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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힘겨운 시간 속에 숨겨진 ‘작은 반짝임’, 류승희 단편만화집 ‘그녀들의 방’
류승희 단편만화집 ‘그녀들의 방’
류승희 단편만화집 ‘그녀들의 방’ⓒ보리

고등학교 시절이다. 체력장 측정을 위해 오래달리기를 했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트랙을 돌았다. 마지막 바퀴를 앞두고 속도를 높였다. 하지만, 끝인 줄 알았던 마지막 바퀴는 끝나지 않았다. 한 바퀴가 더 남아 있었다. 그렇게 나머지 바퀴를 뛰며 온몸의 힘이 쫙 빠져버리고, 말았다. 돌아보면 인생은 늘 그러했다. 이번이 마지막인 줄 알았던 고통은 매번 반복됐다. 어느 시인이 노래한 것처럼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아라. 슬픈 날은 참고 견디라 기쁜 날이 오고야 말리니”라고 굳세게 믿어보지만 슬픈 날을 아무리 참아도 기쁨을 만나긴 쉽지 않다. 그러나 그렇게 힘겹게 지나온 시간 속에서도 우리는 삶의 숨통을 틔우는 시원한 바람과 어둠들 사이로 솟구치는 ‘작은 반짝임’을 곳곳에서 만나곤 한다.

서른 넘어 만화를 그리기 시작했고, 처음 낸 단행본 ‘나라의 숲에는’으로 2013년 ‘오늘의 우리 만화상’을 받은 류승희 작가가 6년 만에 선보인 단편집 ‘그녀들의 방’이 다루는 이야기도 그러하다. 독립하지 못한 세 딸을 거두고 있는 엄마,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지 못한 채 집과 도서관을 오가는 첫째,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며 만화가를 꿈꾸는 둘째, 지방 대학을 다니며 졸업을 앞두고 다시 휴학해야 하는 셋째. 그리고, 그녀들이 사는 집은 여덟 개의 계단을 내려가야 하는 반지하다. 꿈마저 눅눅하게 곰팡이가 필 것 같은 그곳에서 그녀들은 졸업, 취업, 연애, 결혼, 실직과 같은 각기 다른 삶의 위기를 겪는다. 그런 삶의 위기는 자신만의 고민이기도 하고, 때론 가족들의 고민이 되기도 한다. 그런 고민을 서로 이야기하기도 하고, 서로 들어주기도 하며 가족들은 각자의 삶을 그리고, 가족의 삶을 이어가고 있다.

5년 전 아버지와 이혼했지만 한 해에 여덟 번이나 되는 제사를 계속해서 지내는 엄마. 이혼한 아빠도, 아빠의 형제도 찾아오지 않지만, 엄마는 아무 말 없이 제사를 지낸다. 오랫동안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첫째 딸 진영이는 식구들에게 한마디 말도 없이 시험을 치러 간 날, 아침도 먹지 않고 간 큰딸을 걱정하며 엄마와 둘째 딸 선영이는 동네 도서관으로 향한다. 엄마가 도서관에서 처음으로 빌린 책은 로맨스 소설 ‘그대 눈에 흐르는 눈물’. 긴 수험 생활로 힘들어하던 진영이도 엄마가 빌린 책 제목을 듣고 그제야 웃는다.

류승희 단편만화집 ‘그녀들의 방’
류승희 단편만화집 ‘그녀들의 방’ⓒ보리

선영이가 고등학교 시절 점심시간마다 학교 운동장은 배드민턴을 치는 고3 학생들로 가득하다. 1학년 때는 쉬는 시간마다 배드민턴을 치는 고3 선배들이 이해가 되지 않았는데, 이제는 배드민턴을 칠 때마다 라켓 너머로 보이는 하늘이 좋다는 걸 안다.

대형서점 안 다이어리 판매점에서 아르바이트하는 선영이는 어느 날, ‘알바 킬러’로 유명한 직원 하나가 옆 매장 알바생을 괴롭히고, 알바생은 ‘평생 이딴 곳에서 일하라’며 욕을 하고 알바를 그만둔다. 이 일을 보며 선영이는 대학 입학 전 추운 겨울, 첫 아르바이트를 하던 때를 회상하게 되지만, 그때로부터 아홉 번의 겨울이 지난 그는 아직도 아르바이트하고 있다.

이들 네 식구는 좌절을 겪고, 아픔을 겪지만, 삶 속에서 소소한 아름다움과 기쁨을 찾아간다. 그것이 커다란 희망은 아니지만, 모두 다 잘될 거라는 긍정의 힘을 아니지만, 오늘을 삶아가는 힘을 곳곳에서 얻는다. 류승희 작가는 이제 나는 그녀들이 사는 계절을 지나, 전혀 다른 계절을 걷고 있다. 여기에는 나만 바라보는 두 아이가 있고, 나와 함께 걸어가는 남편과 식구들이 있다. 우리 여전히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힘겹게 걷는다. 하지만 잠깐 멈춰 서서 주위를 둘러보면 어딘가에 신기루처럼 보였다가 사라지는 반짝임을 볼 수 있다. 이제는 그 작은 순간들을 놓치고 싶지 않다. 그리고 차가운 계절을 걷는 누군가에게도 이 ‘작은 반짝임’을 전하고 싶다”고 말한다.

권종술 기자

문화와 종교 분야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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