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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낙태죄 사망, 조국 독립에도 못 느낀 해방감 맛본 여성들
낙태죄 폐지를 주장하는 시민들이 11일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앞에서 기자회견을 마친 뒤 '낙태죄 헌법불합치' 판결에 환호하고 있다. 2019.04.11.
낙태죄 폐지를 주장하는 시민들이 11일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앞에서 기자회견을 마친 뒤 '낙태죄 헌법불합치' 판결에 환호하고 있다. 2019.04.11.ⓒ뉴시스

“나 낙태했어.” 함께 술을 마시던 어느 저녁 친구는 툭 내뱉었다. 5년 전 이야기였다. 애인에게 성폭행당해 한 임신이었다. “뭐 별거냐, 임신이나 출산처럼 자연스러운 거야”라고 아무렇지 않게 말해주고 싶었다. 그러나 하염없이 울기만 했다. 친구는 그해 건강이 무척 안 좋았다. 아무것도 몰랐던 내가 기억하고 있을 만큼. 고통과 두려움, 외로움 속에서 발버둥 쳤을 21살의 친구가 생각나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지난달 30일 기차 화장실에서 출산한 후 아기를 유기한 21살 여성이 경찰에 자수했다는 기사가 보도됐다. 그 흔한 ‘범행’ 동기조차 소개되지 않았다. 기사에 없는 내용이 눈앞에 그려졌다. 상대 남성·가족·국가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기에 기차 화장실에서 출산할 수밖에 없었을, 자신의 생명을 걸고 낳은 생명을 버릴 수밖에 없었을, 출산한 다음 날 경찰서에서 조사를 받았을 여성의 현실 말이다.

낙태의 죄. 그저 해묵은 논쟁이 아니다. 죄의 굴레는 여성을 옥죄고 있었다. 우리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생명의 아름다움을 배웠다. 하지만 그 아름다움을 만들어낸 여성의 몸과 생명은 존중받지 못했다. 경제 성장을 위해, 저출산 해결을 위해 여성들은 임신·출산에 따른 신체적·심리적 고통을 감내하도록 강요당했다. 생명 보호의 책임은 오롯이 여성에게 전가됐다. 낙태가 죄가 되는 사회에서 범인은 국가였다.

지난 11일 헌법재판소는 낙태죄의 사망을 선언했다. 여성이 ‘출산 도구’가 아닌 인간으로 인정받는 역사적 순간이었다. 헌재는 임신한 여성의 자기결정권과 태아의 생명권이 대립적 관계가 아닌 긴밀한 관계임을 인정했다. 또 임신·출산·육아는 여성의 삶에 근본적이고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어 여성 스스로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고 봤다. 특히 여성이 낙태할 수밖에 없는 다양한 현실을 적시한 부분은 주목할 만하다.

이것이 해방감일까. 일제강점기부터 낙태한 여성을 처벌한 탓에 조국 독립 때도 못 느꼈을 해방감을 여성들은 2019년에서야 느꼈다. 낙태죄 위헌으로 끝이 아니다. 일제로부터 독립돼 새 국가의 틀을 다지기 시작한 것처럼 여성들은 낙태죄 폐지 이후의 세상을 계획하고 있다. 안전한 임신중지를 위한 유산유도제 도입이 그 시작이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우리도 태아였다”라며 합헌 의견을 낸 조용호·이종석 재판관에게 전한다. 여성도 인간이다.

강석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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