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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책]자본주의는 자본가들이 승리할 수밖에 없는 ‘야바위 게임’이다
책 ‘야바위 게임:불평등은 일상 속에서 어떻게 재생산되는가’
책 ‘야바위 게임:불평등은 일상 속에서 어떻게 재생산되는가’ⓒ문예출판사

우리는 불평등한 시대에 살고 있다. 소득과 자산의 불평등이 극대화 되면서 사회는 양극화되고 있다. 그 정도는 더욱 심화되고 있어 ‘10 대 90’ 혹은 ‘1 대 99’를 넘어 이제는 ‘0.1 대 99.9’, ‘0.01 대 99.99’라는 목소리까지 나오고 있다. 흙수저와 금수저로 상징되는 수저계급론에서 보듯 아무리 ‘노오력’해도 계층 이동은 불가능하다.

이런 현실은 지난 9일 보건사회연구원의 보건사회연구 최신호에 실린 이용관 한국문화관광연구원 부연구위원 ‘청년층의 주관적 계층의식과 계층이동 가능성 영향요인 변화 분석’에 잘 나와 있다. 2013년 도사에선 가구소득과 거주형태가 ‘나는 계층이동을 할 수 있다’는 인식에 별다른 영향을 주지 않았고, 아버지의 직업과 어머니의 학력이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조사됐지만 2017년에는 부모의 학력·직업 영향력이 사라진 대신 가구소득이 많고, 자가 주택에 거주하는 경우 계층이동 가능성에 대한 인식이 상승한 것으로 나타났다. 계층이 한 단계 상승할 가능성에 대한 청년의 인식은 가구소득 100만원 미만인 가구보다 500만∼700만원 가구가 3.15배 높았고, 임대주택 거주자보다 자가주택 거주자가 1.27배 높았다. 청년들은 경제활동을 하는 경우가 안 하는 경우보다 계층 상승 가능성이 오히려 20% 낮아진다고 판단했다. 취업을 해도 비정규직밖에 할 수 없고, 저임금 노동에 시달리게 되면서 아무리 일해도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청년들은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자본주의는 야바위 게임이며
통상적으로 자본가들이 꾸준히
그들의 입맛에 맞도록
조작할 수 있는 방향으로 움직인다”

사회가 정한대로 공부하고, 그리고 부유한 이들보다 일도 많이 하는데 왜 갈수록 가난해지는 걸까?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주립대학 사회학과 교수인 마이클 슈월비는 법, 정책, 관행, 일상을 규정짓는 ‘게임의 법칙’이 차별이 만들어내고 재생산하는 과정이라고 ‘야바위 게임- 불평등은 일상 속에서 어떻게 재생산되는가’를 통해 밝히고 있다. 요즘은 드물어졌지만 1980년대까지만 해도 시장이나 역 등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엔 야바위꾼들이 있었다. 바둑이나, 장기, 컵 속의 동전 찾기 등 다양한 게임판을 벌리며 사람들을 유혹했다. 잘하면 이길 수 있을 것만 같은 생각에 돈을 한푼 두푼 걸다가 야바위꾼에게 다 털려버리는 일이 다반사다. 가끔 돈을 따기도 하지만, 딴 돈을 다시 걸다 보면 딴 돈은 물론 자신이 가지고 있던 나머지 돈까지 잃어 금방 빈털터리가 된다. 조금만 잘하면 이길 듯 보이지만 야바위 게임에서 야바위꾼의 승률은 100%다. 야바위꾼이 미끼를 던지려고 일부러 져주지 않는 이상 절대로 이길 수 없다. 자본주의는 야바위 게임이며 통상적으로 자본가들이 꾸준히 그들의 입맛에 맞도록 조작할 수 있는 방향으로 움직인다. 슈월비는 “자본주의는 야바위 게임이며 통상적으로 자본가들이 꾸준히 그들의 입맛에 맞도록 조작할 수 있는 방향으로 움직인다”고 강조한다.

