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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남호 교육칼럼] 드라마 ‘SKY 캐슬’과 교육

요즘 한국의 입시문화를 고발하는 리얼 코믹 드라마가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다. 드라마는 소수 상위 계층에서 입시경쟁의 승자들이 대를 이어 가려는 처절한 욕망과 그 갈등의 과정을 그리고 있다. 이른바 강남 대치동을 중심으로 하는 입시문화를 다루고 있다.

이 드라마는 사교육에 주저하던 학부모와 학생들에게 “저렇게 해서라도 ‘승자 독식의 사회’에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학습효과를 주기도 할 것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저렇게까지 해서 승자가 되어야 할까?”하면서 애당초 선을 긋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이 드라마로 인해 경제적 여력이 없는 계층의 상대적 박탈감이 더해진다는 반응도 있으며, 소문으로 떠돌던 이들의 실체를 드라마 형식으로 드러내는 작가의 용기에 박수를 보내기도 한다.

그런데 공교육이든 사교육이든 이들과 같은 입시경쟁의 승자가 되고 싶은 욕망이 우리의 보편적인 현상이 된 지금 이 드라마는 단순한 ‘그들만의 리그(League)’가 아닌 것 같다.

드라마 등장인물의 가족 구성도
드라마 등장인물의 가족 구성도ⓒJTBC

한국에서는 너무 오랫동안 교육담론, 정부 그리고 학교현장이 소통없이 각자의 궤도를 움직이고 있는 것 같다. 맹목에 가까운 시험중심의 풍토가 궤도 수정없이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TV 드라마라는 대중예술이 현실 자체는 아니지만 현실의 반영이라는 점에서, 드라마를 보는 내내 지금도 계속되는 우리사회의 교육모순을 자주 떠올리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교육현실 모순과 갈등의 반영

이 드라마는 현실에 대한 치열한 고민의 흔적을 보여준다. 드라마 속 대사건은 우선, 박영재 엄마의 자살이다. 자신의 분신이라고 여겼던 아들이 그간 복수의 칼을 갈아왔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깨달은 데서 비롯된다. 아들에 대해 인격적 분리가 없는 가정, 즉 자녀에 대해 정신적 독립을 허용하지 않고 부모의 강한 소유욕에 의해 통제되어 점수기계가 되도록 몰아 부치는 숨막히는 가정환경에서 발생할 수 있는 비극이다.

등장하는 다른 가족들이 이러한 불행을 반복하지 않으려고 하지만 사교육에 의한 점수경쟁과 명문대 입학이 자신들의 존재감을 확보하는 유일한 길로 여겨지기 때문에 달리 대안이 없다. 최고의 입시코디네이터가 아니면 성에 차지 않는다.

드라마에서 갈등양상을 보면, 사교육, 가식, 위선, 감시와 의심 등의 방식으로 입시경쟁을 계속할 것인가 아니면 입시를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스스로 자녀의 내적 욕망과 판단에 맡길 것인가 하는 것이 있다. 이를 놓고 네 가정은 두 편으로 양분된다.

이어서 동화작가 이수임을 통해 비정한 입시현실을 끝내기 위한 시도를 할 것인가 아니면 이들의 치부를 드러내는 것을 막아야 하는 것인가를 놓고 갈등이 연장된다. 이수임은 이 드라마 작가의 분신으로 여겨진다. 현실타개를 위한 작가정신을 존중할 것인가 아니면 주민들의 명예가 실추될 것을 염려하여 작품활동을 막을 것인가의 충돌상황이다.

또 입시 코디네이터 김주영의 손을 거친 자녀가 박영재처럼 부모에 대해 복수와 원한의 감정을 갖고 가정을 파탄내지 않을까 하는 염려를 놓고도 갈등이 벌어진다. 입시 코디의 내면적인 복합적 갈등에 관심이 모아진다.

