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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애화 칼럼] 개방적 반려문화를 만들기 위한 제안
동물보호소에 있는 개가 철창 밖을 응시하고 있다.
동물보호소에 있는 개가 철창 밖을 응시하고 있다.ⓒpixabay.com

버려지는 생명들

케어 단체 사태로 반려동물에 대한 안락사 논쟁이 한 쪽에서는 치열하게 진행되고, 다른 한쪽에서는 유기견이 들개가 되어 가축을 위협한다는 뉴스로 시끄럽다. 한 지자체는 들개를 포획하면 포상금을 주기로 했다. 결국 공기총 난사로 떠돌이 개가 즉사하는 일이 일어났다. 사살된 개가 가축과 인간의 생명을 위협했다는 증거는 없다.

떠돌이 개는 위험한가? 주인이 없다고 위험한 존재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이 음식 쓰레기라도 허기를 달랠 수 있었다면 그들은 떼를 몰려다니며 가축을 해치지 않았을지 모른다. 위험하고 에너지가 많이 드는 가축 습격을 굳이 해야 할 필요성이 없을 것이다. 그들의 고달픈 삶이 만든 일이다.

70-80년대만 해도 시골 개들 대부분은 줄로 묶이지 않고 자유로웠다. 떠돌이 개일지라도 사람과 대치하는 것은 드물었다. 서울도 개들이 많이 떠돌았으나 그들을 사살하거나 포획하지 않았다. 그들 중 일부는 주인이 있는 개들이었다. 우리 집 개가 그랬다. 밖에서 나가 놀다가 때가 되면 집으로 돌아와 먹고 잤다. 그렇게 섞이다보니 대부분이 잡종이었다. 이들은 누구네 집의 개이면서, 집의 울타리를 넘어서 개방적인 삶을 살았다.

점점 떠돌이 개는 불편한 존재가 되고 있다. 그들이 인간과 가축에 직접적으로 위협적이지 않아도 비위생적이고, 교통에 방해를 주어 꺼림칙한 존재가 되었다. 이들은 포획되어도 안락사를 당할 가능성이 높다. 동물보호소는 유기견, 유기묘가 보호소에 입소하면 일정기간 공고를 통해 입양을 촉구하다가 그 공고기간이 지나면 안락사를 실행하고 있다. 동물권 단체들간의 안락사 논쟁과 무관하게 안락사, 사살은 지금도 진행 중이다. 떠돌이 동물이 입양되어도 예전처럼 자유롭지 않다. 반려동물 인구가 늘어나면서 공중예의라는 차원에서 지켜야 할 룰이 늘어나고 있다. 현실적 조건에서는 마땅히 그래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씁쓸하다. 우리에게 유기동물을 구제하는 것은 입양밖에 없을까. 입양하지 않고 그들과 함께 살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먼저 유기동물이 증가하는 원인에 대한 대책이 필요하다. 그 원인 중의 하나인 동물을 사고파는 사업을 우선 중지해야 한다. 순종, 귀여운 외모만을 고집하는 반려인의 인식도 변화되어야 한다. 반려동물은 생김새와 관계없이 주인에 대하여 친화적이며 순종적인 성품을 갖고 있다. 반려동물은 그것으로 자격이 충분하지 않은가.

이번 글의 목표는 입양을 중심으로 한 유기동물에 대한 대책을 주장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고, 조금 더 폭넓고 개방적인 반려문화를 만들자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서이다. 구체적인 사업으로는 동물보호구역을 제안하고자 하는 것이다. 전문가는 아니지만 애견인의 한 사람으로, 동물과 인간의 개방적인 반려문화 형성을 희망하는 마음으로 이 글을 쓴다.

네팔 룸비니에서 성지순례자를 바라보는 개.
네팔 룸비니에서 성지순례자를 바라보는 개.ⓒ김애화 칼럼니스트


소유주가 있는 듯, 없는 듯한 반려동물

(이글에서 나는 야생동물이 아니고, 상업적 이익을 위해 사육되는 가축이 아닌 동물, 오랫동안 사람의 친구였던 동물을 반려동물이라 부르겠다. 그들이 견주가 있든 없든 반려동물이라 부르겠다.)

