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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폭력을 재정의한다: ‘저항’ 아닌 ‘동의’ 기준으로

“적극적으로 저항하지 않은 피해자는 사실상 성관계에 동의한 것이다.”

한국 사회는 아직도 강간 사건의 책임을 ‘저항하지 않은 피해자’에게 묻고 있다. 안희정 전 충남지사의 1심 재판부도 마찬가지였다. 지난해 8월 서울서부지법 형사11부(부장판사 조병구)는 안 전 지사의 지위와 권세, 즉 위력은 인정했으나 사건 당시 이를 행사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무죄를 선고했다.

피해 당시 폭행·협박이 없어 강제력을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형법상 위력은 유무형의 힘을 모두 포함하지만, 권력 등 보이지 않는 힘은 인정되지 않았다. 이 판결에는 피해 당시 강력한 폭행·협박이 없었다면, ‘정상적인 판단능력을 갖춘 성인’은 적극적으로 저항했을 것이라는 인식이 깔려있다.

안희정 전 충남지사가 1일 서울 서초구 서울고등법원에서 열린 비서성폭행 관련 강제추행 등 항소심 선고공판에서 법정구속이 되어 호송차로 이동하고 있다.
안희정 전 충남지사가 1일 서울 서초구 서울고등법원에서 열린 비서성폭행 관련 강제추행 등 항소심 선고공판에서 법정구속이 되어 호송차로 이동하고 있다.ⓒ김슬찬 기자

재판부는 피해자에게 ‘왜 저항하지 않았느냐’며 성폭행 책임을 전가했다. 피해 이후 업무를 지속한 피해자의 행동 등을 문제 삼아 ‘피해자답지 않다’고 말하기도 했다. 재판부는 안 전 지사에게 ‘동의를 구했느냐’고 묻지 않았다. ‘합의에 의한 성관계’였다는 주장은 그대로 받아들여졌다.

잘못된 성폭력 통념을 모두 보여준 안 전 지사의 1심을 계기로 폭행·협박이 없더라도 상대방의 동의 없는 성적 침해를 범죄로 처벌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비동의 간음죄’ 신설과 강간죄 등을 규정한 형법 제32장을 전면 개정해 여성의 ‘저항’이 아니라 ‘동의’를 기준으로 성폭력을 재정의하자는 것이다.

‘비동의’ 기준일 때 ‘성적 자기 결정권’ 지킬 수 있어

이미 국제사회는 성범죄에 대해 ‘자유롭게 결정할 수 있는 동의의 결여를 기초로 하고, 강요적 환경을 고려해야 한다’고 정의한 유엔 여성차별철폐협약의 권고를 준수하고 있다. 특히 유엔은 한국 정부에 ‘강간죄를 개정해 피해자의 자유로운 동의 부족을 중심으로 강간을 정의하고, 특히 배우자 강간을 범죄화할 것’을 권고하기도 했다.

성폭력을 재정의해야만 강간죄의 보호법익인 ‘성적 자기 결정권’을 제대로 지킬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성적 자기 결정권을 침해한다는 것 자체가 성관계에 대한 동의 의사를 포함한 성적인 영역에서 자기 결정권, 즉 피해자의 의사에 반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최근 한국형사정책연구원이 발간한 ‘형법상 성폭력 범죄의 판단기준 및 개선방안:비동의간음죄의 도입 가능성을 중심으로’ 보고서에서 장임다혜 부연구위원과 이경환 변호사는 ‘저항’을 기준으로 성폭력을 정의한 현행 성폭력 범죄 법체계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다.

형법 제32장(강간과 추행의 죄)은 ‘폭행 또는 협박’을 사용한 성적 행위를 성폭력 범죄의 기본 유형으로 둔다. 이때 폭행·협박은 “피해자의 ‘저항’을 불가능하게 하거나 현저히 곤란하게 할 정도”여야 한다고 판례는 규정한다. 폭행·협박의 범위를 가장 좁게 해석한 이른바 최협의설이다.

문제는 폭행·협박의 최협의설에선 피해자의 저항 가능성을 기준으로 판단하기 때문에, 판단의 초점이 피해자가 저항을 얼마나 적극적으로 했는지에 맞혀지기 쉽다는 것이다. 바로 여기서 ‘적극적으로 저항하지 않은 피해자는 사실상 동의한 것과 마찬가지’라는 논리가 나온다.

더욱이 폭행·협박의 최협의설을 기준으로 위력·위계 사용, 심신상실·항거불능 상태 이용 등 다른 강제 수단을 좁게 규정하고 해석되는 문제도 발생한다.

미투 가해자들의 대표 범죄 수단인 ‘위력·위계’는 유·무형의 힘을 모두 포함하지만, 폭력·협박이 없었다면 미성년자·장애인 등 성적 자기 결정권을 행사할 능력이 제한되는 피해자의 경우에만 제한적으로 적용되도록 규정한다. 또 위력 행사를 판단할 때, 무형의 힘은 배제된 채 폭력·협박으로 저항 의사가 제압됐는지를 기준으로 삼는 경우가 대다수다.