입시 코디:터미네이터처럼

입시 코디네이터의 깔끔하고 수려한 외모, 절제된 미소와 언어가 시청자마저 긴장시키며 카리스마를 갖고 있어 호기심을 더한다. 코디 역시 자신이 코디했던 학생의 자살, 영재 엄마의 자살을 지켜보면서 입시전쟁의 무의미함과 비인간성을 느꼈을 것이다.

그녀는 작가 이수임에게 소설쓰는데 협조하면서도 작가정신을 꺾게 만든다. 자신이 코디한 학생들에 대해 성취감을 안김과 동시에 죽음에 이르는데 일말의 책임을 면할 수 없는 존재다. 그녀의 손을 거치면 모든 것이 불가능에서 가능으로 바뀐다.

요원들을 통한 치밀한 정보력, 이들을 통솔하는 리더십, 입시를 스스로 겪으며 체득한 노하우 등으로 무장한 이 코디는 입시전사들을 키워내면서도 비정상적 현실에 순응한 이들에 대해 징벌도 가하는 터미네이터 역할까지 수행한다. 이러한 야누스적 존재가 만들어지는 것은 다분히 한국의 광기에 가까운 입시환경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닐까?

입시 코디네이터 김주영
입시 코디네이터 김주영ⓒJTBC

우리사회에는 아직도 과거시험 합격을 통해 가문의 영광을 빛냈던 유교적 전통을 이어가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상위 1%의 계층적 특권을 대물림해서 위세를 보여야 가족 모두가 성취감을 느끼는 강박적 욕망에 지배되는 한 자녀의 인격적 독립, 자아성찰과 같은 교육본연의 목표는 사치에 불과하다.

드라마에서 정의와 부정, 배려와 감시, 표현과 억압, 합법과 탈법 등의 갈등국면에서 결국 다른 퇴로를 찾지 못한 채 인물들은 자주 체념한다. 그리고 모든 것이 입시로 귀칙된다. 사교육을 동반한 무한경쟁의 궤도를 벗어나는 것이 죽음으로 여겨지는 사회적 허위의식은 이들로 하여금 모래 위에 성을 쌓는 것과 같이 일상을 늘 위태롭게 만든다. 한창 진행되는 이 드라마가 향후에 어떻게 전개될 지 자못 궁금해진다.

소유와 존재

일찍이 프로이트의 영향을 받은 에리히 프롬(Erich Fromm)은 인간의 삶의 양식을 ‘소유’와 ‘존재’로 알기 쉽게 구분했다. “무엇인가를 영속적으로 소유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 믿는 실체가 영원할 것이라는 착각에 기초한다. 내가 모든 것을 가지고 있다고 여기지만 실은 아무 것도 (지속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소유와 지배는 삶의 과정상 아주 짧은 순간에 그치기 때문이다. …소유양식에서는 나와 대상의 관계가 생동적이지 않고 생산적이지도 않다. 내가 대상을 가질 힘을 가진 것과 같은 방식으로 대상이 나를 소유하는 힘을 갖기 때문이다. 이는 소유의 주체와 내용 모두가 생명이 아닌 사물로 전락하는 것을 말한다. 이런 관계는 죽은 관계다. ”(To Have or To Be, Bantam Books; U.S.A., 1988, p.64~65).

작가 이수임 가족은 ‘소유’의 반대 개념으로서 자녀와 배우자에 대해 자기의 ‘존재’를 인정하고 독려함으로써 관계가 생산적이다. 그래서 가족내에서 늘 미소와 포용력, 자기표현을 위한 기다림이 관찰된다. 존재의 생산적 관계를 우선시하면서 명예를 부수적으로 얻는 전형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 곁에 이러한 가치를 공유하는 노승혜가 있다.