최근에 나는 네팔을 여행하면서 반려동물의 환경에 대하여 고민해볼 기회가 있었다. 네팔의 도시 거리에는 수많은 개들이 있었다. 묶인 개들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사람을 피하지 않았고, 사람을 보고 짓거나 위협도 하지 않았다. 바쁘지도 않았다. 느리게 돌아다니고 길가에 편하게 쉬고 있었다. 개뿐만 아니라 염소와 소, 닭도 그냥 풀어져 있었다. 시골이 아니라 네팔의 수도인 카트만두와 포카라에서 목격했다. 그들은 제 방식대로 자유롭게 자기 영역에서 살고 있었다. 염소, 소나 노새는 주인이 있어서 저녁이 되면 주인이 와서 데리고 간다고 한다. 주인이 있는 개도 많은데 모두 묶여 있지 않으니 주인 없는 개와 섞여 있었다.

네팔의 동물 환경을 보면서, 동물은 사람과의 상호작용에 의해 성향과 태도가 달라진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육식을 거의 하지 않는 문화를 가진 네팔인에게 동물은 소유욕을 자극하지 않는다. 그저 자연의 식물과 비슷한 존재인 듯 무심하다. 그러니 반려동물은 사람에 대한 경계심이 없고, 그들이 사람에게 매달리지도 않는다. 사람은 그들에게 적당히 음식을 제공하는 포용력 있는 동물일 뿐인 것 같았다. 그들에게 적당한 사료가 제공되지 않는다면, 음식 쓰레기가 있는 곳이 그들의 서식지가 된다. 네팔은 가난한 나라이다. 네팔인들은 반려견, 반려묘라는 관계의 의미성을 공감하지 못할 수 있다. 그렇지만 그들은 동물을 안아주지 않지만, 버리지도 않는다.

이런 환경이 가난한 나라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일본에는 고양이들이 모여 사는 섬들이 있다. 대만에도 고양이마을이 있다. 그들의 집은 자연이다. 먹이는 사람에게서 온다. 하지만 어느 집의 소유가 아니다. 이들에 대한 중성화 수술을 진행하고 관리되지만, 어느 한 마리도 적대시되지 않으며, 함부로 안락사당하지 않는다.

한국의 현실조건과 동떨어진 사고일지 모르지만, 네팔과 일본처럼 개들이 함께 살 수 있는 동물보호구역이 있었으면 좋겠다. 넓은 울타리에서 그들이 살 수 있는 환경을 만들면 어떨까. 동물공장보다 조금 넓어진 케이지 안에 동물을 가두는 동물보호소보다는 건강하게 뛰어놀 수 있는 터전이 있으면 어떨까. 그 안에서 입양이 아니더라도 안락사당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이었으면 좋겠다.

분명 이런 사업을 위해서는 적잖은 비용이 들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사고 방향을 바꾸는 것이 우선이다. 최근에 한 지자체에서 반려동물 전용 공동묘지 구상을 발표했다. 이 묘지는 안락사당한 유기동물들의 자리가 아닐 것이다. 이 정책의 수혜자는 입양된 반려동물과 반려인일 것이다. 반려인의 상실감을 최소화하기 위한 배려인 것이다. 지자체 차원의 공동묘지 구상에 동의하기 힘들다. 지금 시급한 것은 버려졌으나 살아있는 생명에 대한 대책이다. 포획 포상금, 안락사, 공동묘지 관리 등에 드는 비용이 반려동물을 살리는 데 사용되길 희망해 본다.

네팔 포카라에서 여행객 옆에 앉은 채 차도의 차가 지나가길 기다리는 개.
네팔 포카라에서 여행객 옆에 앉은 채 차도의 차가 지나가길 기다리는 개.ⓒ김애화 칼럼니스트

동물보호구역과 반려문화

동물보호구역의 조성은 단순히 동물들의 이익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반려인의 태도 나아가 인간 삶의 태도를 변화시킬 것이다. 시멘트 빌딩과 차량이 뒤범벅이 되는 전국의 도시화는 반려동물과의 관계가 개인 집으로 묶어지는 생활에서 벗어나기 힘들게 한다. 동물보호구역은 반려문화를 개방적으로 만들고, 울타리 너머 즉 보호구역 내의 동물뿐만 아니라 거리의 반려동물을 따듯하게 마주하게 하는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자연친화적 생활을 위해 강과 물, 식물, 농작물을 관리하듯, 나의 울타리 밖의 반려동물에게도 밥과 건강을 무심한 듯 챙겨주는 문화가 일상화되는 것을 상상해본다. 그런 문화가 바로 자연친화적 환경이다. 반려동물 일천만 시대에 사는 이제, 우리 집안으로 그들을 들이는 환경을 벗어난 새로운 반려문화를 꿈꾸어보자.

김애화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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