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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인석 칼럼] 예술보다 중요한 것은 인간에 대한 존중

지난 11월 29일 김윤수 선생이 돌아가시고 저와 관계된 회고담을 차일피일 미루던 중 올해의 마지막 날에 마무리 하였다. 저와 관계된 선생과의 추억이 얼마나 많고 중한 게 있을까마는 선생과 나는 연배차이가 제법 나고 사회적인 관계가 느슨한 처지라 후일, 선생을 연구하게 될지도 모를 얼굴 모르는 후학들을 위하여 없애는 것 보다는 조금 보태는 것이 좋겠다 싶어 글을 쓰기로 마음을 먹었다. 오히려 선생과는 많은 연배차이 때문인지 내가 이리 저리 깝치듯 깐죽대는 태도를 부려도 너그럽게 대해 주셨으니 선배들과는 다른 이면이 있기도 하다. 제 연배의 대부분이 그러하듯 나 또한 선생을 먼저 만난 것은 책을 통해서였다. 뒤에 알고 보니 고등학교 때 읽었던 <피카소의 성공과 실패>를 통해 처음 만났고 대학에서 민중미술에 눈을 뜰 즈음에는 “폭력과 예술”, “이중섭과 박수근”, “선전 잔재와 극복”, “한국 추상미술의 반성”, “광복30주년의 한국미술”등 여러 공저와 자료로 만났다. 당시 미대생이면 누구나 작업실 책꽂이에 한 권씩 꽂혀있는 그 두꺼운 <미술의 역사>도 대학원 시험을 준비하기 위해 독파해야만 했던 교재였다. 당시 학생운동의 언저리에 있던 미대생으로서 현실을 인식하고 목말라했던 시절, 선생의 논문들은 갈증을 채워주는 단비와 같은 것이었고 혼자 보기에 아까운 담론의 공유물 같은 것이었다.

김윤수 전 국립현대미술관장이 번역한 ‘미술의 역사’
김윤수 전 국립현대미술관장이 번역한 ‘미술의 역사’ⓒ필자 제공

그런 내가 선생께 처음 전화하게 된 것은 2000년 김대중 정부시절 내가 부산민족미술인협회 사무국장과 민족미학연구소 기획위원을 할 때 달라진 정세 속에서 예술의 길을 모색하기 위한 강연을 요청하기 위해서였다. 선생의 강연 허락은 흔쾌했는데 아 글쎄 막상 강연 날이 다가오면 한 달 뒤에 또는 두 달 뒤에 하시며 차일피일 미루는 것이었다. 당시 선생은 사단법인이 된 민예총에 이사장으로 계셨으니 또는 그 때문에 강연을 요청한 것이었고 내가 책에서나 보았지 그리 잘 아는 사이도 아닌지라 그래 언제까지 미루는지 보자하고 나는 계속 약속을 잡고 선생은 계속 다음에 다음에를 반복하니 급기야 그 해를 넘기고야 만 것이다. 그리고 다시 다음 해를 이어 2라운드를 시작하였다. 역시나 한두 차례 작년과 마찬가지로 미루기를 반복하시더니 5월 즈음인가 드디어 “그래 무슨 일이지 모르겠으나, 채희완 교수도 볼 겸 아무래도 이번에는 부산에 꼭 다녀가야겠다.”하며 날을 잡았으니 그때가 6월이었다. 그러고도 얼마나 급히 오셨는지? 원고도 미리 받지 못하고 그러니 보도자료 배포도 그냥 건너뛴 상황에서 김해공항에 마중을 나갔더니 대뜸 “여기 배인석이가 누구냐”라고 묻는 첫 대면과 더불어 길고 지루한 섭외 전은 끝났고 초청강연은 무사히 성사가 되었다.