반면 다른 가족은 사교육이라는 외적 장치를 통해 명예를 인위적으로 얻으려고 애쓰고 있다. 자녀의 현재와 미래의 욕망과 희망마저 통제할 수 있는 애초부터 불가능한 전제를 따르고 있기 때문에 불안, 감시, 의심을 달고 산다. 아이들은 이내 부모의 사랑이 조작된 가식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시험과 입시에 가족의 온 명예를 거는 것은 자녀의 잠재가능성에 눈을 감는 것이다. 그러면 부모가 자녀가 누구인지 사실상 정체성을 모르는 상태이며, 자녀 자신도 잠재력의 발견이 제약당해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고 살아가는 형국이 된다. 시험점수에 맞추어 진로를 결정하다가 내 적성이 무엇인지를 뒤늦게야 깨닫고 대학의 학과를 변경하거나 중도에 그만두는 경우가 이 때다.

2010년 12월 9일자 독일 유력신문 슈피겔지(Spiegel) 끝부분에서 한국교육에 대해 이렇게 보도한다. “서울대에서 독어 독문학을 가르치는 독일인 교수의 한국인 아내는, 자신들의 자녀가 한국에서 초등학교 이상의 학교에 보내는 것에 대해 남편보다 더 강력하게 반대한다. 그녀는 한국에서 교육을 받았다. 한국의 학교는 모든 것이 시험에 맞춰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험이 생의 전부가 아니다. 시험은 많은 것을 놓친다”(관련기사 제목:Schülerdrill in Südkorea – Lernen heißt leiden) 시험성적은 소유로서의 삶을 가능케 하는 가장 손쉽고도 효과적인 기제다.

숨은 실체, 국가

어느 사회나 권력과 명예의 자리가 없을 수 없지만 이런 자리를 배분하는 방식이 사교육에 의지한 시험성적이라는데 문제가 있다. 객관식 시험, 많은 횟수의 시험은 학생들의 잠재역량의 발견을 차단한다. 단순 지식의 암기와 더불어, 외적인 힘으로서의 돈과 권력에 의해 ‘복종하는 인간형’으로 만들어진 결과는 언제나 타락의 위험을 안고 있으며 사회에 해악을 끼칠 가능성도 늘 안고 간다는 것이 문제다.

이승만, 박정희, 이명박, 박근혜, 김기춘, 양승태….이들은 정치를 사유화하며 그들의 성채를 쌓은 채 얼마나 많은 국민을 실의와 도탄에 빠지게 했던가? 스스로 독서하고 경험하며 시행착오를 겪는 가운데 내적 역량을 키운 사람들이 민주주의, 배려, 공존의 윤리를 실천할 수 있다는 점에서 드라마가 고발하고 있듯이 학교교육의 변화는 참 절실하다.

작가 이수임 부부가족을 제외하면 다른 가정에서 이와 같은 인물이 배출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이미 한서진의 딸 강예서가 그 가능성을 보이고 있지 않은가? 등장인물들이 종종 출구가 없어 벽에 부딪치는데 벽 너머에는 아무 것도 없는 것일까?

입시문제를 가족의 문제로 전가하는 그 무엇이 있다. 부모의 기대에 맞추는 것이 자녀의 도리라는 것, 선짓국을 끓이는 것은 체면 즉 명예의 죽음이라는 것, 며느리의 존재이유는 손주들을 명문대학에 보내는 것, 이웃과의 나눔보다 자녀의 명문대 합격을 위한 이기심이 미덕이라는 것, 자녀와의 대화보다는 감시하여 점수 1점이라도 더 올리는 것이 자녀를 위하고 가족과 선친을 위한 것이라는 편견들의 출처는 어디인가? 이들 가족을 강박증에 묶어 놓는 것은 바로 사회다.

