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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민보] 남자 복 없는 팔자 센 여자? “속 터지는 소리” 페미니스트 명리학자의 일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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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로 태어났으면 정치인 했을 텐데 아깝네” 여자는 정치하면 안 되는 건가? “성공하려면 몸매를 열심히 가꿔봐” 성공과 몸매가 무슨 상관이지? “화냥년 사주네. 아, 남자들한테 인기가 많다는 뜻이야” 지금 이걸 칭찬이라고 하는 건가?

친구가 사주보러 갔다가 이상한 소리만 듣고 왔다며 분통을 터뜨렸다. 피가 거꾸로 솟을 일이다. 돈 내고 이런 말까지 들어야 한다니. 생각의 고리타분함이 조선 시대 저리 가라다. 성차별적인, 아니 성희롱에 가까운 발언이 명리학의 이름을 하고 쏟아진다.

남자에겐 좋지만, 여자에겐 나쁜 사주가 있다. 이른바 ‘고현정 사주’. 주로 강인하고 진취적이며 리더의 성향인 여성들이 갖고 태어나는 사주다. 이런 사주를 가진 여성이 역술인에게 들을 말은 뻔하다. “남편 기죽여 가정 망칠 팔자 센 여자”

있을지 없을지도 모를 미래의 남편을 위해 개명이라도 해야 하나. 이쯤 되면 여자 사주와 남자 사주가 따로 있나 생각이 들 정도다. 정말 남자는 바깥에 나가 열정적으로 도전하고, 여자는 집에서 그런 남자를 조용히 지지해야 잘 사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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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리스 제공

능력 있는 여성, 남자 복 없다?
사주 문제 아닌 성차별 사고 때문

가슴이 답답해질 이때, 페미니스트 명리학자 릴리스 씨가 나타났다. 시대를 쫓아오지 못한 게으른 사주 상담가들을 향해 그는 말한다. “속 터지는 소리 그만 좀 하세요” 페미니즘을 기반으로 명리학을 새롭게 해석한 릴리스 씨를 지난 1일 서울 강남구 그의 상담실에서 만났다.

“여자가 관운(명예운)이 있으면 남자 복이 없나요?” 주변에서 가장 궁금해했던 것부터 물었다.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다. 릴리스 씨는 “사주의 문제가 아니라 ‘여성은 남자보다 잘나면 안 된다’는 성차별적 사고 때문”이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능력 있는 여성의 사주를 놓고 남자 복이 없다는 건 그 사람들 사주가 나쁜 게 아니에요. 기울어진 젠더 지형에서 비롯된 거죠. 현실적으로 한국사회에서 강인하고 진취적이며 능력 있는 여성은 자신을 내조해줄 남성 배우자를 만나기 쉽지 않잖아요. ‘남자 기죽인다’, ‘열등감 준다’는 말이나 듣죠”

그는 “성 평등한 현실에서 여성과 남성의 사주가 같을 때 다른 해석이 나올 일은 없다”라고 말했다. “명리학에서 가장 이분법적인 부분은 절대적으로 남자를 양, 여자를 음의 존재로 규정짓고 당연히 그래야만 정상이라고 주장하는 거예요. 그럼 그 공식에 맞지 않는 많은 사람의 인생을 폄훼하게 돼요. 사주에 양의 글자를 많이 가진 여성에게 남자로 태어났어야 했는데 잘못 태어났다는 말도 거기서 비롯된 것이죠”

여성은 명리학 안에서도 평가 대상
‘명리학의 현대화’ 필요해

“태어날 때부터 페미니스트”였다는 릴리스 씨는 페미니즘이라는 그릇에 명리학을 담아냈다. “어렸을 때부터 호기심도 많고 반항아적 기질이 있어서 질문을 많이 했어요. 왜 남자 주민등록 번호는 1이고, 여자는 2인지 같은 것들이었죠. 원래 이상한 애가 명리학을 배워서 새로운 것을 창조해낸 셈이죠. 하하”

그는 이성애·남성 중심 세계관의 전통적이고 성차별적인 명리학 해석을 지양한다. 내담자가 상담을 받을 때 자신에 대해 떳떳하게 밝히지 못하거나 상처받는 이야기를 들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이에 편협한 사주 해석에 염증을 느낀 2030대 여성들과 성 소수자들이 ‘릴리스의 방’을 찾는다.