“여기 배인석이가 누구냐” 부산 강연으로 맺어진 ‘인연’

그날의 강연 핵심은 ‘시대가 아무리 변해도 민중의 입장에서 고난의 길을 마다하지 않는 것이 민족예술의 길’ 뭐 이런 것이었다. 이 강연 이후 선생은 부산에 오실 때마다 나에게 연락을 하셨고 그때마다 뒤풀이며 술자리는 점점 편해졌고 친교가 되기 일쑤였다. 백낙청 선생등과 부산 어느 섬에 놀이 가서 죽을 뻔한 사건과 너무 할 일이 많아 결혼할 겨를이 없었다느니 그리하여 환갑이 넘어 결혼을 하게 된 경위며 자식을 안 가지기로 한 결정과 사모님과 만난 사연, 또 신혼 여행가서 사고 난 이야기와 헬기로 병원에 실려 간 수술 후일담을 들었고, 30대 초반인 나는 나의 눈높이에서 시시콜콜한 일상적인 질문을 연이어 하였으나 그때마다 자세하게 들려주시곤 하였다. 2002년 그해 겨울에는 선생과 나는 노사모 아닌 노사모가 되어 주변에 문자 발송을 투표 마감시간 몇 분전까지 전화를 주고받으며 독려하였고 끝내 대선 승리를 서울과 부산에서 동시에 환호하며 맛보기도 하였다. 선생의 댁은 양천구 목동이다. 내가 인사동에 근무하고 있을 때엔 술자리를 파하고 가끔 택시로 동행할 때 “너는 못 찾을 거니 그냥 목동에 파리공원을 꼭 기억해라 그럼 근처가 집이니 전화를 해라” 이러시곤 하였고 이래저래 후원을 하신다고 자동이체를 해놓은 것을 저와 사모님이 뒤에서 가격조정을 하였는데 말이 가격 조정이지 집안 살림살이 씀씀이를 알려 주는 것이나 진배없었다. 선생이 평생 살면서 없는 것이 몇 가지라고 하는데 그것이 재테크와 몸 챙기는 운동 같은 것이다. 운동은 너무 늙기 전에 젊을 때 해놓아라 우엉, 당근, 무, 표고버섯, 무청으로 만든 오채수를 마셔보라고 한 것은 선생이 돌아가시기 몇 년 전 건강이 안 좋아진 때 부터였다.

생전의 김윤수 전 국립현대미술관장
생전의 김윤수 전 국립현대미술관장ⓒ뉴시스

선생은 대학 퇴직금 중 몇 천 만원을 당시 민미협에 쾌척하시며 예전에 사라진 <그림마당 민>같은 갤러리를 다시 만드는데 보태라고 하셨으니 민미협과 민족미술 작가들이 속 편하게 그림을 발표할 수 있는 공간에 대한 애정은 남달랐다. 하지만 그 뜻을 이루는 것은 녹녹하지 않았고 매번 실패를 거듭했다. 목적이 뚜렷한 선생의 이름이 붙여진 기금은 항상 어려운 민미협에서 살림살이 용도로 조금씩 조금씩 쓰게 되었고 마지막 남은 금액이 바닥날 때 즈음은 내가 민미협 처장을 막 시작 했을 때였다. 2003년과 2004년 민미협은 조직 내외적으로 분란과 분열에 휩싸였다. 조직의 명운을 걸고 내부 문제에 대한 성토와 개혁이란 문제에 당면하여 해결의 실마리를 모두 찾아야 했을 때, 마침 만들어 놓은 홈페이지는 이런 목소리가 넘쳐나는 과열의 장이었다. 특히나 그때는 실명이 아닌 익명으로 홈페이지를 운영하였으니 여러 분란의 목소리가 거름장치 없이 밖으로 내비치게 된 것은 불 보듯 자명한 것이었다. 이 때도 선생은 구체적인 개인과 개인을 만나면서 그 논쟁과 견해를 밝히고 조정해 나가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으셨다. 인사동 술자리에서 젊은 사람들과 통초를 하며 큰소리를 치기도 하고 격 없는 대화도 하곤 했었다. 그런 모습을 볼 때면 청년 김윤수에 다름 아니었고, 본인 또한 청년 김윤수라고 직접 말하곤 하셨다. 그리고 홈페이지의 격한 논쟁 또한 빠지지 않았음을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다. 나는 이렇듯 중요한 사안이 있으면 높고 낮은 자리를 막론하고 나름대로 설득하고 주장했던 그런 분으로 기억을 하고 있다. 저에게 사무총장이면 어느 정도 급의 사람을 만나야지하며 누군가 이렇게 조언 할라치면 나는 급이 아니라 하고자 하는 일에 도움과 설득이 필요한 사람이면 누구든 만나야지요라고 대답할 수 있었던 것도 높낮이를 구분하지 않는 선생을 먼저 보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젊은이들과의 격의없이 대화하던 ‘청년 김윤수’