또 심신상실·항거불능 상태를 이용한 준강간의 경우, 일시적인 정신기능 장애로 의사결정 능력이 없는 상태인 심신미약을 제외한 채 규정하고 있다. 폭행·협박의 최협의설과 같이 피해자가 절대적으로 무능력 상태여야만 인정되는 것이다.

서울 서초구 법원청사 모습. 2018.01.17.
서울 서초구 법원청사 모습. 2018.01.17.ⓒ사진 = 뉴시스

이로 인해 처벌 공백이 생겼다. 가해자의 간음행위가 피해자의 의사에 반한 것임이 명백하고 그 과정에서 폭행·협박이 행사됐더라도, 그 정도가 반항을 불가능하게 만들지 않으면 처벌할 수 없다. 대표적인 예로 성인인 피해자의 의사에 반해 위력을 이용한 간음을 한 경우, 가해자와 피해자가 업무상 보호·감독 관계가 아니면, 처벌 규정이 없어 무죄가 선고될 수밖에 없다.

‘피해자다움’에 매몰된 법관들로 인해 처벌 공백이 발생하기도 했다. 폭행·협박의 정도가 비슷한데도, 피해자가 저항하지 않았다거나 피해 이후 피해자의 행동이 피해자답지 않다는 이유로 유·무죄가 갈리기도 했다.

피해자가 아예 저항의 시도조차 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음에도, 저항하지 않았다면 저항 의사가 없었다고 본 것이다. 또 현실에서 나타나는 복잡하고 다양한 피해자들의 대응 방식을 무시한 채 잘못된 편견을 기초로 판단이 이뤄졌다.

최협의설에 따르면 피해자가 피고인과의 성관계를 애초부터 동의한 경우와 성관계에 동의하지 않았으나 행사된 폭행·협박의 정도가 충분치 않은 경우가 무죄라는 결론에 있어 아무런 차이가 없게 된다는 문제가 발생한다.

가해자에 ‘동의 구하지 않은’ 책임 묻는다

이에 따라 ‘폭행·협박’이 아닌 ‘비동의’ 요건을 기본적인 범죄유형으로 형법 제32장을 전면 개정하자는 주장에 힘이 실린다. 대신 비동의 성적 추행의 법정형을 낮추고 폭행·협박은 가중처벌하는 방향이다. ‘폭행·협박 = 의사 형성·표시 무능력 상태 이용 > 위력 > 비동의(위계 포함)’ 순으로 행위수단을 다시 체계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비동의를 입증하기 위해서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 판단은 더욱 중요해진다. 이에 ‘비동의 간음죄’ 도입 반대 의견에선 ‘피해자의 말에 따라 가해자의 처벌이 달라지는 것 아니냐’, ‘모든 남자가 범죄자가 될 수 있다’는 등 반발의 목소리가 나오기도 한다.

29일 서울고법 동문 앞에서 안희정 성폭력사건 공동대책위원회(공대위)는 안 전 지사의 재판 시작 한 시간 전 ‘보통의 김지은들이 만드는 보통의 기자회견’을 진행했다.
29일 서울고법 동문 앞에서 안희정 성폭력사건 공동대책위원회(공대위)는 안 전 지사의 재판 시작 한 시간 전 ‘보통의 김지은들이 만드는 보통의 기자회견’을 진행했다.ⓒ민중의소리

그러나 현재 성폭력 사건 재판에서도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은 유·무죄 판단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고 있다. 또 판례는 피해자 진술만이 아니라 피해자와 피고인의 당시 행위, 범행 전·후 행위, 주변의 상황 및 조건, 맥락에 대해 종합적으로 판단해 그 신빙성을 판단해야 한다고 판시한다.

폭행·협박 정도 판단과 진술의 신빙성 판단을 분리하기 때문에 오히려 피해자 진술을 더 꼼꼼하게 판단할 수 있다는 반박도 나온다. 이에 미국에선 비동의 간음죄 신설에도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 판단에 있어 ‘피해자다움’에 매몰될 것을 우려해 피해자의 과거 성적 이력이나 옷차림이 동의로 추정되는 증거로 인정하지 않는 절차적 규정을 도입하기도 했다.

가해자는 비동의에 대해 알지 못했거나 알 수 없었다는 사실을 입증해야 한다. 이때 가해자는 동의한 줄 알았다고 주장할 수도 있는데, 이 경우 피해자의 명시적인 동의 표시가 있는 때에만 합의가 인정될 수 있다.

명시적 거부 내지 비동의 언행이 이뤄지는 시점도 쟁점이 되는데, 미국·캐나다 등에서는 성적 행위에 동의한 사람이 행위 도중 동의를 철회하고 명시적인 거부의사표시를 한 경우까지 동의하지 않은 것으로 간주한다.

피해자의 거부의사표시가 명시적인 언행으로 표현되지 않은 경우, 범행 당시 또는 전·후 사정과 피해자와 피고인의 행동에 대한 판단 등 주변의 정황증거와 맥락을 통해 피해자가 동의할 수 없는 상태였는지 여부를 판단하게 된다.

강석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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