 15화 카독 편ⓒ웹툰 삼우실 캡쳐

김 작가는 원래부터 성격이 쿨한 편은 아니었지만, 온갖 불편한 상황에 맞서다 보니 자연스레 성격은 변해갔다고 털어놨다. 물론, 웹툰의 조용히 씨처럼 행동하면 '적이 생기지 않겠느냐'고 걱정하는 독자들도 있다.

그러나 김 작가는 "누가 뭐라고 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죠, 제 모습이 좋아 보이지 않는 사람이 있을 수 있죠. 예전엔 엄청 담아두고, 곱씹었던 적이 있었지만, 그런다고 달라지진 않잖아요"라며 "법륜스님이 말한 것처럼 (그런 생각이 들 때나, 안 좋은 말을 들을 때면) 바로 '감정 쓰레기통'에 넣어버리고 신경 안 쓰는 거죠"라며 자신만의 대처법을 소개했다.

다만 불편한 상황에 맞서지 못한다고 해서 자기 자신을 자책하지 말라는 따뜻한 당부도 이어졌다.

"가만히 있으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너무 애쓰지 않았으면, 자책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런 (불편한) 상황들은 우리의 잘못이 아니기 때문이죠. 용히 씨처럼 할 수 있으면 좋은데, 다만 안 되더라도 너무 스트레스받을 필요는 없을 거 같아요."

오늘도 회사 생활을 참고 버티는 독자들에게 한마디 해달라고 부탁하자, 김 작가는 "나 없어도 회사는 돌아갑니다"라고 웃으며 말했다.

"제가 몸이 안 좋아서 휴직을 하려고 했을 때 이런 고민을 했어요. 첫째는 '내가 빠지면 다른 사람이 남은 업무를 떠안을 텐데'라는 고민과 둘째는 '경력이 꼬이는 거 아닌가' 하는 고민이요. 그런데 한 선배가 '너 없어도 회사는 어떻게든 돌아가니 신경 쓰지 말라'고 하더라고요. 그 말이 큰 도움이 됐어요. 아, 크리스마스 전날(24일)이 월요일인데, 24일에 휴가 내도 될까, 연차 내도 될까, 고민하는 분들 계시죠? 자신의 권리잖아요. 내세요."

인터뷰를 마치고 헤어지기 전, 김 작가는 책 앞장에 직접 사인을 해서 선물로 건넸다. "기자님, 정시퇴근하세요"라는 짧은 문구와 함께.

남소연 기자

기자를 응원해주세요

기사 잘 보셨나요? 독자님의 작은 응원이 기자에게 큰 힘이 됩니다. 독자님의 후원금은 모두 기자에게 전달됩니다.

이시각 주요기사

카카오톡 카카오스토리 카카오스토리2
닫기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