선생을 보아 오면서 큰 진가를 느껴 본 적이 있는데 그것은 국립현대미술관 관장에 재직하고 있을 당시 2005-2006년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에서 1부와 2부로 개최된 <한국미술 100년>전을 보았을 때였다. 그 전시로 하여금 그동안 선생에 대한 인생과 특정 단체에 가지는 애정과 기대를 깊게 이해 할 수 있었다. 그 전시는 한국의 미술이 지난 백 년간 숨 가쁘게 돌아가는 격동의 세월동안 자기의 정체성을 고민했던 노력과 그 이면에 우리가 잘못 알고 있는 주류 미술에 대한 허구성의 폭로임에 다름 아니었기 때문이다. 왜 <한국미술 100년>의 진가를 이해시키기 위하여 일본의 작품들을 빌려와서 대조를 시켜야 했는지를? 또 저런 사실들을 이미 아시고 한국미술의 정체성 찾기를 설파하기 위해 열정을 불태우고 독재에 대항하며 위험하고 답답한 세월을 살아온 울분과 안쓰러움이 단숨에 밀려왔으니 말이다. 네이버 인생 스토리에 있는 선생의 좌우명은 선천하지우이우(先天下之憂而憂), 후천하지락이락(後天下之樂而樂)’으로 ‘천하의 근심을 앞서 근심하고, 천하의 즐거움은 뒤에 즐거워한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나는 이 좌우명에 대한 이야기를 선생에게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 오히려 놀랍게도 본인은 야구를 아주 좋아한다고 했으며 중등학교 때 리틀 야구단을 하기도 했다는 이야기며 당시 중등학교는 5년제라 콧수염이 까무잡잡하게 나기 시작한 졸업 직전 어른이 다된 것 같은 선배들이 따뜻하게 자신을 대해줬던 추억담 같은 것이었다.

국립현대미술관이 개최한 광복60주년 기념 한국미술100년전 1부 홍보포스터
국립현대미술관이 개최한 광복60주년 기념 한국미술100년전 1부 홍보포스터ⓒ필자 제공
국립현대미술관이 개최한 광복60주년 기념 한국미술100년전 2부 홍보포스터
국립현대미술관이 개최한 광복60주년 기념 한국미술100년전 2부 홍보포스터ⓒ필자 제공

어느 분야든 그 분야가 최고이고 중심이 되어야 함을 역설하기 일쑤다. 그리 틀린 바도 아니다. 그러나 그 분야가 전체와 어떤 조화와 역할로 이루어져야 하는지는 잘 말하지 않는다. 민중을 중심 가치로 하여 민족을 위한 예술을 추구한 한국 현대미술은 그동안 편향적인 한국 사회에서 아래의 계급을 끌어 올려 더 크고 넓은 조화의 구성원으로 만들기 위해 고난에 찬 노력을 하여 왔던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왜 그런 노력이 필요했던 것이고 왜 그렇게 해야만 가치 있는 일이라고 여겼을까? 그것은 지난 시절 이웃들과 나누었던 따뜻한 추억을 그냥 버림당하게 할 수 없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그러므로 그 추억을 현실화 시키는 것이 매력적인 인생의 일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선생이 남긴 “예술보다 중요한 것은 인간에 대한 존중입니다.”란 말은 한국미술의 정체성을 어떻게 정립 시켜야하는지를 근본적으로 알려주는 철학이며 미학이라고 난 생각해 본다. 이제 나와 이웃이 가져야하는 존중과 품위를 선생의 시대보다 더 넓히기 위해 우리는 더 살아야 하고 다투기도 노력도 실천도 해야 한다.

선생과의 긴 만남이 어느 날 예고도 없이 급히 헤어지게 되었지만 두고두고 한국미술판에서 그리고 남북의 통일을 위해 보류해 놓았던 민족이란 한시적인 단어가 온전한 국호로 정립 될 때까지 선생의 민족 미학관이 후학들에게 어려울 때 다정한 벗이 되길 바라며 선생께서는 이제 곤한 여정 뒤로 하시고 편히 쉬시길 바래봅니다. 언제든 또 생각나고 뵈올 날 있겠지요.

배인석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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