과학을 신봉하는 공대생이었던 그 역시 사주는 마음 약한 사람들이나 보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타고난 명리학자 사주로 우연히 소개받은 사주 상담가에게 스카우트 당했다. 수강료를 받지 않더라도 꼭 제자로 삼고 싶다던 스승의 설득이 계기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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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리스 제공

“명리학은 통계학”이라고 그는 설명했다. 과거 나와 같은 사주를 가진 사람들의 삶의 공통점을 뽑아 기록화한 명리학을 통해 내가 어떤 사람인지, 인생에서 큰 사건들이 언제 닥칠지 통계적으로 예상할 수 있다는 것이다. 24절기와 비슷하다. 매해 입춘이 되면 꽃이 피고, 입추가 되면 시원한 바람이 부는 것과 같은 이치다.

릴리스 씨는 ‘명리학의 현대화’를 강조했다. “2030대 여성들은 치열한 경쟁 속에서 자신의 경력을 쌓는 데 집중하고 있잖아요. 그런데 사주 상담가들은 있을지 없을지도 모를 남편이나 자식 얘기나 하고, 남자 우습게 보는 사주라고 하고. 속 터지는 얘기만 하는 거죠”

“사주 상담가들이 빠르게 변화하고 있는 현대 사회를 따라잡아야 해요. 지난 2백 년의 변화가 이전 2천 년의 변화보다 빠르고, 지난 20년의 변화가 이전 2백 년의 변화보다 빠르잖아요. 압도적으로 과거 기록이 많은데 현대 사회에 맞지 않는 부분들은 개선해나가야죠. 현실감각이 필요해요”

그는 작명할 때 가장 화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여아의 이름을 짓는데, 어떤 수리나 한자는 ‘너무 좋아서 여자 이름에 쓰기 아깝다’, ‘너무 강해서 여자 이름에 쓰면 남편과 불화가 예상된다’ 이런 말들이 아직도 책에 쓰여 있어요. 태어날 때부터 여자는 예쁘고 착하고 순할 것을 기대받는 거잖아요”

여성은 명리학 안에서도 평가의 대상이었다. 좋은 아내가 될 수 있는 사주, 남편·자식 복 없는 여자 사주, 심지어 화류계 여자 사주까지. 인터넷에서 여성의 사주는 카테고리별로 시리즈가 다양했다. 릴리스 씨는 “여성 신체에 대한 평가와 비슷하지 않아요? 쪼개고 쪼개서 감정하죠”라고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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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리스 제공

그는 내담자들로부터 여성들이 겪는 성차별·성폭력 문제를 많이 듣는다고 말했다. “직장 내 성폭력 사건을 고발했던 내담자였어요. 얼마 후에 재취업하게 이직운이 있나 봐 달라고 연락이 왔더라고요. 옳은 일을 했지만 결국, 그분이 고립되고 해고당한 것이죠”

상담가가 내담자의 취약성을 악용해 성폭행까지 이어질 수 있다고도 했다. “상담가의 발화 권력을 가지고 사익을 취하는 사기꾼들도 있어요. 다짜고짜 성희롱하기도 하고, 심한 경우 ‘나랑 자면 운이 트인다’는 등의 이야기도 하죠. 내담자는 행복할 때 상담가를 찾지 않아요. 상담하는 순간만큼은 심리적으로 상담자에게 의존하기 때문에 상대적 약자에요”

힘들 때 외국은 정신과, 한국은 사주가 찾아
“사주는 해결책 아닌 ‘가이드북’”

“힘든 일이 있을 때 외국은 전문심리상담센터나 정신과를 찾는데, 한국은 사주 상담가를 찾아요. 그래서 심리치료와 상담에 대한 전문적인 기술을 배우고 싶었어요” 그가 상담심리학과 2학년으로 재학 중인 이유다.

“가끔 자기결정권을 상실하고 제게 결정을 내려주길 바라는 분들도 계세요. 다른 사람의 인생이니 심리적으로 부담감을 느끼기도 하죠. 단호하게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말하는 역술인들도 많지만, 저는 결정은 본인이 해야 한다고 말씀드려요”

사주는 해결책이 아니라 일종의 가이드북과 같다고 릴리스 씨는 말했다. “자신이 어떤 사람인가, 상황과 시기에 따라 무엇을 잘할 수 있나 사주를 통해 알 수 있어요. 사주를 보는 건 삶의 효율성을 높이는 일이죠”

마지막으로 소원을 묻는 말에 릴리스 씨는 “소원 같은 것을 꿈꿀 만큼 세상이 아름답지 않다”라다가도 “거창한 소원을 말하겠다. 완전한 성 평등이 이뤄진 세상을 꿈꾼다”라며 웃었다. ‘성 평등 세상이 오긴 하는 거냐’라는 회의적인 질문에 “다이내믹 코리아라면 가능할 것 같다”라고 희망찬 대답을 내놨다.

강석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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