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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당함을 거부했던 ‘독립운동가 출신’ 민주 경찰의 생애

2019년은 상해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임명한 첫 경찰청장인 민갑룡 청장은 2018년 7월 취임 이후 "잊혀진 경찰의 뿌리를 찾는다"는 취지 아래 '경찰청 임시정부 100주년 기념사업추진단'을 꾸리고, 독립운동가 출신 경찰들을 발굴해 대내외에 널리 알리고 있습니다.

이같은 역사 바로 세우기 사업을 통해, 경찰은 자신들의 뿌리를 임시정부 경무부장을 시작으로 주석의 자리에 올랐던 김구 선생에게서 찾으려 하고 있습니다.

민 청장은 올해 신년사에서 "백년 세월 동안 잊혔던 경찰의 뿌리를 찾아내어 임시정부 경찰의 전통을 새로이 일깨웠다"고 지난 해의 노력을 평가했으며, 올해는 "엄혹했던 그 시절, 선배들이 다져놓은 숭고한 얼을 계승하여 '시민으로서의 경찰'이라는 정체성을 굳건히 다져야 한다"고 밝혔습니다.

민중의소리는 경찰의 이같은 노력에 주목하며, 일제강점기와 독재 정권 시기 민중의 편에 선 경찰들의 이야기, 또 이들을 발굴하기 위해 묵묵히 일하고 있는 일선 경찰들의 이야기를 새해 첫 날 독자 여러분께 전해드립니다.

1925년 11월1일 발행된 상해 독립신문 경무국 방문기
1925년 11월1일 발행된 상해 독립신문 경무국 방문기ⓒ경찰청 임시정부 100년 TF 리플렛/독립기념관 소장

“일본 순사(巡査)가 온다”

일제강점기 시절, 이 말 한마디면 우는 아이도 울음을 뚝 그쳤다고 한다.

순사는, 이 시절 말단 계급의 경찰관을 부르는 말이었다. 지금으로 치면, ‘순경(巡警)’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 경찰은 일본의 앞잡이가 되어 ‘경찰도’를 찬 채 동네를 휘저으며 민중을 핍박했다. 때문에 경찰은 민중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광복 직후, 조선총독부의 뒤이어 미군정이 들어섰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일제 경찰 출신들은 주요보직에 기용돼 권력의 하수인 역할을 했고, 이 때문에 민중은 경찰에 대해 혐오를 가질 수 밖에 없었다. 실제로 미군정 때 중용된 경찰관 중, 경위 이상 간부급의 80%가 일제 경찰 출신이었다고 한다. 여기에 노덕술, 하판락 등의 일제경찰 출신 경찰관들이 악행이 널리 알려지면서 혐오는 더욱 심해졌다.

하지만 ‘경찰청 임시정부 100주년 기념사업추진단’(이하 TF)에 따르면, 광복 직후 전체 경찰관 2만5천여 명 중 일제 경찰 출신은 20%에 불과했다고 한다. 물론 나머지 80%중에도 서북청년단 등 과격한 극우단체 출신이 일부 섞여 있었지만, 독립운동가·광복군 출신도 적지 않았다. 6.25 전쟁 직후 경찰이 4만8천여 명으로 증원된 점을 고려하면, 친일 경찰은 경찰조직 안에서 다수가 아니었다는 것이 이들의 분석이다.

우리나라가 일제로부터 주권을 되찾은 지 70년이 넘었지만, ‘친일 경찰·일제 경찰’이란 말은 여전히 사용되고 있다. 경찰이 부정한 정권의 앞잡이 노릇을 한다고 판단되면, 분노한 민중들은 거침없이 이같은 비판을 쏟아낸다.

이명박·박근혜 정부 당시, 부당한 정부정책에 항의하며 거리로 나온 민중들을 향해 경찰은 선제적으로 ‘차벽’을 쌓고 ‘최루액을 섞은 물대포’를 쐈다. 故 백남기 농민은 머리를 향해 집중 발사된 물대포를 맞고 쓰러져 10개월 넘게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다 결국 숨졌다. 백 농민이 숨을 거둔 날, 경찰은 그를 부검하겠다며 서울대병원을 에워싸기까지 했다. 이 시기 경찰에 대한 혐오와 분노는 극에 달했다.