자원의 불평등은 자연현상같이 당연한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결과물이다. 슈월비는 평등한 사회를 먼저 상정하고, 어떻게 그 사회가 불평등해질 수 있는가를 묻는다. 답은 세 가지이다. 같은 집단 내의 자원을 ‘절도’하거나, 집단 밖의 외부자를 ‘약탈’하거나, 보호비를 뜯어내거나 노동의 결과물을 부당하게 가져가는 식의 ‘착취’를 하는 것이다. 인류는 약 15만 년 전에 출현한 이후 대부분의 기간동안 평등하게 살아왔다. 이것이 뒤바뀐 건 1만 2,000년 전 정착된 농경 생활의 출현 이후이다. 잉여생산물이 생겨나자, 소수가 불평등하게 자원을 분배하고 더 차지하게 되었으며, 결국 계층화된 사회가 탄생했다.

참여연대와 경제정의실천연합 등 12개 시민사회단체들 회원들이 2018년 10월 10일 오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부동산 불평등 해소를 위한 보유세강화시민행동 출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참여연대와 경제정의실천연합 등 12개 시민사회단체들 회원들이 2018년 10월 10일 오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부동산 불평등 해소를 위한 보유세강화시민행동 출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김철수 기자

현대로 올수록 불평등의 기원으로서의 절도·약탈·착취에 대해 파악하기 힘들어진다. 하지만 자본주의의 역사를 들여다보면 절도·약탈·착취가 계속해서 이루어져왔음이 드러난다. 슈월비는 북아메리카 원주민에 대한 약탈과 착취와 학살, 아프리카인을 노예화한 일 등을 대표적인 사례로 든다. 한국의 경우에도 일제 아래에서의 피식민지 역사와 이후 가혹한 노동조건에 의한 경제발전은 절도·약탈·착취가 근현대까지 이어졌음을 보여준다.

‘노동법’을 그대로 따르면
노동자들의 단결이 어려워진다.
‘표현의 자유’를 옹호하는 판결이
자연스레 돈 있는 자가 선거 과정에
개입할 길을 열어준다.
‘법인’의 이름 뒤에 숨어
자본가들은 책임을 회피한다.
‘세법’에 착실하게 따르는 것만으로
양극화가 심화된다.

그리고 그렇게 형성된 불평등은 불공정한 ‘게임의 규칙’을 통해 더욱 확대 재생산된다. 자본주의라는 게임이 참여한 관리자는 노동자들이 생산하는 가치를 극대화하면서 임금은 최소화하는 방법을 찾아내야 한다. 슈월비는 ‘소유권이 인권에 우선한다’는 것이 자본주의의 기본 원칙이라고 말한다. 자산을 가진 사람은 다른 사람이 굶어죽든 말든, 자신의 농장과 공장을 늘릴 수 있는 것이다. 이는 법을 통해 뒷받침된다. 이를 위해 지배계층은 국가를 차지하고자 애쓴다. 물론 경제적 착취자가 곧 국가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들이 속한 경제적 계급이 국가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국가를 차지한다는 것은 곧 경제활동에 적용되고 부의 분배를 결정짓는 규칙들을 만들고 해석하고 집행할 수 있게 된다는 의미이다. 사회복지의 수준을 정하고, 이민 정책을 만들고, 최저임금을 설정하고, 무역협정을 맺고, 기반시설을 건설하는 것 모두를 결정할 권한을 갖는 것이다. 게다가 경찰과 군대를 통제하여, 불평등한 게임의 규칙을 바꾸려 드는 이들을 통제하는 용도로 활용할 수도 있다.

슈월비는 ‘게임의 규칙’의 조작을 통해 불평등을 재생산하는 구체적인 사례 역시 제시한다. ‘노동법’을 그대로 따르면 노동자들의 단결이 어려워진다. ‘표현의 자유’를 옹호하는 판결이 자연스레 돈 있는 자가 선거 과정에 개입할 길을 열어준다. ‘법인’의 이름 뒤에 숨어 자본가들은 책임을 회피한다. ‘세법’에 착실하게 따르는 것만으로 양극화가 심화된다.