현실지배의 이데올로기, 가족주의

아이가 “자신을 잃고 욕망을 포기당하면서 주체-화(예컨대, 명예욕에 사로잡힌 부모의 욕망에 편입되는 것)되는 아이가 종국적으로 편입되는 곳은 아버지라는 이름과 국가라는 이름이 지배하는 장소인 것이다. 아이의 욕망의 흐름, 리비도의 흐름이 폐쇄회로를 따라 움직이도록 되어 있다.. 이 회로를 벗어나는 것은 주체-화의 회로를 벗어나는 것이고 주체의 외부에 서려고 하는 것이다. 철학자 들뢰즈와 가타리는 주체-화에 저항하기, 주체 벗어나기, 탈주체화의 담론을 전략으로 제시하는 사상가들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아이-주체 벗어나기, 학생-주체 벗어나기, 노동자-주체 벗어나기….(위 드라마를 보아도) 어른, 아이, 학교, 가족 할 것없이 우리가 얼마나 집단적으로 지배적인 권력관계에 기가 막히게 순응하고 있는지 이해할 수 있다. … 욕망의 흐름을 한 방향으로 고정시키는 이런 기계들에 의해 주체화되는 것은 파시스트 주체가 되는 것이다” [이득재,(대구카톨릭대 교수), 가족주의는 야만이다. 1987, 162~164쪽]

입시문제가 가족의 최대의 관심사가 되고 자녀의 욕망을 부모의 욕망에 일치시키고 명예, 권력, 부를 향한 전쟁에서 이기면 그렇게 명예, 권력의 지배 이데올로기에 잘 복종하는 순응형 인간이 된다. 이는 지배 이데올로기가 가족에 반영된 아니 가족으로 떠넘겨지고 국가장치는 은폐되는 것을 의미한다. 국가주의라는 파시즘적 지배장치는 가족주의라는 이름으로 둔갑하여 가족의 현실적 행복이라는 또 다른 별칭을 얻어 지배를 연장해간다.

드라마에서 박영재가 있어서는 안될 폭력적 언행에 의지했으나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만들어진 주체에서 벗어나기를 시도했다. 또 작가 이수임의 가족이 ‘아이의 주체-벗어나기’ 즉 자녀에 대해 자기 삶의 진정한 주체화를 독려하면서도, 소설을 통해 왜곡된 실체로서의 ‘가족주의’를 고발하고 싶어 한다.

“가족주의야말로 사회와 민주주의의 형성을 가로막는 최대의 적이다. 미국이 한국에 대해 안방마님 구실을 하고 있고, 일제 식민주의 잔재가 도처에 깔려있는 것이 한국의 현실이다. 가족이 우리 안의 식민지라는 사실을 더 큰 문제점으로 인식할 때다“(이득재, 위 책, 9쪽).

국가의 무엇이 문제인가?

변호사와 의사의 수입이 예전같지 않지만 사회에는 이들도 있어야 한다. 문제는 이들 상당수가 부모가 시켜서 되었다는 것, 그리고 이들의 지식이 권위주의 국가의 지배도구로 이용된다는 것이다. 이런 지배장치는 가부장권 사회, 남녀차별의 사회에서 그 작동이 쉬워진다. 미투운동이 갖는 의미는 바로 이러한 지배장치에 균열이 생기는 긍정적인 신호가 된다는 점에 있다.

사교육에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내적 잠재력을 발휘하는 가운데 변호사와 의사가 되는 상태가 되어야 한다. 동시에 자의로 버스 운전수, 이발사, 미용사, 선짓국 끓이는 식당 사장이 되겠다고 하면 남들과 비교하지 말고 그 직업의 최고가 되도록 독려할 일이다. 그 독려의 책임을 부모 즉 가족에게 떠넘기지 말고 국가가 져야 한다.

니이체의 용어를 빌어 말한다면, 아이들로 하여금 순종에 능한 낙타 같은 인간형, 반항에 능한 사자같은 인간형을 너머 노마드적 모험심과 자연스러움이 몸에 밴 어린이형 인간은 한국사회에서 언제 가능할 것인가? 강력한 직업차별 극복의 제도와 복지정책으로 평등한 세상을 만드는 것이 그 대안이다. 이는 시험과 경쟁일변도의 교육환경을 근본적으로 수술하는 출구(出口)가 될 것이다.

국가 즉 정부의 역량이 잠자는 곳에서 가족들의 입시전쟁과 아귀다툼은 그치지 않을 것이며, 출발부터 소외된 다수의 학생들은 일찍부터 아웃사이더로 전락하며 탄식할 것이다. 이 어찌 더불어 살아가는 살맛 나는 세상이겠는가?

신남호 교육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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