문재인 정부가 들어 선 뒤, 이같은 분노와 혐오는 조금은 수그러져 보인다. 경찰이 ‘인권경찰’로 거듭나겠다며 갖가지 제도 개혁을 단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저변에 깔려 있는 경찰에 대한 인식은 쉽게 바뀌지 않는 것 같다. 여전히 국민들은 ‘경찰이 권력의 성향에 맞춰 모습을 달리할 것’이라는 생각을 버리지 않고 있다. 그 의심의 뿌리엔 ‘일제경찰’의 기억이 남아 있다. 안타까운 것은 이러한 인식이 진심으로 국민의 안전과 생명을 위해 몸과 마음을 바쳐 일하는 경찰관들에게 상처가 된다는 사실이다.

독립운동을 하다가 만삭의 몸으로 옥고를 치렀던 안맥결 총경(왼쪽 사진, 중앙에 앉아 있는 여성), 예비검속자 사살명령을 거부하고 억울한 주민들의 생명을 살린 문형순 경감(오른쪽 아래 사진), 친일경찰 청산을 주창하다가 파면당한 최능진 수사국장(오른쪽 위 사진)
독립운동을 하다가 만삭의 몸으로 옥고를 치렀던 안맥결 총경(왼쪽 사진, 중앙에 앉아 있는 여성), 예비검속자 사살명령을 거부하고 억울한 주민들의 생명을 살린 문형순 경감(오른쪽 아래 사진), 친일경찰 청산을 주창하다가 파면당한 최능진 수사국장(오른쪽 위 사진)ⓒ경찰청 임시정부 100주년 TF 제공

“모르고 있었을 뿐, 훌륭한 선배들 많다”

모든 경찰관이 부정한 권력에 맹종하거나, 민중을 괴롭혔던 게 아니다. 격변의 시대 상황 속에서도 목숨을 걸고 민중의 편에 선 경찰관들이 있었다.

2018년의 마지막 금요일, 서울 서대문 경찰청 청사 건너편의 작은 사무실을 찾았다. 입구엔 백범일지 김구 선생의 글씨를 조합한 ‘임시정부 백주년 기념사업추진단’ 이란 문패가 걸려 있었다.

입구에서 만난 한준섭 경정의 안내를 받으며 안으로 들어가자, 10여 명이 조밀하게 모여 일을 하고 있는 사무실이 나왔다. 일부 간부들을 제외하곤, 모두 공모를 통해 자원한 실무자들이었다. 한 경정은 “국내 자료뿐만 아니라, 해외 자료도 수집하고 해석해 나가야 하기에 일본어, 중국어, 영어 전공자와 사학 전공자들로 구성했다”고 소개했다.

TF를 이끌고 있는 이영철 총경은 “기존의 경찰 역사 속에서 ‘나는 저러지 말아야 한다’는 비판적인 경찰관 사례는 많았지만, ‘나도 저런 경찰관이 되어야겠다’는 사례는 많지 않았다. 그런데 사실은 본받을 수 있는 선배들이 이렇게 많았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다”라고 TF 설립 취지를 설명했다.

TF는 국가보훈처를 통해 받은 광복군 계열의 독립유공자 500여명의 기록과 경찰 인사기록을 모두 대조하고, 유족과의 확인 및 공신력 있는 기관과의 크로스체크 등 작업을 통해 지금까지(2018년 12월 28일 기준) 공식적으로 ‘광복군·독립운동가 출신 경찰관’ 27명을 발굴했다. 온몸을 던져 독립운동을 펼치다 만삭의 몸으로 옥고를 치렀던 안맥결, 제주 4·3 당시 계엄군의 예비검속자 총살명령을 거부한 문형순, 친일경찰 청산을 주창하다가 파면당한 최능진 등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백범 김구 선생 또한 그렇다. 그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경찰의 토대를 닦은 초대 경무국장이기도 하다. 이는 <백범일지>에도 쓰여 있어 비교적 많이 알려진 편이다. 하지만, 독립운동·광복군으로 활동하다가 광복 후 경찰에 투신해 민주경찰의 삶을 살았던 안맥결, 문형순, 최능진 등에 대해선 잘 알려지지 않았다.

안맥결 서장이 흥사단에 입단할 때 작성된 이력서로 '결백단' 내용이 기재돼 있다.
안맥결 서장이 흥사단에 입단할 때 작성된 이력서로 '결백단' 내용이 기재돼 있다.ⓒ독립기념관 자료/경찰청 임시정부 100주년 TF 제공

주목받지 못했던 소신 경찰관의 삶
독립운동하다 만삭의 몸으로 옥고 치른 안맥결
제주4·3 예비검속자 총살명령 거부한 문형순
“친일경찰 청산” 외치다 파면당한 최능진

제3대 서울 여자경찰서장을 지낸 안맥결 총경은 올해에서야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았다.