그럼에도 우리에게는 이러한 규칙이 정당할뿐더러, 자연스럽고 불가피하게 보인다. 슈월비는 이러한 인식이 ‘불평등을 정당화하기 위한 신념 체제’로서의 ‘이데올로기’를 통해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이러한 이데올로기의 눈으로 현실을 보면, 불평등을 어쩔 수 없는 현실로 받아들이게 되고, 결국 그 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한 상상력마저 제약하고 만다. 인간이 본래 이기적이고 공격적인 성향을 띤다는 현실의 정의를 받아들이면, 경쟁과 불평등은 당연하며 협동과 평등을 지향하는 사회는 불가능하다는 논리적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또 기존의 체제와 규칙이 완전하진 않더라도, 다른 ‘대안은 없다’고 생각하게 만들기도 한다. 정보를 통제해서 ‘대안적인 선거제도나 의료체제에 대한 정보를 접하기 힘들게 해서 현재 존재하는 시스템만이 유일하다는 인식을 심고, 노동운동사 같은 투쟁의 역사를 지워버림으로써 변화의 길을 여는 조직과 집단행동의 힘을 볼 수 없도록 한다. 기업 내 민주주의는 혼란을 불러올 뿐이며, 하향식 통제가 비록 권위적이지만 효율성을 담보한다고 믿게 한다. 임금이 공정하지 않더라도 시장논리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받아들이게 한다. 이 모든 현실 정의는 현재의 불평등한 체제를 어쩔 수 없다고 받아들이게 만들고, 대안을 추구하는 건 어리석은 일이라고 생각하게 만든다.

단지 행동하지 않게 만드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 사람들이 조작된 게임의 규칙에 따라 행동하게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조작된 게임이라도 참여자들에게 물질적 재화와 정서적 보상을 제공한다.

연대의 문화를 통해 우리는
단순히 사람들의 분노를 일깨우는 것을 넘어서,
현 상태를 깨뜨리고 보다 나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는 실질적 방안을
향해 나아갈 수 있다.

이렇게 일상 속에 녹아들어 자연현상처럼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게임의 규칙과 불평등의 재생산을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 우선은 주어진 현실에 대한 ‘대안은 없다’는 생각을 벗어나고, 민주주의적 이상과 자본주의적 현실 사이의 모순에 향해 의문을 제기할 수 있게 해주는 상상력의 해방이 필요하다. 이는 경제 영역까지 포함한 보다 넓은 영역에서의 민주주의를 모색하고 극심한 불평등을 넘어설 수 있는 제도적 상상력까지 넓어질 것이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어느 날 개인의 노력으로 상상력이 해방되고, 놀라운 제도를 고안해내어 사회를 뒤바꾼다는 공상은 공허할 뿐이다. 슈월비는 결국은 연대와 조직이 핵심이라고 말한다. 슈월비는 연대의 문화를 구성원들이 사회적 정의를 추구하는 투쟁에서 서로를 지지하면서 창조해낸 새로운 생각, 가치, 관습으로 정의한다. 예컨대 연대의 문화 안에서, 노동자들은 투쟁 과정에서 물질적·정서적 보상이 위협받을 때 상호부조를 통해 서로를 보조해준다. 이는 물질적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개평’과 ‘정체성의 근본’의 차원에서도 작용한다. 또한 투쟁 과정에서 사회의 게임이 어떻게 조작되어 있는지, 그로 인해 누가 이득을 보는지, 그것을 바꾸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지 분석하게 된다. 이는 집단적인 상상력의 해방이며, 새로운 저항과 규칙을 발명하고 협동조합 같이 착취적이지 않은 기업을 만드는 것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슈월비는 노동자들의 연대를 주요 사례로 다루지만, 연대의 문화는 인종차별에 맞서든 여성차별에 도전하든 조직적 투쟁의 과정이라면 어디서든지 발생할 수 있다. 이러한 연대의 문화를 통해 우리는 단순히 사람들의 분노를 일깨우는 것을 넘어서, 현 상태를 깨뜨리고 보다 나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는 실질적 방안을 향해 나아갈 수 있다.

“불평등은 재생산되는 과정이 공공의 감시로부터 벗어나 있기 때문만이 아니라, 어쩌면 우리 스스로가 불평등의 재생산으로부터 눈을 돌리고 싶기 때문에도 재생산되고 있는 것일 수 있다. 이 사실을 받아들이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특히 불평등을 재생산하는 과정을 살펴보다 보면,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와 우리 스스로에 대해 품고 있던 마음 편한 믿음이 위협당할 수 있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역설적이게도 우리가 이러한 사실들을 정직하게 바라보기를 거부한다면, 우리는 그 회피의 대가로 불평등의 지속을 돕는 셈이 되어버린다. 이것은 마치 어두운 동굴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면서도, 불을 켜면 보고 싶지 않은 무서운 것들이 보일까봐 겁이 나서 촛불을 켜지 않으려는 것과 같다.”

권종술 기자

문화와 종교 분야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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