도산 안창호 선생의 조카딸인 안 총경은 임시정부의 독립운동자금 모금 비밀단체인 ‘결백회’ 회원이자, 흥사단원으로서 독립운동을 하다 1937년 일제에 체포돼 만삭의 몸으로 옥고를 치른 바 있다.

안 총경은 1946년 5월에 여경 간부 1기로 경찰에 투신했다. 안 총경은 경찰관이 되어서도 의기 있는 삶을 살았다. 대한민국재향여자경우회·한국여자경찰60년사 등에는 그가 1957년 경무대 비서실에 근무할 때 부정선거를 꾸미는 것을 보고 “부당하다”고 지적했다 경찰학교로 전보 당했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또 1961년 5·16 직후엔 군사정권 합류 권유를 거부하고 사표를 제출했다고 한다.

유족 측은 그를 수차례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심사에 올렸으나, 번번이 떨어졌다. ‘3개월 이상의 옥고가 확인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황당한 이유에서였다. 이에 흥사단 등 시민사회에서 이 사실을 언론에 알렸고, 이번에 경찰청에서도 안 총경의 독립운동 이력을 보훈처에 전달하고 심사를 요청하면서, 올해 11월17일 뒤늦게 건국포장이 추서됐다.

경찰인사기록에 적시된 문형순 경감이 신흥무관학교 졸업 후 국민부 호위대장 등 독립군으로 활동한 이력.
경찰인사기록에 적시된 문형순 경감이 신흥무관학교 졸업 후 국민부 호위대장 등 독립군으로 활동한 이력.ⓒ경남경찰청 소장/경찰청 임시정부 100주년 TF 제공

1919년 3·1운동 이후 수많은 청년들이 광복군이 되기 위해 찾아갔던 만주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하고, 남만주 일대 자치정부인 국민부(國民府)에 들어가 중앙호위대장직을 맡았던 문형순 경감은 말년에 쌀 배급소 직원, 대한극장 매표원 등으로 일을 하다가 후손도 없이 쓸쓸하게 생을 마감했다. 故 전정택 제주지구 평안도민회장과 이대수 전 제주보훈청장 등이 수차례 문 경감에 대한 독립유공자 포상을 신청한 바 있지만, 계속해서 떨어졌다. “문시영(독립운동 때 사용한 가명)이란 사람이 문형순인지 확인이 안 된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TF 팀은 경찰인사기록과 신흥무관학교 기념사업회 자료 등을 비교해 그의 독립군 활동 이력을 찾아내고, 재심사를 요청해 결과를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다.

문 경감은 4·3의 잔인한 학살과 토벌이 벌어지던 시기, 제주도에서 경찰관으로 근무했다. 성산포경찰서장이었던 그는 계엄군의 예비검속자 총살명령을 “부당하다”며 거부했다. 그의 용기 있는 결단 덕분에, 성산면 지역의 예비검속자들만 무사할 수 있었다고 한다. 반면, 그 외 지역에선 예비검속자들이 경찰에게 외진 곳으로 끌려 가 무차별적으로 학살을 당했다.

이에 올해 11월 제주지방경찰청에서 열린 故 문형순 서장 추모흉상 제막식에는 제주4·3 당시 문 서장 덕분에 목숨을 구한 이들이 고령의 몸을 이끌고 참석해 감사를 표하며 그를 추모했다.

최능진 선생이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복역 시 일제경찰이 작성한 감시카드다.
최능진 선생이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복역 시 일제경찰이 작성한 감시카드다.ⓒ국사편찬위원회 자료/경찰청 임시정부 100주년 TF 제공

최능진 선생은 수양동우회와 신간회 등을 통해 독립운동을 벌이다가 수년간 옥고를 치렀다. 광복 후 경찰이 된 그는 경무부 수사국장 자리까지 올랐지만, “친일경찰 청산”을 주창하며 조병옥 경무부장과 대립하다 그해 12월 파면됐다. 이후 5·10 총선거에서 이승만 전 대통령의 단독 선거구에 출마해 박빙의 승부를 겨루기도 했는데, 석연치 않은 이유로 후보자 등록이 무효처리 된 후 이적 혐의로 옥에 갇혔다. 이후 6.25전쟁 중 북한군이 옥문을 개방해 풀려났다가, 이승만 정부가 서울을 수복한 뒤 총살을 당했다.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했을 때, 그는 ‘즉각 정전, 평화협상을 통한 통일’을 주장하며 평화운동을 펼쳤다. 그가 개최하려던 평화를 호소하는 대회는 북의 반대로 무산되기도 했다. 그럼에도 이승만 정부는 최능진 선생이 “적에게 이로운 행동을 했다”며 사형을 선고하고, 곧바로 형을 집행했다.

그의 명예는 사망한 지 66년이 지난 뒤에야 회복됐다. 진실화해위원회 진상조사를 통해 그에게 적용됐던 혐의가 거짓이었음이 밝혀지고, 2016년 대법원 재심에서 무죄 결정이 내려진 것이다. 최능진 선생 또한 독립유공 서훈이 없어 TF 팀이 독립유공자 심사를 신청한 상태다.

이 외에도 TF 팀은 백준기, 김영춘 등과 같은 광복군들이 광복 후 경찰에 복무했다는 사실을 발굴해 냈다. ‘불굴의 민족혼 사진으로 본 광복군 제2지대 회원 명부’ 등을 뒤지다가 경찰 옷을 입고 있는 광복군 회원을 발견하는 등의 방식이었다.

TF 관계자에 따르면, 유족들이 광복군 출신 아버지가 경찰이었다는 사실을 새롭게 알게 된 경우도 있었다. 김기영 조사관은 “홍구표 경위는 1946년부터 1949년까지 경찰로 있다가 군으로 옮겨갔다. 그런데 유족들은 그동안 홍 경위가 군에만 있었다고만 알고 있었다”고 전했다.

2018년 12월3일 경찰청이 추가로 확인해 발표한 '광복군 출신 경찰관' 12명 관련자료.
2018년 12월3일 경찰청이 추가로 확인해 발표한 '광복군 출신 경찰관' 12명 관련자료.ⓒ경찰청

전무하다시피 했던 근현대 경찰역사
“그동안 아무도 따로 관리하지 못했다니…”

“그나마 우리가 이제까지 발굴한 분들은 국가보훈처에서 독립유공자로 지정돼, 그나마 자료가 남아있는 분들입니다. 이분들 중에도 세월이 많이 지나 그 후손들조차 연락이 닿질 않는 경우도 많습니다. 경찰도 이전까지 이런 선배들을 찾아본 역사가 없습니다. 많이 늦었다는 생각이 들죠.” (경찰청 임시정부 100주년 기념사업추진단, 한준섭 경정)

“임시정부 경찰이 우리나라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포지션을 차지하고 있는데, 사실 관련 연구가 거의 없다시피 했습니다. 저희(경찰공무원)는 정치적 논란에 휩싸이는 일을 하면 안 되기에, 그런 부분들에 대해 부족했던 게 사실입니다. 그렇다보니, ‘임시정부 경찰’에 대한 부분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경찰청 임시정부 100주년 기념사업추진단, 이영철 총경)

오늘 날 전국 경찰관 수는 12만에 이른다고 한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근현대 경찰 역사가 제대로 정리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하다. 물론 이제까지 근현대 경찰에 대한 조사가 전무했던 것은 아니다. 1972년 편찬된 ‘한국경찰사’에는 임시정부 경찰을 경찰역사의 한 부분으로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다.

1972년 편찬된 한국경찰사에는 임시정부 경찰을 경찰역사의 한 부분으로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다.
1972년 편찬된 한국경찰사에는 임시정부 경찰을 경찰역사의 한 부분으로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다.ⓒ민중의소리

이영철 총경은 “이 때 이미 한국경찰사에서 임시정부 경찰을 정식으로 주류로 평가했다”고 강조했다. 이어 “조사를 하면서 저희도 깜짝 놀랐다”며 “이렇게 많이 있는데, 못 찾는 분들도 많을 텐데, 그동안 아무도 따로 관리를 하지 않아서 그 분들에 대한 인식이 없었다니…”라고 아쉬움을 토로했다.

한편, TF 팀은 광복군·독립운동가 출신 경찰관 말고도, 5·18광주민주화운동 때 광주시민들에 대한 계엄군의 강경진압 명령을 어기고 끝까지 광주시민들을 지키다가 고문을 당하고 후유증으로 몇 년 더 살지 못하고 순직한 전남경찰관들, 전쟁에 참여했다가 순직한 경찰관들에 대한 발굴 작업에도 박차를 가하고 있다.

관련해 이영철 총경은 다음과 같이 당부했다.

“역사를 통해 다른 것을 하려는 게 아닙니다. 경찰관들이 배워야 할 경찰정신이 무엇인지, 그런 부분을 구체적이고 상징적으로 말해줄 수 있길 바라고 하는 일입니다. 이분들의 삶을 보여준다면, 경찰관들이 따라서 실천할 수 있는 정신이 쌓일 거라고 봅니다. 그런 취지에서 시작하는 것이니, 따뜻하게 바라봐주시길 바랍니다.”

이승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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